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을 그대로 해석하면 “눈을 가리고 하는 시음”을 말하는데, 선입견과 편견을 초래할 수 있는 사전 정보가 차단된 상태, 즉 병의 모양과 레이블 등을 가린 상태에서 와인의 맛과 품질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평가 방법은 와인 품평회나 와인 전문 매체에서 주최하는 와인 시음회에 종종 도입되며, WSET, 마스터 오브 와인(MW), 마스터 소믈리에(MS) 등 각종 와인 자격 시험의 주요 평가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와인 산업 종사자뿐만 아니라 와인 동호회나 일반 와인애호가 사이에서도 종종 행해지는데, 이를 통해 본인의 시음 능력을 평가하기도 하고 모임의 흥을 돋우기도 한다.
“파리의 심판”처럼 블라인드 테이스팅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는 다양하게 인용되거나 마케팅에 곧잘 활용된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호주에서 대량생산되는 과일 풍미 위주의 중저가 와인이 프랑스의 고급와인을 누르고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와인의 품종과 산지, 나아가 빈티지나 생산자까지 맞출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물론 해당 와인을 많이 마셔본 사람이 맞출 가능성이 높다. 한 지역, 한 생산자 혹은 같은 스타일의 와인만 줄곧 마셔온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답을 맞출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어떤 와인이든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정확히 짚어내는 것은 가능할까? 만화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게임의 법칙이 등장한다. 와인을 많이 마셔본 사람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유리하겠지만, 와인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생산국가, 지역, 품종, 게다가 특정 와인의 제조 방식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바탕으로 잔 속에 담긴 와인의 향, 맛, 느낌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추론하는 것은, 마치 탐정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추리하는 과정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 추리의 과정이 바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눈 앞에 레드 와인 한 잔이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가장 먼저 와인의 색상과 농도를 보고 숙성의 정도를 파악하고,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쉬라즈처럼) 색이 짙고 껍질이 두꺼운 품종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피노 누아나 그르나슈처럼) 색이 연한 품종으로 만들어졌는지 가늠하는 것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시작된다. 이후 와인의 맛과 향을 통해 추론 범위를 점차 좁혀나간다.
화이트 와인의 예를 들어보자. 만약 와인에서 약하게 기포가 발생한다면 리슬링, 알바리뇨, 뮈스카데, 그뤼너 벨트리너 같은 품종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잔당과 12도 이상의 알코올 도수가 느껴지면 여기서 뮈스카데를 제외하고, 산도가 뚜렷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리슬링도 제외시킨다. 이제 남은 품종은 질감, 산도, 알코올 도수가 비슷한 알바리뇨와 그뤼너 벨트리너 뿐이다.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알바리뇨는 좀더 아로마가 짙고 복숭아, 꽃 향을 풍기는 반면, 그뤼너 벨트리너는 좀더 중성적이며 녹색 피망의 맛이 마지막에 살짝 감돈다. 이러한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최종 결론에 도달한다. 생산지역까지 맞춰야 하는 상황이라면, 알바리뇨의 경우 스페인의 리야스 바이사스, 그뤼너 벨트리너의 경우 오스트리아의 바카우 또는 캠프탈일 확률이 높다.
경우에 따라서 보다 다양한 요소를 감안해야 할 때도 있다. 오크 발효 및 숙성(프랑스산인지 미국산인지, 새것인지 아닌지, 숙성 기간 등) 상태, 화이트 와인의 경우 젖산발효를 거쳤거나 효모 앙금과 함께 숙성되었는지의 여부, 레드 와인의 경우 타닌의 상태, 스위트 와인의 경우 잔당의 양 및 당도가 농축된 경위(건조, 동결, 귀부균 감염 등), 주정강화 와인의 경우 알코올 도수 및 잔당의 양 그리고 산화 정도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최근 지구온난화, 재배 및 양조 기술의 발달, 생산자 사이의 국제적인 교류 등으로 인해 와인의 지역 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재배되는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 중심의 보르도 블렌딩 와인 또는 샤르도네 같은 품종으로 만든 와인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마스터 오브 와인(MW) 시험의 와인 시음 부문에도 반영되고 있는데, 정확한 생산지역을 밝혀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와인에 대한 분석과 추론 과정이 합당하다면 상당한 점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와인의 품질과 상업성을 논하는 문제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와인 상인이나 소믈리에, 교육가 등 와인 전문가는 물론 와인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꾸준히 감각을 유지하고 시음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게임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품종, 지역, 제조과정, 나아가 와인 산업의 트렌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꾸준히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게임의 규칙 말이다. 와인을 단지 취미로 즐기는 애호가라면 단순히 게임을 즐기면 그만이다. 그래도 게임에서 이기고 싶거나 이길 확률을 높이고 싶다면, 와인을 여는 횟수만큼 책을 펼치거나 와인 정보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