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싹을 틔운 앙상한 포도나무 가지 주위로 아른거리는 아지랑이가 춘곤증을 재촉하는 4월초의 랑게언덕. 빼어난 자연풍광과 우수한 와인으로 이탈리아 와인산지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랑게언덕은 홀수 해마다 열리는 “그란디 랑게 DOCG(Grandi Langhe DOCG)” 행사를 시작으로 올해 랑게와인 축제의 포문을 열었다.
그란디 랑게 DOCG는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알바 랑게 돌리아니 와인 콘소시움’이 주최하며 '로에로 와인 콘소시움'과 '알베이사(Albeisa) 협회'가 공동 참여, 후원하는 랑게지역 최대의 와인행사다. 올해는 4월 2일부터 4일까지 열렸으며 해외의 와인 수입사와 HORECA 업계(호텔, 레스토랑, 캐이터링) 종사자들이 다녀갔다. 이들은 랑게의 DOCG급 와인이 생산되는 주요 마을에 마련된 시음장에 들러 500여 종의 와인을 시음하고 생산자와 의견을 나누는 등 그동안 와인의 맛과 향으로만 상상했던 랑게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본 행사의 절정은 “네비올로 프리마(NEBBIOLO PRIMA)”로, 2017년 봄에 와인 저장고에서 오크 및 병숙성과 안정화를 마친 네비올로 와인을 시장에 출시하기 전에 블라인드로 시음하는 행사다. 시음자는 와인 미디어의 칼럼니스트와 기자들이며, 이들은 어린 네비올로의 풋풋한 타닌과 산미에 가려진 다양한 풍미의 암호를 글로 풀어낼 예정이다.
올해 NEBBIOLO PRIMA에는 바롤로 2013, 바롤로 리제르바 2011, 바르바레스코 2014, 바르바레스코 리제르바 2012, 로에로 2013, 로에로 리제르바 2011 빈티지를 아우르는 310여 종의 와인이 등장했다.
<Barbaresco 2014 빈티지>
바르바레스코는 랑게의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바롤로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바롤로 와인이 생산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고 동일한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기 때문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바르바레스코 와인을 바롤로 와인의 등속으로 오인했다. 바롤로에서 바르바레스코 와인이 분리된 것은 1894년 알바 양조학교 교장으로 부임 중이던 도미찌오 카밧짜(Domizio Cavazza)가 그 시기에 바르바레스코 성과 그 주변의 포도밭을 구입한 것과 관련이 있다.
카밧짜는 이곳에서 네비올로 품종을 개량하여 우수한 와인을 얻었고, 와인이 처음 태어난 장소의 지명을 와인 이름으로 짓는 풍습에 따라 새 와인을 바르바레스코라고 불렀다. 후에 카밧짜와 그와 뜻을 같이한 여덟 명의 동지는 바르바레스코 와인 협동조합을 창립했고 현재 우리가 마시는 바르바레스코에 근접한 와인이 생산되기 시작헸다.
바르바레스코 와인은 네이베(Neive),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트레이소(Treiso), 산로코 세노델비오(San Rocco Seno d’Elvio)의 네 군데 마을에 조성된 751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재배한 네비올로로만 만든다. 이곳의 포도밭은 모두 66개이며 이를 '메가(MEGA)'라 한다. 메가는 MEnzioni Geografiche Aggiuntivo(지명 덧붙임)의 줄임말로 '크뤼'나 '싱글빈야드'를 의미하는 랑게식 신조어다.
바르바레스코 와인 라벨에 표시된 메가는 내용물의 품질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네비올로가 자란 곳의 위치정보만 알려준다. 보통 메가의 명칭은 농가(Cascine), 포도밭(Vigneti) 이름, 특정 지명(Localita’)에서 빌려왔다. 일례로 아실리(Asili), 바사린(Basarin), 마르티넨가(Martinenga), 산토 스테파노(Santo Stefano), 라바야(Rabaja)는 친숙한 메가들이다.
바르바레스코는 미솃(michet)과 람피아(lampia)라는 두 가지 네비올로 클론으로 양조하며 오크 및 병숙성 기간이 26개월, 리제르바의 경우는 숙성기간이 50개월로 늘어난다. 참고로 2014년 빈티지는 총 326군데의 와인관련업체가 4백 3십 만병을 생산했으며 이중 70%는 해외에 수출된다.
바르바레스코 지역은 석회석에 모래 함량이 좀 더 많은 산타가타(Sant’Agata) 이회토이며 타나로(Tanaro) 강에서 불어오는 습기찬 미풍이 언덕 기슭에 도달하면 능선을 따라 상승하기 때문에 바르바레스코 구릉 일대의 땅은 습하다. 이러한 환경은, 건조기인 7-9월 즈음 네비올로 포도나무의 뿌리가 물을 찾으려고 쓸데없이 영양분을 허비하지 않게 하고 포도알이 충실하게 영글게 하여 포도당과 폴리페놀을 농축시키는데 기여한다.
3일 동안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와인을 시음하면서 필자는 두 와인의 관능적 차이를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아쉽게도 두 와인을 시음하면서 이렇다 할 뚜렷한 차이점은 찾지 못했다. 바롤로 와인이 바르바레스코보다 일년이 더 긴 38개월 숙성했다는 물리적 차이, 바롤로의 토양 성분이 바르바레스코에 비해 점토가 많은 레퀴오 이회토(Lequioo 이회토: 모래:30%, 점토:55%, 석회석:15%)라는 점 등이 두 와인의 맛과 향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으나 관능 측면을 결정짓는 요소라 단언하기엔 무리가 없지 않다.
이는 바롤로나 바르바레스코 지역 내에 여러 토양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바롤로 와인 지역의 11군데 마을 중 라 모라,바롤로는 산타가타 토양이며 바르바레스코 와인 지역에서는 네이베 남부와 트레이소는 레퀴오 이회토 토양이다. 두 와인을 따로 구분한 뒤 비교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와인을 마을별, 메가별로 시음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2014년의 작황:을 살펴보면, 최근 몇 년 간의 작황과 비교했을 때 포도생장 그래프가 불규칙했고 포도 재배자도 어려움을 겪었던 해이다. 겨울이 포근해서 2013년에 비해 개화기가 일찍 왔으나 6~8월은 비가 많이 오고 기후도 비교적 낮아 포도밭 관리자들은 평년에 비해 포도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날씨 변덕으로 인한 곰팡이와 해충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그린하베스트와 적절한 시기에 인위적 개입(화학약품 사용)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9, 10월은 건조하고 일조량이 충분해서 네비올로의 생장 리듬이 정상궤도로 돌아와 폴리페놀 성숙도가 바람직한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배수력이 좋고 양지에 면한 메가밭은 자연의 심술에도 불구하고 평년처럼 건강하고 산미와 품질이 높은 폴리페놀이 조화롭게 농축된 네비올로를 수확할 수 있었다.
2014년 바르바레스코 와인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음소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2014년 빈티지는 장기숙성보다는 5년 이내에 마시는 것이 바람직하고 이 빈티지를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완성도 높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르바레스코 와인을 선택할 때 네비올로의 특징적 향기의 또렷함, 구조, 복합미보다는 섬세함과 우아함을 우선순위로 꼽는 애호가라면 2014 빈티지는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빈티지이다.
다음은 필자가 만난 몇 가지 인상 깊었던 와인에 대한 시음 후기이다.
Cascina Luisin, Barbaresco 2014 Rabajà :체리, 핑크빛 장미, 감초향 등 어린 네비올로의 향기가 화사하다. 잠시 후에는 처음의 향기가 짙어졌으며 커피향, 바닐라향과 함께 올라 온다. 어린 타닌이지만 부드럽고 생동감이 있다.
Adriano Marco E Vittorio, Barbaresco 2014 Basarin: 작고 붉은 베리, 달콤한 허브향, 후추향이 잔잔하게 올라온다. 타닌의 골격감과 아몬드의 쌉싸름한 맛이 혀에 오래 남는다.
Giacosa Fratelli, Barbaresco 2014 Basarin, 위의 바르바레스코와 비슷한 향기가 좀더 또렷하고 강렬하다. 타닌이 혀에 닿는 순간 날카롭지만 입안 전체에서 부드럽고 조화롭다.
Pietro Rinaldi, Barbaresco 2014 San Cristoforo 잔에 따르는 순간 제비꽃, 흑장미, 붉은 자두, 버섯, 젖은 풀, 달콤한 향신료향이 주위에 퍼진다. 바르바레스코의 긴장감 있는 타닌, 상큼한 산미가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