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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부르고뉴에서 세대 교체가 활발해질 무렵, 젊은 나이의 안 그로Anne Gros는 르루아Lalou Bize Leroy를 잇는 차세대 여성 와인 메이커로 주목 받았다. 안 그로의 와인은, 부르고뉴 와인에 일가견이 있는 클라이브 코츠Clive Coates MW로부터 “부르고뉴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와인 중 하나”라는 극찬과 함께 별 세 개의 만점을 받아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최근 수입사 비노쿠스의 초청으로 안 그로가 한국을 방문했다. 기자는 그와 함께한 자리에서, 안 그로 와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 계속된 강행군에도 진지하게 경청하고 최선을 다해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 3헥타르의 위대한 유산 – 도멘 안 그로

 

안 그로는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에서 유서 깊은 그로 가문의 첫 번째 여성 메이커로, 1988년부터 아버지 프랑수와 그로Francois Gros의 뒤를 이어 도멘을 맡게 되었다. 당시 20대에 불과했지만 그는 양조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감각도 뛰어났다. 1990년부터 모든 와인을 직접 병입해서 판매하기 시작했고 1995년에는 도멘의 이름을 '도멘 안 그로’로 변경했다. 도멘 안 그로 와인은 오늘날 “가장 세련되고 강렬하며 순수하고 깊다“는 평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구하기 힘든 와인 중 하나가 되었다.

 

3헥타르에서 시작한 도멘 안 그로는 오늘날 9개 AOC(원산지)에 걸쳐 6.5헥타르(레드 5.2헥타르, 화이트 1.3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안 그로는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도입하여, 포도가 자라는 환경뿐만 아니라 토양의 다양한 생물과 인간까지 보존한다.

 

양조 방식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이트 와인은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레드 와인은 시멘트 탱크에서 발효를 마친 후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친다. 이 때 새 오크통 사용 비율은 와인의 종류, 빈티지, 등급에 따라 다르다(그랑 크뤼급 와인일 경우 80%, 마을 단위 50%, 지방 단위 30%).

 

오크 풍미가 도드라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안 그로는 “새 오크통 사용 비율은 와인의 풍미에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숙성 기간 자체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포도송이의 줄기를 제거한 후 양조하는 것도 특징인데, 피노 누아의 경우 품종 자체의 순수한 과일 풍미와 섬세하고 정교한 특성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멘 안 그로의 연간 생산량은 총 3만병으로, 해마다 늘어나는 수요에 비해 턱없이 적은 양이다. 세 개의 그랑 크뤼((Richebourg, Echezeaux, Clos de Vougeot)와 지방 단위 와인, 마을 단위 와인을 생산한다.
 


■ 더할 나위 없는 부르고뉴 2015 빈티지

 

“보통 비가 오는 5, 6월에 비가 오지 않았고 포도가 익는 7, 8월엔 햇빛이 풍부했다. 이처럼 건조한 날씨 덕분에 포도가 단단하게 영글었다. 그리고 산도가 좋아서 지금 마시기도 좋고 숙성 잠재력 또한 크다.”

 

안 그로는 2005 빈티지에 비견될 만큼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 2015 빈티지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한다. 실제로, 이번 방한을 위해 그가 직접 들고 온 2015 빈티지 와인은 장거리 이동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탁월했으며 본연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래는 해당 와인에 대한 기자의 테이스팅 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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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고뉴 블랑 오 꼬뜨 드 뉘 2015 
   Bourgogne Blanc Hauts-Cotes du Nuits 2015

 

균형이 잘 잡힌 산도 덕분에 식전주로 마시기 좋다. 양조 과정에서, 500리터 용량의 중고 오크통에 담긴 와인은 효모 앙금과 접촉한 채 12개월간 숙성된다. 레몬 계열의 감귤류 향, 바나나, 패션후르츠의 향과 미네랄, 살짝 짭조름한 맛도 난다. 매끄러운 감촉, 은은하게 이어지는 여운이 인상적이다.

 


□ 부르고뉴 루즈 오 꼬뜨 드 뉘 2015 
   Bourgogne Rouge Hauts-Cotes du Nuits 2015

 

자갈이 많이 섞여있는 석회질 토양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다. 오 꼬뜨 드 뉘는 2000년에 지정된 AOC로, 이곳에서는 마시기 편한 스타일의 와인이 주로 생산된다. 새 오크통 사용 비율은 20-25%이며 와인에서 장미꽃, 빨간 체리, 흙 내음이 난다. 산미가 좋고 균형이 잘 잡혀 지금 마시기에 적당하다.

 

 

□ 사비니 레 본 1등급 레 라비에르 2015 
   Savigny les Beaune 1er Cru Les Lavieres 2015

 

안 그로의 친구가 소유한 포도밭에서 함께 재배한 포도를 가지고 만든 와인이다. 직접 소유한 포도밭에서 가꾼 포도가 아닐 경우, 와인의 레이블을 진한 남색으로 표시하여 구분한다. 포도를 외부에서 구입하는 경우에는 주기적으로 포도밭을 방문해 품질을 관리한다. 이 와인에서는 산딸기, 빨간 체리, 꽃 향기가 나고 산뜻한 산미, 실크같이 부드러운 타닌, 흐트러지지 않는 구조감이 느껴진다. 안 그로는 “지금도 좋지만 3-4년 후엔 더 여성스럽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줄 와인”이라고 설명한다.

 

 

□ 샹볼 뮤지니 라 꽁브 도르보 2015
   Chambolle Musigny La Combe d’Orveau 2015

 

라 꽁브 도르보는 0.6헥타르의 작은 포도밭으로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23년이다. 연간 생산량은 2,000병에 불과하다. 포도밭 근처에 개울이 있고 토양엔 자갈과 이회암이 많이 섞여 있다. 덕분에 비가 많이 와도 배수가 잘 되고 극단적인 날씨의 영향을 덜 받는다. 산도는 비교적 낮은 편이며 타닌은 단단하지만 부드럽다. 잘 익은 산딸기를 연상시키는 붉은 과일의 향미가 도드라지고 시나몬 향이 은은하게 여운으로 남는다. 빈티지로부터 7-8년 후가 최고의 시음 적기. (Wine Advocate 89-91점)

 

 

□ 에세죠 2015 
   Echezeaux 2015

 

에세죠는 부르고뉴에서 가장 넓은 그랑 크뤼 밭이다. 그 중 안 그로는 0.76헥타르를 소유하고 있으며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28년이다. 이 구획은 다른 곳보다 포도가 일찍 익는 편이다. 와인에서는 제비꽃, 빨간 체리, 약간의 토스트, 흰 후추 향이 난다. 단단한 구조와 놀랄 정도로 매끄러운 타닌, 깊고 긴 여운에서 그랑 크뤼의 남다른 격이 느껴진다. (Wine Advocate 91-93점)
 


■ 안 그로의 두 번째 선택, 도멘 그로 똘로Domaine Gros Tollot

 

2008년 안 그로와 남편 장 폴 똘로Jean Paul Tollot(부르고뉴의 도멘 똘로-보Domaine Tollot-Beaut의 와인메이커)는 랑그독-루시옹 지방의 AOC 중 하나, 미네르부아의 카젤Cazelles에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의 선택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결정으로 보일 만큼 대담했다. 왜 미네르부아를 선택했냐는 기자 질문에 안 그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부르고뉴와는 다른 레드 와인을 만들어 보고 싶어 여러 곳을 찾아 다녔다. 그 와중에 미네르부아의 토양에서 강한 매력을 느꼈다. 이곳은 토양의 성질이 매우 다양해서 좋은 와인을 생산하기에 이상적이다. 또한 부르고뉴의 석회질 토양도 이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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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젤은 본 로마네처럼 해발 고도 220미터에 위치해 있으며 햇빛이 풍부하고 바람의 영향을 많이받는다. 부르고뉴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품종을 가지고 와인을 만드는 것에 애로점은 없었을까.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미네르부아는 기후가 안정적이라 빈티지 간의 차이가 크지 않다. 대신 거친 바람과 부족한 물 때문에 어려움이 있긴 하다. 인생에서 어려움이 없을 수 있나. 20년 간 까다롭고 복잡한 품종, 피노 누아를 다루어 왔기 때문인지 여기서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안 그로가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각각의 테루아에 적합한 품종을 찾아내기 위해 꾸준히 연구, 분석을 실시한 것이다. 그는 토양에 따라 시라, 까리냥, 쌩소, 그르나슈 등의 품종을 시험 재배하고 포도송이 표본을 채취해 분석하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네 개였던 와인의 종류가 지금은 여덟 개로 늘었다.

 

포도밭 면적 또한 8헥타르에서 14헥타르로 늘어났다. 도멘 그로 똘로에서는 부르고뉴와 같은 철학, 같은 방식으로 와인을 만든다. 아로마는 풍성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은 스타일, 안 그로가 미네르부아에서도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수확한 포도는 품종과 포도밭에 따라 별도로 발효, 숙성을 거친다. 와인은 블렌딩을 거쳐 12월에 병입되고 3-4개월 가량 안정화를 거친 후 출시된다. 와인 레이블의 오렌지 색은 땅과 태양이 만나는 시간, 미네르부아의 노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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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50/50 2012 
La 50/50 2012

(품종_ 그르나슈, 시라, 까리냥)

 

안 그로와 장 폴 똘로 두 사람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인 와인이라는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 기본급 테이블 와인으로 스테인레스 탱크에서 숙성을 거친다. 라즈베리, 검정 과일과 후추의 향이 잘 어우러진다. 유명한 와인평론가 Jancis Robinson은 이 와인을 두고 “어린 부르고뉴 피노 누아가 생각난다”고 하는데, 부드러운 타닌과 신선한 산도 덕분인 듯 하다. 와인 이름 때문에 결혼기념일 와인으로 인기 있다고. (Wine Advocate 9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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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드 라 비 2012
L’O de la Vie 2012
(품종_ 시라) 

 

안 그로가 시라 품종만 사용해서 만든 최초의 와인으로 2011년이 첫 빈티지이다. 아직 포도나무의 수령이 어리지만 잠재력이 크기 때문에, 포도 나무의 수령이 늘어나면서 와인은 점점 더 섬세하고 우아해 질 것이다. 이 와인은 시라 특유의 자주색을 띠며 블랙 커런트, 자두, 블루 베리, 후추, 정향의 향이 풍부하다. 산뜻한 산미, 부드러운 타닌과 함께 여운에서 미네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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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쌩소 2014
La CinsO 2014

(품종_ 쌩소)

 

안 그로의 설명에 따르면, 쌩소는 그 섬세함 덕분에 “랑그독-루시옹의 피노 누아” 대접을 받는다. 수령이 50년 된 포도나무에서 자란 쌩소는 와인에 섬세하고 둥근 느낌을 부여한다. 와인은 체리, 붉은 과일의 향이 풍부하고 여운에서 향신료와 남부 지방 고유의 허브 향도 난다. 신선한 산미가 끝까지 뒷받침해주는 와인으로 부담 없이 마시기 좋다. 신대륙 피노 누아와 비교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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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8 그르나슈 2014
La 8 Grenache 2014

(품종_ 그르나슈)

 

안 그로는 “그르나슈는 다루기 까다로운 품종”이라며 “과일 풍미, 산미, 당도, 알코올의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 만든 와인들은 모두 만족스러웠다”고 말한다. 이 와인은 잘 익은 검은 과일, 라즈베리, 감초 향에 향긋한 꽃 내음이 어우러져 난다. 깊고 풍부하여 앞으로 10년 정도 숙성시켜도 무난할 듯 하다. (Wine Advocate 9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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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퐁 따니으 2013 
Les Fontanilles 2013

(품종_ 시라, 그르나슈, 까리냥, 쌩소)

 

2013년에는 포도가 비교적 늦게 익었고 와인의 산도는 높은 편이다. 포도밭은 동남쪽을 향하며 토양은 석회질, 이회암, 점토가 적절하게 잘 섞여있다. 시라와 그르나슈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20-30년이고 까리냥과 쌩소는 50년 이상이다. 와인에서는 검붉은 과일, 후추, 향신료 향이 나며 농밀한 과일 맛이 일품이다. 산미는 신선하고 타닌은 부드러우며 오크 향이 은은하게 여운으로 이어진다. 좋은 산도 덕분에 숙성 잠재력이 큰 와인. (Wine Advocate 9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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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시오드 2011
La Ciade 2011

(품종_ 까리냥, 시라, 그르나슈)

 

안 그로는 석회질과 점토질 토양으로 이루어진 라 시오드 포도밭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투자 또한 아끼지 않는다. 석회질이 표면을 두껍게 덮고 있고 차갑고 부드러운 점토질이 하층을 구성하고 있어, 와인이 빈티지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평균을 뛰어넘는 품질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세 가지 품종 중 까리냥의 수령은 100년이 넘는다. 라 시오드 와인은 잘 익은 과실의 농축미가 훌륭하고 꽃, 향신료의 향도 조화롭다. 입 안에서 묵직하고 향미의 깊이가 상당하지만 산도가 잘 잡혀 있어 너무 무겁지 않다. 타닌 또한 실크 같이 매끄럽다. (Wine Advocate 9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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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까레탈 2013
Les Carretals 2013

(품종_ 그르나슈, 까리냥)

 

수령이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그르나슈와 까리냥으로 만든, 최고 와인 중 하나다. 레까레탈은 석회질 토양으로 이뤄진 경사면에 위치한 1.07헥타르에 불과한 밭이다. 이곳의 와인은 깊이 있고 우아한 느낌이 오래 지속된다. 자두, 블랙베리, 허브, 향신료의 향이 조화롭고 미네랄의 뉘앙스도 느껴진다. 부드러운 타닌과 적당한 산미가 이루는 균형, 풀 바디에 가까운 무게감이 인상적이다. (Wine Advocate 95점)
 


도전을 즐기는 안 그로의 향후 계획 중 하나는 미네르부아의 테루아를 담은 피노 누아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로 머지않아 선보이게 될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그는 부르고뉴와 미네르부아에서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독창적인 와인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도전 뒤엔 항상 가족이 함께 했다. 현재 두 딸 중 한 명인 줄리는 도멘 안 그로에서, 아들 폴은 아버지와 함께 미네르부아와 도멘 똘로-보에서 일하고 있다.

 

“아이들이 우리 철학을 따라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앞으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믿는데 이왕이면 우리보다 잘 했으면 한다.”

안 그로를 만나고 그의 와인을 시음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에게 더 이상 '차세대 르루아’라는 별명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20대에 도멘을 맡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부르고뉴라는 높고도 안온한 담장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한 것은 자유로운 생각, 순수한 열정, 가족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그는 새로운 곳의 질서와 테루아를 존중하면서 본인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미네르부아는 첫 걸음일 뿐 안 그로의 또 다른 모험이 어딘가에서 이어지질 기대해본다. 

 

 

수입_ 비노쿠스 (02. 454.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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