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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영 Baek Nan Young (baeknanyoung@hanmail.net)
AIS(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 과정 1,2,3 레벨 이수 후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이탈리아 와인투어 전문기관 바르바롤스쿠올라(BARBAROL SCUOLA)를 운영하고 있다. 베를린 와인 트로피 심사위원이기도 한 백난영은, 이탈리아 와인 및 와인 관련 문화, 행사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와인 관련 전문 통/번역가, 랑게와인 앰버서더(Langhe Wines Ambassador)로도 활동 중이다.
Certified Professional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l President of Barbarolscuola, specialized in Italian Wine & Gastronomic Tour l Columnist of Korean Online Wine Magazine l Member of Judging Panel at: The International Wine Award Mundus Vini, International Wine City Challenge, Emozioni Dal Mondo, Portugieser Du Monde l Blogger l 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l Awarded as Best Foreign Journalist for Roero Win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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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들과 외식하기로 한 날, 그녀들은 일제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음식 버킷리스트를 뒤적인다. 춘천 닭갈비, 나주 곰탕, 대부도 바지락 칼국수, 수원 왕갈비가 쏟아져 나오는 모양새들이  대한민국 맛지도를 그릴 기세다. 언제부터 우리는 메뉴를 고를 때  달랑 요리 이름만으로  결정하는 평범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이왕에 비슷한 재료와 레시피로 요리했다면 자신이 고대하던 참맛과 일치하는 출신지의 투명함을 원한는건 아닐까?


와인도 평범함을  참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베르나차(Vernaccia)란 품종이 그러한 경우로, ‘이곳’ 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 vernaculum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탈리아 특유의 중세시대 고립성이 와인과 맞아떨어진 것으로. 어떤 마을이나 한 공동체에서만 마시던 동네 와인이다. ‘이곳 와인’이 계속 늘어나면서 베르나차의 지역성도 평범함에 파묻히게 된다. 결국 모호함이 혼동을 낳는 순환을 끊으려는 시도가 있었고 베르나차 뒤에 지명을 붙이는 풍습을 낳는다.


현재까지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베르나차 와인은 산지미냐노의 베르나차(Vernaccia di San Gimignano,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오리스타노의 베르나차( Vernaccia di Oristano, 사르데냐 와인, 셰리처럼 플로르 숙성 방식으로 만든 강화와인), 세라페트로나의 베르나차( Vernaccia di Serrapetrona, 세라페트로나는 마르케주에 소재하는 마을, 스위트 와인과 스푸만테 타입이 있다)를 들 수 있다. 명사 베르나차를 공유한다는 것만 같을 뿐, 세 와인은 풍미가  완전히 다르며 유전자가 같거나 일말의 친척관계도 없다. 오롯이 유일함이 전재산인 베르나차 와인은 마을 이름과 결합된 채 품종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2.jpg<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 품종>

 


베르나차는 머리 털나고 처음 들어보았다고? 그럼 산지미냐노는 귀에 익숙할 지도 모른다. 약간 과장하자면, 산지미냐노는 이탈리아의 맨해튼이며 토스카나 음식 버킷리스트의 단골인 돈도리 아이스크림이 유명한 산지미냐노의 맛이다. 산지미냐노와 베르나차 와인의 유착관계는 매우 견고하고 뿌리가 깊다.  1276년에 쓰인 고문서에는 산지미냐노에서 양조된 베르나차 와인이 기록되어 있고 단테는 신곡에서, 보카초는 데카메론에서 이 와인을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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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스테르나 광장에 자리 잡은 돈도리 젤라테리아Gelateria Dondoli.  주인장인 세르조 돈돌리는 세계 아이스크림 월드컵 우승을 두 번 재패했다고 하는데 그의 젤라토 맛을 보려고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인파로 정문 앞은 일년 내내 인산인해다>

 


1465년 로렌조 데 메디치 공의 누이(Nannina Medici)의 결혼식 축하주로 올랐고 동시대에 밀라노 공국의 대공 루도비코 일모로는 친척의 결혼식 선물로 쓰일 다량의 와인을 산지미냐노영주에게 요청했다. 당시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인물들로부터 수요가 늘어나자 산지미냐노 당국은 두 명의 시음 기능자를 두어 최상의 와인을 선별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16세기에는 피렌체 고 중심가에 위치한 팔라쪼 베끼오 성 내부 ‘5백 인의 홀’의 벽을 장식하게 된다. 이로서 산지미냐노의 베르나차 와인은 이미 벽화 주제로 쓰인 끼안티 지방의 검은 수탉과 나란히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부상한다.
     

 

4.jpg<Palzzo Vecchio궁 내부 Salone dei Cinquecento홀의 복원을 맡았던 조르조 바사리가 그린 “산지미냐노와 콜레 발델사 Allegoria di San Gimignano e Colle Val d’Elsa”를 풍자한 그림이다. 베르나차 와인을 마신 사티로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정령)가 몽롱한 상태다. 사티로스 머리 뒤로는 탑의 도시 산지미냐노가 보인다(출처: 위키피디아).>

 


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 와인은 바다가 낳은 와인이다. 산지미냐노가 이탈리아 서부에 면한 지중해로 부터 50km 떨어진 내륙에 있는데, 누구는 “웬 바다?” 로 반문할 수도 있겠다. 바다는 멀지만 포도밭에서 조개 화석이 자주 불거져 나와서 그런데, 이유는 이렇다. 플리오 세기(약 180만 년에서 680만 년 전 사이) 때 산지미냐노 일대는 바다였고 바다생물의 사멸,  화학변화, 퇴적이 반복되면서 쌓였던 해성층이 땅의 작용에 의해 해저에서 솟아오른다. 돌출된 해성층 중에서 2백~4백 미터 높이의 낮은 구릉지에서 베르나차 품종이 번성한다. 황색 모래와 점토가 섞여 투수성이 좋고 토질이 부드럽고 유연해 뿌리가 경쾌하게 뻗어 내려가면서 주변의 영양분을 빨아들이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산지미냐노의 베르나차는 이탈리아 서해안을 따라 재배되는 리구리아의 베르멘티노와 시칠리아 섬의 안소니카와 더불어 지중해 화이트 와인의 트라이앵글 구도를 완성한다. 셋 다 여름이 무덥고 건조하며 겨울 기온이 온난 다습해야만 맛 좋은 열매를 맺는 기질이 지중해와 맞아 떨어진 거다.


직선적이며 숨김없는 베르멘티노에 비해 어린 베르나차는 수줍다. 싱그러운 흰꽃, 샤프란, 레몬, 아몬드, 골든 사과향이 푸릇하며 깔끔, 발랄한 산미와 산도에 녹아있는 짠맛이 바다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베르나차의 지중해 정서는 수확 후 일년 뒤면 좀더 외향적이며 적극성을 띄게 된다. 영롱한 골드빛의 와인이 잔에 출렁일 때는 영락없는 금발의 풍만함이다. 잘 익은 바나나, 자몽, 견과류, 돌, 페트롤, 매콤한 허브향이 조화롭게 피어난다. 혀의 신경은 산미와 닿으면 곤두서지만 알코올의 매끈함이 스며들면 곧 나긋나긋해진다. 


산지미냐노의 2월, 아침 9시는 특별하다. 좁은 골목길은 훌륭한 산책길이지만  2월의 이른 아침에는 찬바람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환풍구로 급변한다. 급강하한 체온을 회복시켜줄 음료에 대한 욕망이 간절해지고 베르나차와  카푸치노 사이에서 고민하는 9시경, 교회 종탑 소리가 찬 공기를 가른다. 종 탑 열린 틈에 숨어있던 새들이 땡땡 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공중으로 흩어지면서 산지미냐노는 일순간 신비의 커튼이 걷힌다.


담 넘어 세상을 훔쳐보는 호기심 찬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성벽 위로 삐죽 나온 토리(torri, 탑)들. 산지미냐노의 상징인 토리는 영국에서 시작해 프랑스, 이태리의 로마로 끝나는 로마 성전 순례 길(Via Francigena)이 산지미냐노를 관통하는 11세기 무렵에 축성된다. 이때 거부를 거머쥔 신흥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탑 높이로 과시하려 했으며 무려 76개의 토리가 세워진다. 다수는 파괴되었고 가정집의 일부로 혹은 다른 목적의 건물로 변형된 형태로 지금은 13여 개가 남아있다.


치스테르나 광장(Piazza della Cisterna)은 산지미냐노의 머리에 해당하는 ‘로카 공원’ 다음으로 토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우물이 있는 광장’이란 뜻인데 정작 우물은 광장 한 켠에 쏠려 있어 존재감은 작아 보인다. 하지만 토박이들과 순례자들의 모든 물의 쓰임새를 감당하던 넉넉한 생명줄이란 전력을 갖고 있다. 산지미냐노의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던 토리는 당차고 꼿꼿하다. 그러나 광장에서 올려다보면 그저 키다리 아저씨처럼 정답고 반가울 뿐이다. 광장에 둘러선 고 저택의 창은 크고 투명해서 광장을 인간 세계로 끌어들일 기세다.
 


5.jpg<우물이 상징인 치스테르나 광장>

 


우물 맞은편의 시청사 건물 안에는 아름다운 벽화를 소장하고 있다.  탑의 도시인 산지미냐노를  예술의 도시로 다시 정의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발각된다 해도 이를 묵인할 만큼 걸작이다. 1317년 립포 멤미가 그린 La Maestà(무릎에 아기 예수를 앉힌 성모 마리아상) 벽화가 건물 안 2층에 있는 단테홀 사방을 차지하고 있다. 단테가 산지미냐노에 머무른 날을 추억하는 작품이라는데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 14세기 인물들의 시선이 일제히 당신을 향해 꽂힌다. 시선집중의 전율을 즐긴다면 단테홀은 적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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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사 건물내부의 단테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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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Mormoraia 와이너리의 플래그십 와인들. 포도밭에서 산지미냐노의 성벽과 탑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1980년 이전에는 와이너리 건물이 수도원 소유였으며, La Mormoraia는 수도사들이 기도할 때 웅얼거리는 울림의 의성어다. 이곳의 주력 와인은 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로 양조방법과 와인의 향미의 세기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뉜다. 모두 점토가 주된 성분인 해발 3백 미터 안팎의 언덕에서 자라난 베르나차로 만들었다. SUAVIS(위 사진 왼쪽)는 스테인리스 스틸 용기 내부에서 4개월 숙성시킨 가볍고 날렵한 베르나차다. 오크 숙성 후 효모와 최대 5개월간 일부러 놔두어 숙성의 맛을 얻은 OSTRE(사진 중앙)는 농후한 과일과 페트롤 뉘앙스가 세련된 느낌이다. 리제르바인 ANTALIS(사진 오른쪽)는 크기가 다양한 오크통에서 발효를 마친 다음 오크통에서 최대 12개월간 숙성했다. 포도의 아로마와 오크의 바닐라 풍미, 보디감이 그윽하며 밸런스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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