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최고의 샴페인 레스토랑 Tirage의 수석 소믈리에,
로베르토(Roberto Della Pietra)를 만나다
프랑스의 샴페인, 스페인의 카바, 이탈리아의 프로세코 그리고 캘리포니아,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은 물론 최근 영국에서도 활발히 생산되고 있는 스파클링 와인들. 톡 쏘는 기포가 매력적인 이 버블 와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실로 무궁무진하다. 버블 와인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만큼 뉴욕, 런던, 홍콩 등 국제 도시를 중심으로 샴페인/스파클링 와인만 전문으로 다루는 와인바와 레스토랑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서울이나 부산 등 한국의 대도시에도 색깔 있는 와인바나 레스토랑이 점차 늘고 있지만, 샴페인과 스파클링 와인만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이와 어울리는 음식을 선보이는 샴페인 전문 레스토랑이 있다는 소식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혹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필자의 귀에까지 들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샴페인 관련 기사를 읽던 어느 날, 지난해 말 런던에 새롭게 문을 연 샴페인 전문 바이자 레스토랑인 Tirage(티라지)와, 그곳의 와인리스트를 책임지고 있는 개성 있는 수석 소믈리에 Roberto Della Pietra(로베르토 델라 피에트라)의 이야기를 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픈 직후인 지난 12월 티라지를 방문했을 때, 로베르토의 전문적이며 친절한 안내로 피노 누아만 사용해서 만든 Drappier 샴페인과 피노 뮈니에르만 사용해서 만든 D. Ducos 샴페인을 비교하며 인상적인 시간을 보냈고, 그 후로 인연을 이어오던 터였다. 한국의 스파클링 와인 애호가나 혹시 런던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흥미 있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겠다 싶어, 지난 5월 필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Tirage를 찾았다.
이탈리아 출신의 로베르토는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 소믈리에이자 와인 전문가이다. 티라지에 합류하기 전까지 런던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Gauthier Soho가 이끄는 Gauthier Wines의 총책임자를 지냈고, Decanter World Wine Awards를 비롯한 각종 와인품평회에서 심사위원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올 2월 Decanter와의 인터뷰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런던 최고의 샴페인 및 스파클링 와인 전문 레스토랑을 표방하는 티라지는 120 여 종이 넘는 버블 와인 중심의 리스트를 갖추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샴페인의 60-70%가 (잘 알려진 거대 샴페인 하우스가 아니라) 포도를 직접 재배하여 샴페인을 만드는 소규모 생산자(growers’ champagne)의 와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약 20여 종의 샴페인과 7-8 종의 스파클링 와인을 잔 단위(by the glass wine)로도 제공하는데, 잔 단위 판매가 제법 많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스파클링 와인은 마개를 따면 기포가 증발하는 등 변화에 민감한데, 과연 마개를 연 와인의 보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로베르토가 내놓은 대답은 바로 ‘Le Verre de Vin’다. 잔 단위로 판매하는 와인의 보관을 돕는 이 똑똑한 기계의 힘을 빌어, 변화 없이 최적의 상태로 와인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Le Verre de Vin에 대한 내용은 아래 영상을 참조하기 바란다.
로베르토에게 와인 리스트를 업데이트할 때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고객”이라고 답한다. 티라지를 찾는 고객의 와인에 대한 인식이나 지식이 제한적이기 때문에(샴페인과 스파클링 와인일 경우 특히 그렇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런던에서도 금융 중심지인 시티 지역에 위치해 있어 고객층의 와인 지식과 경험이 풍부할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갖고 있던 필자에게, 로베르토의 대답은 뜻밖이다.
로베르토는 “대부분 본인이 이미 알고 있고 마셔본 와인만 주문하는 경향이 크다”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stay in the comfort zone’, 즉 고객들은 익숙하고 편안한 와인을 찾는다는 것이다. 가령, 전에 마셨던 와인을 다시 주문하려는데 리스트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하면 대부분의 고객들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샴페인의 고급스런 이미지에 금융 중심지라는 지리적 조건이 더해져, 티라지가 제공하는 음식이나 와인의 가격이 무조건 높을 것이라 생각하고 접근 자체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도 있다. 로베르토는 고객의 이러한 선입견을 없애고 문턱을 낮추는 것이 현재 티라지의 가장 큰 과제이며, 특히 음식 매출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최대한 줄이고, 활발한 소셜 미디어 활동을 통해 최대한 많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로베르토가 맞닥뜨린 이러한 고민은 한국의 와인 레스토랑 종사자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화제를 돌려, 티라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스파클링 와인과 음식 매칭은 무엇일까? 이곳을 방문하게 될지도 모를 한국인들을 위해 추천을 부탁하자 로베르토는 주저 않고, 호박씨와 참깨 등 아시아의 풍미가 더해진 농어요리와 러시안 스파클링 와인 Abrau-Durso “Cuvee Alexander II" 를 꼽는다.
러시안 스파클링이라...흥미로운 접근이다. 샤도네이, 피노 블랑, 피노 누아, 리즐링을 섞어 만든 이 스파클링 와인은 특히 리즐링이 선사하는 말린 살구, 향신료, 진저브래드의 풍미가 도드라지고, 드라이한 브뤼(Brut)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달콤한 과일 풍미를 지닌 덕분에 호박씨나 참깨의 고소함과 잘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조합에 대해 극찬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시큰둥한 사람도 있으니, 역시 각자의 입맛에 따른 선택이 정답이라고 로베르토는 덧붙인다.
그가 제안하는 또 다른 매칭은, 소규모 샴페인 생산자인 Lacroix의 Reserve NV 샴페인과 사슴고기의 궁합이다. 오크통에서 발효시킨 이 샴페인은 풍부하고 크림 같은 질감, 견과류의 풍미, 훈연 향, 뛰어난 보디감을 갖추고 있으며, 풍미가 짙지 않게 조리한 사슴고기와 조화롭다는 것이다.
로베르토에게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과 관련하여 주목할만한 현상이 있는지 묻자, 로제 샴페인(또는 스파클링 와인)에 대한 고객들의 관심이 계절에 상관없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말하며, 영국의 스파클링 와인 생산자 Hush Heath의 Balfour를 추천한다.
이탈리아 출신답게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에 대한 애정 역시 만만치 않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스파클링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며, 북부 피에몬테 Cuneo 지역에서 샴페인 양조 방식으로 만드는 Marcalberto의 와인과, 남부 깜빠니아 지역에서 Falanghina 품종으로 만드는 Donnachiara Brut Sante를 꼽는다. 접하기 쉽지 않은 이들 와인을 티라지 와인리스트에 추가할 계획이라니, 머지않아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샴페인을 알려달라고 하자 로베르토는 Drappier의 Blanc de Noir(적포도 품종으로 만드는 샴페인 또는 스파클링 와인)와 Salon의 Blanc de Blanc(청포도 품종으로 만드는 샴페인 또는 스파클링 와인), 그리고 Jacquesson의 샴페인을 꼽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특한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의 이름을 들려주겠거니 기대했는데, 단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름들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소믈리에 또는 소믈리에 희망자에게 선배로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전해주겠다고 하니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소믈리에가 갖추어야 할 기본은 열정(passion), 됨됨이(great human being), 그리고 겸손함(humble)입니다. 마치 시험을 볼 때처럼 와인을 묘사하거나 로봇처럼 고객을 대한다면, 고객과의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침 로베르토가 “Top 10 Most Annoying, Rude and Arrogant Things Sommeliers do”라는 칼럼을 통해 소믈리에라는 직업에 대한 통찰을 공유한 바 있으니 참고하기 바라며, 그와의 인터뷰는 이것으로 마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