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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종 (yoo@wineok.com)
온라인 와인 미디어 WineOK.com 대표, 와인 전문 출판사 WineBooks 발행인, WineBookCafe 대표를 역임하고 있으며 국내 유명 매거진의 와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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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2016년의 아침을 맞는다. 해마다 년 초가 되면 빈 필의 신년음악회 단골 레파토리 중 하나인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박쥐 Die Fledermaus’ LP를 꺼내어 듣곤 한다. ‘박쥐’에는 유명한 권주가 중 하나인 ‘샴페인 송’ “All I Want Is More Champagne”이 나오는데, 청음을 핑계삼아 신년 축하주로 샴페인 한 병 하자는 속셈이 숨어있다. 뻔한 술꾼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다.
 
‘왈츠의 황제’로 불리우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1874년에 작곡한 오페레타 ‘박쥐’ 중에는, 경찰 모욕죄로 5일간의 금고형을 선고 받은 아이젠슈타인 남작이 아내 로잘린데에게는 유치장에 간다고 말해놓고 옛 친구 팔케와 함께 그날 밤 오를로프스키 공작이 여는 파티로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로잘린데를 연모하는 알프레드, 하녀와 형무소장 등 등장 인물들 사이에 연모와 애증, 복수, 원한 관계가 얽히고 설키며, 결국 아이젠슈타인 남작은 헝가리 출신의 백작부인으로 분장하고 가면을 쓴 자신의 아내 로잘린데를 사랑하게 된다는 다소 코믹하고 황당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박쥐 팔케의 복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이번 사건의 범인은 ‘샴페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박쥐 가면을 쓴 친구 팔케의 복수극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며 오페레타 ‘박쥐’는 ‘샴페인 송’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자, 모입시다. 함께 어울려 같이 노래합시다!
(Stimmt ein! Stimmt ein! Stimmt ein!)
모두 샴페인 때문에 생긴 일
(Champagner hats verschuldet)."
 
 
데카DECCA 社에서 발행한 이 LP음반의 자켓 사진을 한번 보시라. 코르크가 철사 줄에서 풀려 공중으로 튕겨나간 직후 거품이 올라는 순간을 포착한 한 장의 흑백사진에서 뜨거웠던 무대의 열기와 현장감, 결말을 상징하는 극적 긴장감까지 읽을 수 있다. 모든 게 샴페인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샴페인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샴페인이기 때문에 복수할 수 있고 샴페인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고. 관객과 배우가 ‘샴페인 송’을 함께 부르며 축제의 선율에 맞춰 샴페인 잔을 부딪히며 환호하는 피날레라니! 슈트라우스의 왈츠는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흥분의 감정선이 극 전체에 이어진다. 입 안을 간지럽히는 샴페인의 기포가 주는 탐미적 쾌락과 행복감과 기가 막히게 닮아있다.
 
박쥐
 
 
■ 와인이 취미여도 좋은 이유
 
와인은 다른 술과 많이 다르다. 맥주나 소주처럼 공장에서 똑같은 레시피로 찍어 나오는 그런 상품이 아니다. 와인은 전 세계에서 수천 가지 품종으로 수만 가지 종류로 만들어지며 8천년 역사를 켜켜이 인류와 함께 해 온 알코올 음료이다. 와인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똑같은 와인을 만들 지도 못하고 똑같을 수도 없다. 같은 지역의 와인이라도 품종이 다르고 만든 이가 다르며 밭이 다르다. 게다가 매년의 날씨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보관을 어떻게 했고, 어디서 어떻게(온도, 와인잔의 형태 등) 마시는지도 와인의 풍미에 영향을 준다. 와인이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남자에게 여자와 골프가 재미있는 이유는 아무리 정복하려 해도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 때문이라는 농담처럼, 와인 역시 그러하다.
 
이렇듯 저마다 다른 와인의 미스테리를 하나씩 탐구해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이가 바로, 와인이라는 취미를 가진 ‘와인애호가’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와인을 사랑하게 되면 역사, 지리, 천문, 여행, 미식, 테루아(terrior)라는 와인의 생태적 환경, 양조자의 철학, 나아가 거룩한 가문의 계보와 가문의 비기까지도 알려고 애쓴다. 책을 읽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선험자들의 경험기를 기웃거리고, 호시탐탐 그 와인을 구하려 하고 탐한다. 와인애호가들이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높은 점수를 준 와인이나 그랑 크뤼 와인을 과시욕이나 허영기로만 즐기는 속물은 결코 아니다. 탐욕적 욕구만 있는 게 아니라, 탐미적 안목과 탐구적 지식이 와인을 즐기면서 자신의 경험으로 축적되고 체화하는 것이다. 이런 취향의 특별한 경험과 향유적 욕구가 중년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멋이고 즐거움이자 취미여야 한다. 이게 다 와인이 맛이 있기 때문이다.
 
 
■ 와인애호가가 경계해야 할 것들
 
얼마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컬트(Cult) 와인 몇 가지를 시음할 기회가 있었다. 컬트 와인은 ‘숭배’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컬트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희귀성과 상상할 수 없는 높은 가격 때문에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와인애호가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최고가의 와인이다. 대표적으로는 독수리 그림 레이블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와인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 그와 자웅을 겨루는 라이벌 ‘할란(Halan)’,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획득한 ‘시네콰논(Sine Qua Non)’, ‘샤토 르팽(Château Le Pin)’, 스페인의 ‘베가 시실리아(Vega Sicilia)’ 등이 있다. 이제는 한술 더 떠서 50대 컬트 와인, 100대 컬트 와인에다 칠레의 컬트 와인, 호주의 컬트 와인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이쯤 되면 아예 컬트라는 단어가 무색하고 무의미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컬트 와인은 대개 와인산업의 황제라 불리는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획득한 사실을 훈장처럼 달고 화제를 몰고 다니며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또한 이들 와인 대부분은 천재 와인메이커들이 만들었다는 공통점과 놀라울 정도의 농축미, 독특한 개성, 짙은 과일 풍미, “레이저로 지지는 듯 하다”라고 종종 표현되는 강렬한 타닌 등 엄청난 포텐셜을 자랑한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첨단 기술이 와인재배기술에 접목이 되었다는 둥 화제성 있는 스토리텔링 역시 블럭버스터급이다. 여기에다 아주 제한적인 예약시스템과 배급을 받는 듯한 유통 조건까지 내걸고서, ‘갖고자 하나 구할 수 없는 레어 아이템’이라는 희소성에 실리콘밸리의 백만장자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하기에 필요충분한 조건의 와인이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첨단 럭셔리 마케팅의 산물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그 와인 마셔봤어?”에 모두들 흥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역시 인간이란 호기심과 소수만이 누리는 탐욕적 쾌감에 속수무책인 존재라는 생각마저 든다. 과연 그리도 유명한 와인 한 병을 마신다는 행위는 꼴값인 건지, 돈값인 건지, 그도 아니면 ‘중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의 열병’인 건지! 그 많은 와인천재들은 진짜 천재이기나 한 건지?!
 
매년 양산되는 천재 와인메이커들과 이들이 만드는 와인이 모두 속물이라거나 속물 와인이라고 비난하고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비싸고 유명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필자가 “프랑스나 이태리의 수백 년씩 전해오는 전통적인 그랑 뱅(Grand Vin, 위대한 와인)이 마치 얼굴에 주근깨도 있고 적당히 배도 나왔지만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밴 지덕체의 품위를 갖춘 자연스러운 미인이라면, 컬트 와인은 너무나도 완벽한 미녀이지만 유명한 성형외과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듯한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지는 와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컬트와인 애호가들로부터 무지하게 욕을 먹을 것이다. 부디 용서하시라. 이게 다 낮술 때문이다.
 
 
■ 와인애호가, 그들은 누구인가?
 
와인애호가의 세상에서는 인간을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한다. 와인을 마시는 사람과 마시지 않는사람이 그것이다. 와인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와인을 알고 마시는 사람과 와인을 모르고 마시는 사람으로 2차 분류가 가능하다. “인간은 와인을 마시는 동물”이며 이는 Homo Vinocus라는 신인류의 출현이다. 호모 비노쿠스는 다른 술은 몰라도 와인만은 술을 마시면서 공부까지 해야 한다는 다소 난감하기까지 한 강박관념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새로운 와인,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와인, 처음 마셔보는 품종의 와인, 새로운 생산자와 새로운 지역의 와인 등 와인애호가의 욕심은 끝이 없다. 결국 이 모든 탐구와 탐욕과 탐식과 탐미의 지고지난한 여정을 통해 좋은 와인을 발견하고 가치를 느끼며 더 맛있게 와인을 즐기겠다는 애호가들의 열망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탐미와 탐욕의 결과는 수집가로서의 와인애호가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탐구자로서의 와인지식가를 배출하며, 탐식가로서 파인 다이닝의 정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수집가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열망 때문에 항상 행복하기보다는 채워지지 않은 욕구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한데, 때때로 불행과 함께 살아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는 술잔을 받아 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입 속에 털어버리는 소주 같은 술도 있고 시원한 청량감 때문에 단숨에 들이키는 맥주 같은 음료도 있지만, 와인처럼 족보 따져가며 시음 온도, 품종의 특성, 숙성력, 균형감, 여운, 풍미 등 알쏭달쏭한 탐미의 미로 속을 찾아 헤매는 그 복잡하고 난해함을 오히려 즐기게 만드는 악마적 취미의 술 또한 있는 것이다. 모를 때는 몰라 못하지만, 이미 알게 된 이상 평정심과 유혹의 칼끝 같은 선로 위를 양팔을 펼쳐 균형을 잡으며 걸어야 하는 수집가의 번민은 스스로 알고 하는 고행이자 즐거움이다. 그리고 애호가들은 언제나 선택과 구매를 강요 받는다. 그 선택은 언제나 비용을 수반하며 타인의 이해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늘 괴롭고 외로우니, 자업자득도 유분수인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와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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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애호가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
 
마케팅의 결과물로서 양산되는 신흥 천재 와인메이커들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우주에서 온 와인’의 대척점에는, 수백 년간 수 세대에 걸쳐 자손대대로 내려온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전통주의자의 와인들이 있다. 대부분 섬세함과 복합미를 갖춘 이 와인들은 그 와인만의 테루아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그랑 뱅이다. 1855년 보르도 와인 등급체계의 그랑크뤼 와인, 수백 년 전 중세 수도사들이 밭이랑을 가꾸며 만들어온 부르고뉴의 그랑크뤼 와인, 필자가 오매불망해 마지않는 프랑스 론 지방의 에르미타쥬나 사토네프 되 파프 또는 코트 로티처럼 자신만의 유산과 아우라를 지켜온 이런 와인들이 대표적인 그랑 뱅이다. 전통적인 토대 위에 빚어지는 위대한 와인, 그랑 뱅은 앞서 말한 컬트와인보다 상대적으로 값이 싸고 정체성도 명확하며 유일무이한 개성을 표현하는 경이로운 와인들이 즐비하다. 와인을 즐기면서, “테루아를 표현하는 와인이 가장 좋은 와인”이라고 말한 <와인력>(2010, BaromWorks)’의 저자이자 Wine Spectator의 명 칼럼니스트인 매트 크레이머Matt Kramer의 말을 늘 경구 삼을 만하다.
 
와인은 알고 마실 때와 모르고 마실 때 전혀 다른 맛과 쾌감을 선사한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애호가가 되면 무엇이 좋은가 같은 의문이 당연히 들 것이다. 조선 후기 문장가 유한준(1732~1811)의 글을 인용한 유홍준의 유명한 말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본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
 
와인에 빠지면, 와인 한 잔이 입 안에서 주는 결이 처음에는 단순 무식하던 것이 한 겹이 두 겹이 되고 이내 여러 겹으로 바뀐다. 단순함과 복합성의 진가도 점차 느껴진다. 이게 땅의 맛인지, 돌의 맛인지, 오크 숙성에서 오는 것인지, 와인의 특별함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떤 음식과 마시면 더 맛있을지 등등, 이런 것들을 느끼고 알아가며 즐기는 와인 한 잔은 전에 마시던 그 와인과 같되 결코 같은 와인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와인이 전통주의자들의 그랑 뱅이든, 컬트와인이든 결국 와인애호가 개인의 주관적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관적 취향을 확립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든 자신만의 와인 취향을 알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아직 모르는 와인과 테루아에 호기심이 많은 와인애호가들이 늘어나길 빈다. 이게 다 와인이 좋기 때문이다. 2016년, 가격 좋고 맛있고 좋은 와인은 널리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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