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스코 그라브너Josko Gravner의 생애에서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려할 때가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결정은, 부친이 물려준 와인 가업을 당시의 최첨단 양조설비로 바꾼 후 와인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을 때였다. 그는 기계로 찍어내듯 제조된 와인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 여 종의 와인을 시음한 후 양조학교에서 배운 양조기술과 현대장비에 가려진 인위적 획일성을 발견한다. 그후 “첨가는 그만, 이제는 덜어내자”의 양조철학을 갖게 된 그는 양조장비를 모두 내다 팔았다.
두 번째는 1996년 우박이 그의 포도밭을 휩쓸었을 때 그 해 포도 작황의 95%를 잃은 후다. 망연자실해진 요스코는 그나마 성한 청포도를 골라 압착해서 나온 포도주스와 껍질과 씨를 극단적으로 장기간 침출하는 실험을 한다.
한편으로 요스코는 자신의 양조방식과 와인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번개같은 섬광이 그의 눈에 비친다. 그 섬광이 가리키는 곳은 조지아였고 이곳은 5천년 전에 인류최초로 와인을 만들던 곳으로 와인성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요스코가 방문한 곳은 카우카소(Caucaso)란 마을이었고, 이곳에서 가마에서 구운 토기(크베브리, 암포라) 안에서 발효와 숙성을 거친 와인을 맛보게 된다.
요스코는 조지아의 과거에서 그의 와인의 미래를 찾았으며 주저없이 오스라비아(Oslavia)에 있는 그의 양조장에서 이를 실천한다. 으깬 청포도를 조지아산 암포라에 수개월씩 놔두어 포도의 맛과 향이 속속들이 우러나는 포도유전자 덩어리, 그리고 우리 뇌에 각인되어 있는 화이트와인 기억 세포에 혼란을 일으키는 강렬하며 뜨거운 빛을 발하는 오렌지 와인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오렌지 와인의 창시자나 다름없는 요스코는, 정작 색깔의 특징만 뽑아낸 이 신조어가 자신의 와인에 걸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한다. 대신 ‘암포라 와인’이 적절하며 굳이 색깔로 구분하려면 앰버 와인이 옳다고 한다.
세 번째 계획은 2009년에 실행하려 했으나 아들 미카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연기되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와인을 비오다이나믹 농법으로 소생시킨 토양에서 가꾼 포도로 만드는 것으로 “첨가는 그만, 이제는 덜어내자”는 요스코 와인 철학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그의 와인 병에서 비오다이나믹 농법 인증 마크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를 묻자 요스코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오다이나믹으로 전환한 것은 나, 소비자, 그리고 토양을 위해서이다. 종교를 믿는 자가 그 종교의 신자임을 밝힐 필요가 없는 이치와 같다.
필자는 그가 일생 동안 내린 중대한 결정을 통해 “요스코 그라브너는 누구인가?”라는 궁금증 풀려고 했다. 하지만 요스코의 와인 사랑과 품질의 완성을 추구하는 완벽함은 몇 줄로 된 문장의 나열로는 부족하다.
그의 와인이 태어나는 포도농장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양조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양조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그를 비오다이나믹 농법 생산자로 부르려 해도 그는 비오다이나믹 인증서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고, 오렌지 와인이라는 언어의 구속에서도 자유롭다. 요스코는 그냥 자신의 본능이 지시하는 대로 묵묵히 자신의 와인을 만드는 자유로운 영혼일 뿐이다.
아래는 필자와 요스코 사이에 이루어진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포도농사를 지을 때 달과 행성의 위치를 참고한다고 들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우주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있다. 이 기운은 지구에 도달해 식물의 탄생과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나의 역할은, 15헥타르의 내 포도밭에서 자라는 포도나무와 땅에 우주의 기운을 전달하는 것이다. 매 달마다 달은 12개의 별자리를 차례로 이동하고 달이 가리키는 별자리에 따라 우주에 있는 흙, 물, 태양, 열 에너지가 지구에 도달한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제자인 마리아 툰이 달의 위치에 따른 네 가지 에너지가 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서 만든 파종 달력을 보고 포도밭 일과 와인 양조의 길일을 택한다.
예를 들면, 지난 4월 둘째 주의 ‘마리아 툰 달력’에는 상현달이 뜨고 달이 처녀자리를 지나기 때문에 흙의 기운이 왕성한 날로 표시되어 있다. 이 날은 뿌리작물 농사에는 길일이라 포도밭에 어린 묘목을 심었다. 지난 1월 말은 열의 요소가 강한 날이었고 열매식물을 가꾸는데 적기였기에 포도나무를 가지치기해서 열매를 맺을 만한 충실한 가지만 남겨놓았다.
■ 비오다이나믹 퇴비를 사용하는가?
사람이 마약에 손대면 중독자가 되듯이, 화학비료를 쓰면 땅의 의존성이 높아져 더 많은 인공비료를 투여하게 된다. 땅의 산성화를 예방하고 땅의 지력을 늘려서 우주의 네 가지 요소들이 흙에 제대로 전달되게 하려고 ‘500번’과 ‘501번’ 퇴비를 사용한다.
작년10월에 적당한 날을 골라서 500번 퇴비를 준비했다. 송아지를 출산한 적이 있는 암소의 뿔을 구입해 암소 똥을 넣고 적당한 깊이로 땅을 판 다음 소뿔 입구가 땅 바닥을 향하게 묻었다. 겨우내 소뿔에 흡수된 우주의 에너지는 소똥과 상호작용을 했고 올해 4월이 되었을 때 땅을 파보니 검은 색의 퇴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파종 달력을 참고해 상현달이 뜨는 날 이 퇴비를 포도밭에 뿌렸다.
■ 포도밭 환경이 일반 포도밭과 많이 다른데, 그 이유는?
내가 소유한 포도밭은 각각 룬크(Runk), 데드노(Dedno), 훔(Hum)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에 흩어져 있다. 10년 전만 해도 포도밭은 온통 포도나무 일색이었는데, 단일 작물만 심어서 병해충이 자주 침범했고 토양은 영양분 결핍으로 잘 부스러졌다.
포도밭이 잃어버린 균형을 물로 다스리기로 했고 가장 먼저 인공 연못을 지었다. 연못은 이손조(Isonzo) 강물로 채웠고 연꽃 씨를 뿌리고 물고기를 방생했다. 포도밭 주위에는 사과, 올리브, 사이프러스를 심었고 나무가지에 새집도 달았다. 6년 이 흐르고 난 뒤 연못 주위로 수많은 생물이 모여들었고 차츰 먹이사슬의 질서가 생기는 등 소우주를 방불케 하였다.
<데드노(Dedno) 포도밭에 조성된 연못>
■ 2012년 빈티지가 국제 품종으로 만든 마지막 화이트 와인, Bianco Breg이다. 그리고 소량의 레드 품종을 제외하고 포도밭의 대부분은 리볼라 잘라(Ribolla Gialla)가 식재되어 있다고 들었다. 리볼라 잘라를 특별히 선호하는 이유는?
오스라비아에서는 천년 전부터 리볼라 잘라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 왔다. 이보다 더 품질을 장담할 만한 확증이 있을까. 그리고 이 품종은 껍질이 두꺼워 극단적인 침용에 적합하다. 리볼라가 다 자라면 길게 늘어지고 포도알 사이의 틈으로 공기가 순환해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 황금색 껍질 표면에 검은 반점이 선명하게 비치면 포도가 완숙에 달한 것으로 10월 말이면 그 징후가 나타난다.
포도알 색깔의 변화와 함께 포도씨와 꽃자루의 성장도 중요한데, 잘 익은 것을 침용할 때 넣으면 맛 좋은 타닌이 우러나고 부유물을 잘 뜨게 한다. 추수 전날까지 매일 알맹이를 손으로 으깨어 포도씨의 겉상태를 살피고 씹어서 확인하며 씨와 꽃자루의 완숙도를 점검한다.
■ 리볼라 잘라가 자라는 모습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Bianco Breg과 Ribolla 와인병의 라벨에 그려진 포도나무를 보면 모양이 머리에 쉽게 그려진다. ‘알베렐로 인 필라(Alberello in Fila)’라는 재배방식인데, 남이탈리아에서 포도를 과일나무처럼 가꾸는 알베렐로 방식과 철사 줄을 타고 가지가 뻗어가는 귀요 방식을 절충한 개량 알베렐로라 할 수 있다.
포도나무 밑둥에서 뻗어 나온 세 개의 굵은 가지마다 두 개의 어린 가지가 달리는데, 하나는 일년 전에 나온 것으로 바로 이곳에 포도가 열리며, 다른 하나는 올해 나온 것으로 내년에 포도가 열릴 것이다. 한 그루당 4~5개의 포도송이를 선별한 후 아랫부분은 잘라내고 윗부분만 양조장에 보낸다.
■ 앰버 와인을 만드는 동료생산자들은 침용을 오크통에서 하는데, 암포라를 선택한 이유는?
모든 와인은 즙과 껍질을 오랜 기간 접촉시켜 우려낸 모스토로 양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포도알맹이를 껍질이 둘러싸고 있을 이유가 없다. 껍질을 버리고 즙만 발효하는것은 엄마가 자식을 버리는 것과 같다.
조지아에서 가져온 48개의 암포라 중 15개만 침용에 사용하고 있는데 안포라이아(Anforaia)실의 땅 속 250cm깊이에 묻혀 있다. 암포라를 묻은 흙은 가까운 계곡에서 가져온 점토로 항온이 뛰어나기 때문에 암포라 내부의 온도를 조절할 필요가 없다. 또한 암포라 표면의 미세 기공은 땅 속의 산소와 기운이 전달되는 통로다. 땅에서 자란 포도가 땅과 작별하기 전에 형태를 탈바꿈하는 기적의 순간이다.
<암포라가 묻혀있는 안보라이아(Anforaia)실과 그라브너>
■ 숫자 중 7을 가장 선호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특별한 이유는?
루돌프 슈타이너에 따르면 인간의 세포는 태어난 후 7년간 활동하다 소멸되며 이후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7은 재생인 동시에 완성을 의미한다. 나의 모든 와인은 안포라이아 실의 지하세계에서 길게는 1 년 정도 머물다가 오크통에 옮겨져 지상세계와 접촉하면서 6년간 숙성된다. 그라브너 와인셀러에서 7년을 머물지 않은 와인이 태양을 본 적이 없다.
■ 다른 생산자의 오렌지 와인을 맛본 적 있는가? 오렌지 와인에 적당한 품종과 테루아가 있나?
오렌지 맛과 향이 나는 오렌지 와인이 있다(웃음). 남이탈리아의 한 친구는 지역 토착품종으로 멋진 앰버 와인을 만든다. 품종과 토양이 앰버 와인의 선행조건은 아니다.
▲ Bianco Breg IGT 2009
품종: 소비뇽 블랑, 피노 그리조, 샤르도네, 리슬링 이탈리코의 블랜딩
암포라에서 자연효모로 발효했다. 침용 초기에는 나무 막대기로 하루에 7번씩, 후반에는 하루에 2번씩 껍질과 모스토를 섞는다. 4개월쯤 뒤 껍질이 저절로 암포라 바닥에 가라앉을 때 젓는 것을 멈춘다. 실온에서 와인을 옮겨 담아 부유물을 걸러낸 후 암포라에 다시 넣고 5개월 더 놔둔다. 그리고 슬로베니아산 오크통에 옮겨 6년 숙성한 후 병입한다.
잘 익은 홍시의 색을 띠며 차분한 알코올의 열 기운이 흘러 나온다. 처음에는 녹차, 견과류, 허브, 사프란 향이 올라오다가 밀랍, 매니큐어 향으로 이어진다. 잘 숙성된 레드 와인으로 혼동할 만큼 타닌이 부드럽고, 신선한 산미가 균형을 이룬다. 화이트 와인의 감성과 레드 와인의 입체적 골격감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 Ribolla IGT 2009
품종: 리볼라 잘라
Bianco Breg처럼 암포라의 지하세계에서 1년, 오크통의 지상세계에서 6년 숙성했다. 요스코는 이 와인의 시음적정 온도를 중간보디감의 레드와인의 온도와 같은16~18라 했다. Bianco Breg 과 비슷하지만 좀더 달콤한 복숭아,사프란,진저 티, 계피 계열의 복합적 향기가 올라온다. 드라이한 맛이 앞의 와인보다 두드러지며 입안 전체에서 느껴지는 매끄러운 타닌과 과일 액기스를 마신뒤의 긴여운이 혀에 남는다.
아들을 잃은 슬픔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비오다이나믹 와인생산자로 전환 중인 요스코에게 성원을 보내며, 내추럴 와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담은 짧은 영상으로 이 글을 마친다.
요스코 그라브너 인터뷰 from WineOK.com on Vim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