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와인애호가나 와인전문가라면 누구라도 참가하고 싶어하는 오스트리아 최대의 와인 페스티벌 <VIEVINUM 2018>(이하, 비비늄)을 다녀왔다.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비비늄은 ‘가장 여행하고 싶은 도시’로 꼽히는 비엔나, 그것도 유서 깊은 호프부르크Hofburg 왕궁에서 열리는 화려하고 다채로운 와인행사다. 전 세계에서 초대받은 와인수입업자, 소믈리에, 언론인 등 천여 명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만 오천 명에 달하는 일반 와인애호가나 관광객도 같이 참가하고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와인 축제’이며, 이 점에서 VINEXPO, VINITALY, PROWEIN 같은 다른 와인 박람회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 ÖWMAnna Stöcher
올해 열린 비비늄은 ‘지난 20년동안 유럽에서 와인 수출 증가율이 가장 높은 나라, 와인의 병당 평균 단가가 가장 비싼(3.39유로) 나라’인 오스트리아의 와인이 거둔 현재적 성공과 세계시장에서의 위상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렇다고 이 행사가 오스트리아 와인의 판매나 수출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니다. 비비늄에는11개 DAC(와인 원산지)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와인생산자 550명이 참가하여 최근 빈티지 와인(올해의 경우에는 2017년 빈티지), 가장 좋은 빈티지 와인, 플래그십 와인을 아낌없이 내놓았고, 방문객들은 이들 와인을 버티컬로 때로는 생산단위별로 마음껏 비교 시음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프로그램 몇 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바이오 다이나믹 와인 세미나
2. 오스트리아 최고의 와인 산지, Wachau의 과거와 현재
3. Burgenland DAC 최고의 빈티지 2015 집중탐구
4. 부르고뉴 피노 누아 VS 오스트리아 피노 누아
5. 품종에 따른 오스트리아 11개 DAC 와인 시음
6. 오스트리의 스파클링 와인
비비늄은 이처럼 다양한 주제로 심도 깊은 세미나와 완성도 높은 시음 프로그램을 제공했으며, 정교한 구성과 매끄러운 운영으로 조직력 또한 돋보였다. 이 밖에도 성대한 전야 행사와 야외 음악당에서 열린 ‘빅 와인 파티’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와인 축제 비비늄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진짜배기 마케팅의 위력을 보여주며 참가자 모두를 단 4일만에 오스트리아 와인의 예찬론자로 만들어버린 AWMB(Austrian Wine Marketing Board)의 기획력과 실행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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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마음 한 켠에 자리잡는 옹이 같은 것이 하나 있는데, 대량생산되는 싸구려 와인을 따라주며 수지 맞추느라 안간힘 쓰는 우리나라의 와인 행사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와인산업을 세계 수준으로 견인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절대적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오스트리아에도 와인이?
하얀 눈 고깔을 뒤집어쓴 위풍당당한 알프스의 험산준령과 산맥에 둘러싸인 나라, 검푸르고 유장한 도나우강의 도도한 물줄기가 흐르고 어디를 가나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르른 도나우강’이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풍광의 나라. 여기가 바로 ‘유럽의 심장’이라 불리는 오스트리아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예술문화의 총체적 도시’ 비엔나 시내를 걷다 보면, 비엔나커피, 비엔나소시지, 슈니첼 등 미식과 관광도 한몫을 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디에서나 그렇듯 미식과 관광의 정점에는 언제나 와인이 등장하는 법! 비엔나 시내 카페에 앉아 마시는 시원한 젝트(Sekt, 스파클링와인) 한잔도 깜짝 놀랄 만큼 신선하고 맛있다. 이와 함께 드는 의문은, 여느 유럽의 와인 생산국가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기원전 4세기부터 포도를 재배했고 중세시대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와인을 생산해 온 전통 있는 와인생산국가인데, 최근까지 오스트리아 와인은 왜 세계무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왜 오스트리아 와인은 잊혀 졌을까?
와인애호가들에게조차 오스트리아 와인은 다소 생경하다. 오스트리아의 와인과 그뤼너 벨트리너 같은 대표 품종, 바카우와 캄프탈 같은 와인산지 이름이 알려진 것은 불과 최근의 일이다. 와인생산량의 약 3분의2가 자국에서 소비되기 때문에 수출량이 극히 적기도 하겠지만, 다른 이웃나라와는 사뭇 다른 와인산업의 위상을 얻게 된 데에는 몇 가지의 원죄같은 것이 존재한다.
오스트리아는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다. 전후 1919년 생제르맹 조약으로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훨씬 더 작은 영토를 갖게 된 현재의 오스트리아가 탄생했다. 전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신생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자존심이었던 ‘고급 수작업 와인’을 만들 여유가 없었고, 값싸게 마실 수 있는 많은 양의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와인상인들은 약간 달고 싱거운 듯한 싸구려와인을 대량으로 만들어 시장에 공급하는 한편, 비슷한 처지의 이웃나라 독일에도 수출하며 돈벌이에 사로잡혔다. 이들의 욕심은 점점 더 커졌고 급기야는 1985년에 최악의 와인 스캔들이 터지고 만다. 어느 부패한 소규모 와인 브로커들이 싸구려 와인을 더 비싼 가격으로 팔아 넘기기 위해 디에틸렌 글리콜(diethylene glycol. 부동액의 성분)을 섞어 더 풍부하고 달콤한 와인으로 둔갑시켜 팔다가 발각된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전 유럽으로 퍼졌고, 오스트리아는 ‘가짜 와인 생산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세계 와인 산업에서 은자의 자리로 조용히 침잠했다. 이후, 부단한 노력과 혁신으로 과거의 부끄러운 원죄를 갚아야 하는 것은 살아남은 와인생산자들의 몫이었다. 독일과 같은 와인 법규를 도입하고 와인 생산에 엄격한 규정을 도입함은 물론, 유럽에서도 가장 청정하고 자연적인 환경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로의 대변신을 꾀했다. 오스트리아의 토착 품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가 하면, 독일과 달리 드라이한 화이트와인을 만들어 오스트리아 와인만의 독특한 품질과 가치를 만들어갔다.
반전의 시작!
2002년 런던 테이스팅 그리고 반反-파커 운동
오스트리아의 화이트와인은 와인전문가들 사이에서 점차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2002년 ‘런던 테이스팅’은 극적 반전의 서막을 열어주었다. 레이블을 가린 채로 시음, 선정한 가장 훌륭한 열 개의 화이트와인 중에 오스트리아 와인이 일곱 개나 되었고 그 중 그뤼너 벨트리너로 만든 와인이 다섯 개나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와인은 고급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들 사이에서 핫한 아이템으로 부상한다.
때마침 반反-파커 운동의 물결도 일고 있었다. 품종, 생산 방식, 테루아의 다양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와인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이 운동은, 몇몇 국제 품종이 독점하는 기존 와인 시장에 대한 시대적 멀미 현상이었다. 그리고 런던 테이스팅에서 급부상한 오스트리아의 그뤼너 벨트리너는 그때까지 화이트와인의 패권을 쥐고 있던 샤도네이 품종에 대한 대항마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영국의 저명한 와인평론가 젠시스 로빈슨은 “오스트리아 와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소믈리에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화이트와인”이라고 말하며 그뤼너 벨트리너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지금은 이러한 애정이 “가장 까다로운” 소믈리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뤼너 벨트리너는 고급 레스토랑이라면 와인 리스트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전벽해라 할 만큼 위상이 높아진 그뤼너 벨트리너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소비뇽 블랑, 리슬링, 트라미너 같은 화이트와인도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또한 피노 누아나 블라우 프랑키쉬 같은 레드와인 품종도 유럽의 레스토랑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다. 유기농법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의 후예답게 바이오 다이나믹 와인, 내추럴 와인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명성을 쌓고 있음을 주목하자.
오스트리아의 와인 법규와 양조철학, 새로운 13개의 DAC
오스트리아의 현행 와인 법규는 유럽에서도 가장 엄격하다. 모든 와인에 대해 수확 당시 포도의 최소 당분 함유량과 최대 알코올 도수 등 정확한 요건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수준인 프래디카츠바인(Prädikatswein)의 여섯 단계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법률을 통해 포도재배지역, 1헥타르당 최대 와인생산량, 가당 허용 여부, 사용되는 발효방식, 레이블에 반드시 기재해야 할 정보 등을 규제한다. 게다가 각각의 와인은 과학적인 테스트를 거쳐 공식적인 인증번호를 받아야 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와인양조 철학은 독일이나 알자스처럼 순도를 중시한다. 화이트와인 양조 시 오크통 발효는 거의 하지 않으며, 사용할 경우에도 신중을 기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와인의 대부분은 드라이하다. 트로켄 와인은 법적으로 잔여 당분이 0.9% 이하임을 말하며 대부분 그 반도 안 된다. 물론, 소량이지만 스위트와인도 생산한다.
DAC는 2002년에 도입된 오스트리아의 와인 원산지 통제명칭 제도이다. Districtus Austriae Controllatus라는 라틴어의 줄임말이며, 소비자들이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레이블에 표기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수확한 포도의 당도를 기준으로 한 독일식 와인 등급 제도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원산지 명칭 통제 제도의 장점을 모아 오스트리아 와인에 적합한 DAC 규정을 마련했다. 따라서 와인 생산자가 DAC를 받으려면, 와인 생산지 별로 정해진 포도품종, 최소 알코올 농도, 잔당, 품질인증번호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Weinviertel DAC, Traisental DAC, Kremstal DAC, Kamptal DAC, Leithaberg DAC, Eisenberg DAC, Neusiedlersee DAC, Mittelburgenland DAC, Wiener Gemischter Satz DAC, Rosalia DAC에 7월 11일자로 Vulkanland Steiermark DAC와 Südsteiermark DAC 그리고 Weststeiermark DAC가 추가되어 총 13개의 와인원산지가 있다. 이 중 그뤼너 벨트리너 원산지로 지정된 DAC는 Weinviertel, Traisental, Kremstal, Kamptal 등 네 곳이다.
그뤼너 벨트리너 그리고 바카우
오스트리아는 전체 와인생산량의 80%가 화이트와인이다. 그뤼너 벨트리너는 오스트리아 와인 생산량의 약 3분의1을 차지하는 토착 품종으로 오스트리아 남부 지역을 제외한 모든 와인 산지에서 생산된다. 황색의 퇴적토 토양에서 특히 잘 자라며, 강한 번식력을 가진 품종의 특성상 수확량 제한이 중요하다. 깔끔한 후추 풍미와 훌륭한 산미로 대변되는 그뤼너 벨트리너 와인은, 가볍고 경쾌함을 보여주는 신선한 와인부터 섬세한 맛을 내거나 묵직한 바디감을 지녀 장기숙성에 적합한 와인 그리고 귀부와인과 아이스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양조되고 있다.
숙성 초기의 그뤼너 벨트리너는 라임, 레몬 풍미와 생동감 있는 산미가 매력적인데 식전주로 혹은 기름진 돼지고기 요리와 함께, 또는 무더운 여름에 즐기기에 적합하다. 리저브 스타일의 그뤼너는 레몬, 백후추, 벌꿀, 견과류 풍미와 풍성한 질감을 드러내며 그뤼너 특유의 산미가 긴 피니쉬에 좋은 여운을 남긴다.
© ÖWMAnna Stöcher
그뤼너 벨트리너는 오스트리아인의 일상과 함께 하는 와인인만큼 현지에서는 짧게 ‘그뤼베’ 라고도 불리며, 독일어가 익숙하지 않은 미국의 와인애호가들은 ‘그루너’ 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그뤼너 벨트리너 산지는 비엔나의 북서쪽에 위치한 니더외스터라이히(영어식 Lower Austria)이다. 오스트리아 와인의 60%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며, 도나우강을 따라 서쪽의 바카우 지역부터 동쪽의 카르눈툼 지역에 이르기까지 여덟 곳의 와인 재배 지역에서 다채로운 스타일의 그뤼너 벨트리너를 만든다.
이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바카우 계곡이다. 예술의 도시 크렘스에서 멜크까지 약 36km 가량 이어지는 바카우 계곡은 유명한 관광 유람선 코스이며, 강변과 포도밭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 코스는 스포츠와 와인을 즐기려는 방문객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유폐되었던 뒤른슈타인, 바카우 투어의 중심지인 슈피츠는 이제 최고의 화이트와인 생산자인 크놀, F.X. 피흘러, 프라거, 니콜라이 호프 등의 포도원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바카우 와인은 다음의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뉘며, 바카우 와인협회에 따르면 현재 바카우의 124개의 싱글 빈야드에서 그뤼너 벨트리너와 리슬링이 재배되고 있다.
가벼운 바디의 슈타인페더
경쾌함이 살아 있는 미디움 바디의 페더슈필
진한 풍미의 힘있고 드라이한 스마라그트.
유럽 중동부에서 가장 풍미가 독특하고 흥미로운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 오스트리아. 특히 화이트와인은 ‘위대한 순도’를 지키며 자기만의 매력을 발산한다. 적당한 바디감과 우아함 사이에서 당도, 산도, 맨들맨들 하면서도 쌉싸름한 미네랄의 초자연적인 맛이 이루는 조화는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매혹적이다. 특히 요즘같이 덥고 습한 여름 날씨라면 두 말 할 필요 없다. 만약 당신이 화이트와인 애호가라면, 고급스런 달콤함과 생동감 넘치는 유쾌한 산미의 이 멋진 와인을 이제야 만난 게 후회스러울 것이다. 그만큼 보석 같은 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