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이탈리아 와인산업의 최대 이슈는, 세계대전 이래 찾아온 기록적인 더위와 그로 인한 여름 가뭄 때문에 포도 수확이 예년보다 평균 2~3주 앞당겨진 것이다. 이러한 기상이변에도 불구하고, 올해의 작황을 발표하는 와인 생산자와 와인 컨소시엄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똑같다. 수확량은 예년에 훨씬 못 미치지만 품질은 평년 수준에 달할 거라는 장밋빛 전망들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농부들이 가뭄과 폭염이라는 악재와 맞서며 포도밭에서 보냈을 시간과 그들의 필사적인 포도 구출 노력을 생각하면 이들의 확신은 설득력 있다. 이 확신의 정도가 강해서, 자연요소의 결핍쯤은 인위적 요소(숙성 방식 개선 또는 와인 생산량의 극단적 감소)로 메운다면 의외의 걸작 와인이 탄생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들 정도다.
올해 자연이 부리는 변덕의 불똥이 비켜간 곳이 있다. 롬바르디아주 북부에 있는 발칼레피오(Valcalepio) 지역으로, 올해 이 일대는 계절의 순리대로 비가 알맞게 내렸으며 햇볕도 적당히 내리쬐어 건강하게 잘 익은 포도를 적기에 수확할 수 있었다. 발칼레피오는 스위스와 자연 국경인 오로비에 알프스(Alpi delle Orobie) 산이 지척이며 기후나 생활방식이 알프스 영향권에 든다. 발칼레피오의 심장에는 베르가모(Bergamo)가 위치하며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곳을 다스릴 때 축성한 견고한 성벽이 그 내부의 조각 같은 바로크 건물을 감싸고 있다.
<발칼레피오는 롬바르디아주(이탈리아 지도의 적색 부분)의 북부에 위치하며 오로비에 알프스 산의 낮은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다. 발칼레피오의 중심도시는 베르가모다. 출처_wikipedia>
알프스의 영향은 발킬레피오 와인에도 미치는데, 국제 품종(카베르넷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으로 와인을 만들고 그 품질도 상당히 높다. 토착 품종이 5백여 종류나 되는 ‘토착 품종의 보고’인 이탈리아에서 국제 품종 와인으로 입지를 굳혀가는 발칼레피오는 ‘와인 섬’ 같은 존재다. 이탈리아라는 토착 품종의 바다에 떠있는 ‘와인 섬’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이탈리아 와인산업에는 토착 품종보다는 국제 품종을 선호하는 풍토가 있었는데 이때 카베르네 계열과 메를로 품종이 식재되었다. 이와 함께 일부 와인 생산 지역이 국제 품종 특화지구로 등장했고 이 지역 내의 와인 품질 및 생산 통제와 홍보를 위한 각종 와인 컨소시엄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단일품종으로 만든 와인도 있지만, 토착 품종과 국제 품종을 블렌딩한 와인은 외국인이 이탈리아 토착 품종의 맛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완충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 국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비교적 후발주자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선발주자 못지않은 품질 향상을 이루었고 여기에는 발칼레피오 와인 컨소시엄의 역할이 컸다. 이는 다름아닌 2004년 카베르네 계열의 품종과 메를로로 만든 와인의 품질 경연 대회인 <Emozione Dal Mondo: Cabernet e Merlot Insieme> 개최 이후인데,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를 포함한 지중해 연안 국가 또는 발칸 반도의 국가 등 후발주자의 와인과 전통적으로 이들 품종의 강국인 프랑스 와인이 경쟁을 벌인다.
본 대회에는 매년 평균 200~250여종의 와인이 출품되며 와인 전문 심사위원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 방식으로 우수한 와인을 가려낸다. 대회는 OIV(국제와인기구)의 심사규정에 따라 치루어지지만 진행상의 몇 가지 묘미를 가함으로서 다른 국제 와인 대회와 차별을 두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그란골드, 골드, 실버메달 외에 와인 미디어 부분과 블로거상 부분을 둔다. 올해는 250여종의 와인이 출품되었는데 그 중 77개 와인이 골드메달을 수상했으며, 와인 미디어 부분은 20여종의 와인에, 블로거상은 한 개의 와인에 돌아갔다. 두 번째는 메달 집계 결과가 심사 다음날 오전에 발표되며 당일 오후에는 그란골드와 골드메달을 수상한 와인의 시음회가 열린다. 일반인에게도 개방되는 이 시음회는 와인을 평가한 심사위원들과 최종 소비자인 와인애호가들이 와인을 비교 시음하면서 발칼레피오 와인의 품질 개선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매년 골드메달 수상 와인의 20~30%를 차지하는 발칼레피오 와인의 품질유지 비결은 뭘까? 발칼레피오 와인 컨소시엄의 수석 양조가이자 품평회 총감독인 세르조 칸토니(Sergio Cantoni)씨에게 물었다. 그는 “알프스의 서늘함”과 “알프스 식단에 잘 어울리는 와인”을 그 이유로 꼽았다.
<발칼레피오 와인 컨소시엄의 수석 양조가이자 와인 품평회 총감독인 세르조 칸토니(Sergio Cantoni)>
10년 전만 해도 포도재배를 상상할 수 없었던 곳이 기후변화로 인해 와인 생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요즘, 알프스산의 낮은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발칼레피오 지역은 포도재배 명당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는 바로 알프스의 서늘한 날씨와 청정한 공기 때문인데 알프스의 정기를 흡수한 포도는 화사한 라즈베리, 체리, 핑크빛 장미와 후추향을 발산한다. 색은 검붉은 톤을 내고 알코올 도수는 12~13.5도 이며, 첫 넘김 때 날카로운 듯하다가 부드럽게 와 닿는 타닌은 산미와 멋들어진 조화를 이루는데 북이탈리아 특유의 섬세한 레드 와인과 닮았다.
한국인의 식탁에 김치와 밥이 올라오듯 발칼레피오 가정의 식탁에는 폴렌타, 살라메와 치즈가 감초 노릇을 한다. 살라메와 치즈는 이탈리아인의 대중음식이지만 폴렌타는 알프스의 깊은 산장과 주변의 동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옥수수 가루에 물을 섞은 반죽을 중간 불에서 30~40분쯤 저어주다가 두 팔로 주걱을 쥐고 저어야 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면 폴렌타가 완성된 것이다. 폴렌타의 맛은 첨가하는 소스에 달렸는데 마치 파스타 요리가 소스에 따라 다양한 맛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폴렌타 소스는 레드와 화이트 색깔로 구분하며, 레드 소스는 토마토에 고기나 살시차(돼지고기를 갈아 내장에 넣은 것)를 넣고 푹 고아 만들어 구수한 맛이 난다. 화이트 소스 폴렌타는 방금 요리한 폴렌타에 치즈를 듬성듬성 잘라 얹은 것으로, 폴렌타의 열기에 녹아 한 몸이 된 치즈와 폴렌타의 담백한 협주곡이다. 발칼레피오 와인의 산미와 폭넓은 맛과 향은 폴렌타가 내는 어떤 맛과도 똑 떨어지게 어울린다.
이곳 사람들의 폴렌타 사랑은 폴렌타에 소스를 얹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베르가모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베이커리의 쇼윈도우에 작은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의 황금빛 케이크가 자리 잡고 있다. ‘폴렌타 에 오세이( Polenta e Osei)’라 불리는 전통 케이크인데, 폴렌타가 주재료이며 겉모양은 마치 폭신한 스펀지 케이크를 닮았고 안에는 달콤한 초콜릿 크림을 품고 있다.
<발칼레피오의 전통 디저트, 폴렌타 에 오세이 케이크>
폴렌타 에 오세이는 발칼레피오의 흑진주, 모스카토 디 스칸조(Moscato di Scanzo)의 농축된 달콤함과 함께 한다. 흑진주란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적포도로 만든 와인인 탓도 있지만, 이탈리아 스위트 와인 중 건조시킨 포도로 만들어 DOCG 등급에 오른 희소 와인이기 때문이다. 이 와인은 베르가모에서 멀지 않은 스칸조로샤테(Scanzorociate)와 그 일대에 가꾼 30여 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재배한 모스카토 디 스칸조 품종으로만 만든다. 375 ml사이즈 병에 담겨 매년 6만 병 정도 출시되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기가 높아 매년 완판된다고 한다.
<적포도로 만든 발칼레피오의 흑진주, 모스카토 디 스칸조 와인>
수확한 모스카토 디 스칸조 포도는 자연건조실로 옮겨져 20일간 건조되는데, 그 과정에서도 포도의 아로마를 잃지 않아 자두, 라즈베리, 유칼립투스, 체리의 아로마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병 안에 오래 놔둘수록 사루비아, 향신료, 계피, 감귤 등의 성숙한 향기로 변한다. 이렇듯 여러 향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에, 와인의 향을 제대로 맡으려면 와인을 잔에 따르고 15~20분 정도 놔두어 향의 겹이 헐거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1리터당 잔당이 70~100g나 되는 모스카토 디 스칸조 와인과 달콤한 케이크가 입안에서 만날 때 그 당도는 배가 되지만, 곧 와인의 산미가 강한 기세로 드러나 과한 당도를 중화시킨다. 그리고 초콜릿 크림의 기름진 맛은 타닌의 씁쓸한 맛이 거두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