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아침, 한 와인 전문가로부터 이런 문구가 담긴 이메일을 받았다.
“Remember, the only way to become a super duper tasting expert in any given one countrys wines is to, well, taste taste taste taste and taste some more!!!!!”
이날 오후 내내 ‘전문가’ (expert)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전문가는 누구지?’ 하는 물음이 생겼다. 답은 쉽게 주어졌다. 그리고 어느 한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를 만나 가슴 뛰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국내외에 훌륭한 와인 전문가들이 많이 있지만, 필자의 경우 지난 10여 년간 와인 업계에 몸담으면서 딱 두 사람을 통해 그런 가슴 뛰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들을 마음 속의 아이돌이자 진정한 전문가로 존경해오고 있다.
그 중 한 명은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 전문가인 자스퍼 모리스 MW(Jasper Morris)이다. 마스터오브와인(Master of Wine, 이하 MW. MW는 와인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타이틀이며 전세계에 300여 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이기도 한 그는 영국의 와인 거상 베리 브로스 앤드 러드 (Berry Bros & Rudd, 이하 BBR)의 부르고뉴 와인 바이어인 동시에 다양한 부르고뉴 와인 관련 행사에 강연자로써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8년 봄 필자가 홍콩 BBR에서 파인와인스쿨 담당자로 일할 당시, 1주일에 걸쳐 진행되는 부르고뉴 와인 행사를 준비하고 자스퍼의 모든 마스터클라스, 런치, 디너 행사에 참여하면서 그야말로 무섭도록 디테일한 그의 지식에 전율을 느꼈던 그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령 특정 빈티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몇 십 년 전이건 불과 1년 전이건, 몇 월 몇 일 단위로 기후와 자세한 정황들을 특정 생산자들의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하는 식이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어떤 질문이 주어지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지식과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설명은 모두를 압도시켰다. ‘전문가란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감탄하며 그를 존경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필자는 부르고뉴에서 생활하는 동안 조언을 구하느라 그와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았고 간간이 행사장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당시 그가 'Inside Burgundy’라는 책을 마무리 하느라 많이 바빴기에 개인적인 만남은 몇 차례 미루어지다 결국엔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부르고뉴에서 런던으로 옮긴 후에도, 자스퍼가 진행하는 부르고뉴 와인 세미나에 몇 번 참여하며 그의 존재감을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해에는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BBR의 셀러에서, MW 시험을 준비 중인 20여 명의 학생들을 위해 부르고뉴 빈티지 및 테이스팅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3시간이 넘게 진행된 강의 내내 특유의 차분함과 섬세함을 잃지 않았던 자스퍼, 역시 부르고뉴의 대가다웠다. 그 날의 강의 노트 중 2012년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에 대한 자스퍼의 코멘트를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2012년 마콩과 샤블리 지역의 수확량은 적은 편이다. 대부분의 샤블리 화이트 와인에서 (평소와 달리) 과일 풍미가 두드러지지만, 일찍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들은 지역 특유의 미네랄 풍미를 여운에서 드러낸다. 코트 드 본 와인의 경우 품질이 균일하지 못한데, 곰팡이에 의해 영향을 받은 와인들 또는 산도가 부족한 와인들이 일부 있다. 그래도 많은 수의 와인들이 순수하고 대단히 농축된 풍미를 보여준다.
The crop is small in the Mâconnais and Chablis. Most Chablis wines are unusually fruity but those which were picked early finish with the classical austere marine mineral notes of the region. The Côte de Beaune is less consistent: we have rejected some compromised by oidium, rot or lack of acidity. However many others are pure and exceptionally concentrated”
필자가 존경하는 또 한 명의 와인 전문가는 바로, “와인 전문가가 되려거든 시음하고, 시음하고, 시음하고 또 시음하세요”라는 이메일을 보내 필자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든 이안 다가타 박사 (Dr. Ian d’Agata, 위 사진)이다. 세계 최고의 이탈리아 와인 전문가로 인정받는 그는 빈이태리 인터내셔널 와인아카데미(Vinitaly International Wine Academy, 이하 VIA)의 Scientific Director이자, 영국의 디캔터(Decanter)와 미국의 바이너스 미디어 (Vinous Media) 같은 유수 와인 매체의 필진이며, 강연자로 활약하면서 이탈리아 와인 지식 보급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이다. 참고로 그에게 붙는 Dr. 는 의학박사를 뜻하는 칭호로 그의 또 다른 경력을 말해준다.
그는 빈이태리 총괄을 맡은 스티비 김 (Stevie Kim)과 함께, 필자가 이탈리아 와인을 향한 더욱 깊은 열정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격려하고 이끌어주고 있다. 이미 몇 년 전 디캔터가 주최한 바롤로 마스터클라스를 통해 이안의 지식과 전문성에 감탄했던 필자는, 함께 참석했던 친구에게 부르고뉴의 자스퍼가 생각난다며 한껏 흥분하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일년 후 빈이태리의 스티비 김을 통해 이안을 직접 소개받았고, 지난 해 10월에 열린 대전 국제 푸드 & 와인 페스티벌, 아시아 와인 바이어 컨퍼런스 기간에 열렸던 VIA Executive Wine Seminar 의 진행을 맡으면서 그와 직접 교류할 기회가 생겼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녹화한 비디오 강의를 토대로 통역과 개인적 의견을 더해 테이스팅과 세미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이 세미나의 형식이었다. 그리고 이 때 일어난 일은 이안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세미나에 앞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라며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고 어려웠기에 되도록이면 스스로 세미나 준비를 해나가려 애썼다. 그러나 어찌하랴. 책과 인터넷만으로는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이 중 다섯 가지를 추려 이메일을 보냈다. 밤 9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다. 놀랍게도 정확히 20 분 후에 답장이 도착했다. 며칠 뒤에나 답장을 받겠거니 예상했는데, 메일을 여는 순간 대문자로 빼곡히 써 내려간 답변이 눈앞에 펼쳐지자 입이 딱 벌어지며 멍해졌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MW를 포함한 소위 “유명한” 전문가들로부터 빠른 답장을 기대하기란 힘든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상세하고 전문적인 답변을 20분 만에 받게 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설명은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 속에 들어 있던 지식을 술술 풀어낸, 그야말로 진정한 전문가의 성의 있는 답변이었다. 며칠간 가시지 않았던 이 짜릿하고 강렬한 경험은 지금도 생생하다.
필자가 경험한 느낌이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는 힘들겠지만, 메일함에 든 이안의 답변 중 비교적 간단한 내용을 옮겨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토스카나 해안가 지방에서 나오는 베르멘티노 와인의 주요 특성을 리구리아 지방의 베르멘티노 와인과 비교해서 설명해 달라고 하셨죠? 토스카나 해안가 지방의 베르멘티노 와인은 중간쯤에 있는 와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르디나에서 나온 와인보다는 무게감이 있지만 리구리아에서 나온 와인보다는 덜하죠. 그리고 가장 향기롭고 자극적이에요. 제가 볼 때 사르디나와 토스카나 해안가에서 나온 베르멘티노 와인은 짠맛이 좀더 느껴져요. 토스카나 해안에서 나온 베르멘테노 와인은 가장 약하고, 종종 비오니에를 블렌딩하기 때문에 완벽히 순수한 와인은 아니에요. 이곳에서는 15%까지 다른 품종을 섞을 수 있는데, 특히 비오니에가 많이 섞일수록 와인의 풍미가 많이 달라져요.
THE TUSCAN COAST VERMENTINO IS SORT OF AN INBETWEEN WINE. BIGGER THAN SARDINIA'S BUT LESS SO THAN LIGURIA'S, WHICH IS ALWAYS THE MOST AROMATIC AND SAVORY. I WOULD SAY THE SARDINIAN AND TUSCAN COAST ONES ARE MORE SALINE, BUT REALLY, THE TUSCAN COAST VERMENTINO IS THE WEAKEST OF THE THREE AND QUITE OFTEN PRODUCERS THERE CUT IT WITH VIOGNIER, SO IT'S NOT ALWAYS A PURE WINE. IT'S LEGAL TO ADD 15% OF SOMETHING ELSE TO IT (ESPECIALLY AS STRONG AS VIOGNIER), BUT THAT REALLY CHANGES WHAT THE WINE SMELLS AND TASTES LIKE ESPECIALLY IF YOU ADD SOMETHING LIKE VIOGNIER LIKE THEY DO.“
지난 3월 빈이태리의 베로나에서 VIA 주최로 세계 17개국에서 55명의 와인 전문가들이 초청되어 이안이 주도하는 제 1회 VIA Certificate 과정을 이수하고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총 100문제, 5지 선다형의 객관식으로 구성된 시험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난이도로 모두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결국 객관식 시험에서 Expert, 즉 전문가 레벨의 테이스팅 시험에 필요한 90%를 충족시키는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원성과 불만 섞인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하는 참가자도 여럿 있었다. 일반 소비자들에게 이탈리아 와인에 대해 널리 전파하고 교육하는데 있어 포도 품종의 biotype(생체형), phenotype(표현형), genotype(유전자형)의 구분이나 anthocyanin(색소)의 상세 프로파일 구분이 왜 중요한가, 너무 과학적이고 세부적인 이론에 치우친 시험은 VIA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이안의 답변은 확고했다.
“의미 있는 지적이다. 나 역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뉴욕이나 런던의 어떤 강연에서도 phenotype이니 DNA이니 하는 내용은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고 VIA가 추구하는 이탈리아 와인 전문가란, 이런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내용들이 탄탄히 뒷받침 된 가운데 토착품종과 이탈리아 각 와인산지에 대해 해박하고 폭넓은 지식과 이해를 동반할 수 있는 수준을 갖춘 사람이다. 특히 여러분들은 외국인들이다. 이탈리아의 와인 생산자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와인 산업에서 종사하는 그 누구를 만나도, 그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전문가가 되길 바란다. 물론 많은 시간과 경험을 요하는 부분이지만, 폭넓고 상세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감이 생기고 이러한 자신감으로 무장되었을 때 상대로부터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되고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이안은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 컨설턴트 미셸 롤랑(Michel Rolland)에 얽힌 일화를 들려주었다. 수십 년 전 그가 와인 저널리스트로 막 발을 내딛던 무렵, 이미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미셸 롤랑을 보르도 그의 집무실에서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이안이 도착했을 때 커다란 의자에 거의 누운 듯이 삐딱한 자세로 그를 맞이하던 미셸의 태도와 표정에서, 식상한 인터뷰에 마지못해 자리한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이안은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준비한, 포므롤 지역 토양과 떼루아에 관련된, 그 동안 미디어를 통해 언급된 적이 없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미셸은 눈을 번쩍 뜨고 자세를 고쳐 앉아 그를 바라보았고, 진지한 대화들이 오고 간 인터뷰는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겨 계속되었다.
며칠 후면 피에몬테 바롤로에서 이안을 다시 만나게 된다. 매년 여름, 음악, 문학, 와인을 주제로 열리는 바롤로 콜리시오니 페스티벌 (Barolo Collisioni Festival)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는 “시음하고, 또 시음하라”며 테이스팅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메일을 보내면서, 이번 행사는 400 종이 넘는 이탈리아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최대한 열심히 시음하라는 격려의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열정을 갖고 다가서는 후배들에게 적극적인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이안에게서 진정한 전문가의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떠돌이(homeless)로 착각할지도 모른다는 스티비 김의 농담처럼 이안은 평소에 너무나도 수더분하고 털털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무한대의 지식과 경험, 여전히 새로운 배움과 도전에 목말라하는 자세와 와인을 향한 끝없는 열정이 그를 세계 최고의 이탈리아 와인 전문가라는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리라.
장거리 여행을 꺼려하는 이안이지만 언젠가는 꼭 그가 한국 이탈리아 와인 애호가들에게 그만의 유머가 가미된 독특하고 해박한 강의를 펼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 교두보 역할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필자 역시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