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올해 상반기 거시경제지표를 살펴보면, 상반기 경제성장률은 2% 수준으로 여전히 불황의 연장선상에 있고, 국가경쟁력지수를 견인하던 수출주도의 대기업들마저 이익률이 둔화되고 있다. 얼마 전 개각을 단행한 2기 내각 경제팀의 저금리기조와 부동산경기 불지피기 역시 별무소득인 듯하다. 경제 전반의 침체가 장기화되고 소비지수도 빙하기를 맞고 있는 와중에 세월호의 한파까지 몰아쳐 경기는 그야말로 사상 최악이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상반기 국내 와인 시장이 와인 수입 금액을 기준으로 전년대비 5.3% 성장했다는 점은 타 업종과 산업을 통틀어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여진다. 이 수치(상반기임을 감안)는 2010년 이후 5년 동안 평균성장률 10% 안팎의 견고한 성장세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작년 말 2008년 전고점 돌파 이후 와인 시장이 본격적인 성장기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성장기의 전조와 기대감은, 와인 바나 레스토랑으로 대표되는 ON 시장과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로 대표되는 OFF 시장의 크나큰 입장 차이를 알게 되면 그리 반길 만한 상황만은 아니다.
2014년 상반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ON 시장은 날개 없는 추락”, “OFF 시장은 대형 마트의 저가와인 주도로 본격적인 시장 성장기 진입”이다. 불행하게도 ON 시장과 OFF 시장이 빛과 그림자처럼 상반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는 사실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ON 시장은 소비자들의 Good & Cheap 소비 행태(불황기의 전형적인 소비행태)로 지속적인 매출 하락을 겪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업소에서 인건비, 임대료, 고급화되는 식재료 등에 따른 지출은 늘고 있지만, 매출성장과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요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익을 내기가 힘들고, 자금회전이 잘 안되니 투자나 마케팅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현 상황에서는 “버티고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가격 프로모션에서부터 ‘울며 겨자먹기’식 NO 마진 판매에 이르기까지, 제살 깍아먹는 가격경쟁의 악순환만 되풀이될 뿐이다. 특화된 음식과 차별화된 와인서비스? 말이 쉽지, 고객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찾아 다니기 때문에 극진하게 공들이고 떠받들어도 결국 서비스는 여기서 받더라도 돈은 더 핫하고 새롭고 더 멋진 곳에서 쓰게 되어 있다. 고객들은 갈수록 스마트하다 못해 영악해지고, 치열한 경쟁으로 업소의 이윤은 줄어드는 힘든 시장 환경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향후의 ON 시장은 그 동안의 단순한 가격 프로모션에서 벗어나, 보다 진일보한 특별한 경험마케팅과 차별화된 고객 마케팅을 도입하는 -예를 들면 파레토의 법칙(80대 20의 법칙)에 따라 효율성이 큰 단골고객에게 집중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는 정책 등의 방법을 구사하는- 수밖에 없다. 와인리스트의 차별화, 고객층에 맞는 관계 마케팅의 강화, 특화된 서비스 제공 등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고객들로부터 인정받는 업소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다시 말해, ‘관점의 전환’이야말로 지금과 같은 난개발의 암흑기를 탈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전환시대의 논리가 될 것이다.
ON 시장과 달리 OFF 시장은, 본격적인 수입맥주 전성시대와 저가와인의 대중화로 말미암아 본격적인 시장성장기의 축제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가정에서 저렴하게 수입맥주나 와인을 즐기고 요리를 취미 삼는 인구가 증가하는 등, 불황으로 인한 소비 행태의 변화가 오히려 시장에 활력을 주는 것이다. 재난 수준의 경기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부 대형 마트의 와인 부문 매출은 올 상반기 10~15% 정도 성장했다.
대형 마트가 와인 시장 전체가 아닌 저가와인 시장만 확대시킬 뿐이며 대형 마트의 성장이 모스카토 같은 제한적인 제품 카테고리에 국한된 기형적인 결과라는 비판도 들려오지만, 오히려 지속적으로 와인저변을 넓히고 와인 입문자층을 확대시킨다는 선순환적인 측면은 전체 와인 시장에서 볼 때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이들 와인입문자를 어떻게 와인애호가 집단으로 트레이딩 업(Trading up) 시킬 것인가 하는 점인데, 여기서 자금적으로 여유가 있는 산업 리더들의 산업적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 한국 와인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와인의 종류별 소비가 가능해지려면 와인입문자가 와인애호가로 차츰 진화하면서 그 외연이 확장되어야 하는데, 산업 리더들이 판매 증대 같은 하드웨어적인 요소보다 소비자교육이나 캠페인 등의 소프트웨어적인 요소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리더로서의 책임을 다할 때, 외연의 확장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질적 심화와 와인문화의 발전까지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와인 산업 내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미국 와인 산업의 초석을 다진 세계 와인 산업의 거장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만한 롤모델이 없다. 그가 생전에 와인 관련 대학이나 기관에 기부한 금액은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며, 양조기술과 포도재배법을 후학들에게 지도하고 전수하려 했던 그의 아낌없는 노력은 1976년 ‘파리의 심판’이라는 세기의 와인 혁명을 일으킨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와인 전문 매체와 밀접히 협력하여 와인 문화 설파에 앞장섰다.
이 밖에도 몬다비는 와이너리 방문을 통한 관광객 유치라는 마케팅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고, 2001년에는 미국의 와인, 음식, 예술을 포괄한 문화 박물관이자 교육 센터인 COPIA(The American Center for Wine, Food and the Arts)를 설립했으며, 90세가 넘은 고령에도 세계 각지를 돌며 캘리포니아 와인을 알리기 위한 홍보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로버트 몬다비가 ‘나파의 대부代父’로써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한국 와인 산업에서이러한 리더십이 출현할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한편, 현재 한국의 와인 산업은 영화 산업과 비슷해서, 그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타산지석 삼을 만한 부분이 있다. 영화 산업에서 영화의 질보다는 박스오피스 순위에 따라 흥행이 결정되는 것처럼, 와인 산업에서는 대형 마트의 PB 와인이나 직소싱 와인이 유통을 장악하고 있으며 가격 이점까지 갖추고 있어 소비자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영화 ‘명량’에서 보듯, 와인 산업 내의 과다한 독과점은 중소 규모의 부티크 와인수입사들에게서 유통기회를 빼앗고 높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점차 OFF 시장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결국 시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속화시킨다.
나아가, 이렇게 다양성의 롱테일을 상실하게 되면 어렵게 지핀 제 2의 와인 르네상스의 불씨를 꺼트리게 될는지도 모른다. 소비자의 와인 가격에 대한 불신은 고착화되고, 지속적으로 경영악화를 겪는 대부분의 중소 수입사들이 ON 시장으로 전략을 수정함으로써 과잉 출혈 경쟁으로 내몰리는 등 부작용을 잉태하고 양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향후 OFF 시장에서는 수입사들의 차별화된 마케팅 수행 능력이 시장의 사활을 건 승부수가 될 것이다. 제품 차별화, 각 수입사 고유의 정체성 구축, 핵심 소비자들과의 관계지향적 마케팅 전략 수립, 협동조합의 장점 도입, 온라인 판매 실현, 공동 연대를 통한 독자적 유통 채널 확보 등, 선진화된 유통 형태에 대한 연구와 새로운 유통 채널의 개발 및 다각화라는 숙제를 다 함께 고민해야 봐야 할 시점이다.
올해 초, 수입사 나라셀라는 고급 음향기기 전문기업 로이코와 함께 음악과 와인을 동시에 시연하는 행사를 마련하여 참가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위 사진). 또한, 와인과 문화를 접목시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입사 와이넬은 지난 6월 ‘아트 인 더 글라스’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아래 사진). 이처럼 최근 한국 와인 산업 내에서 와인을 다양한 분야의 여러 가지 소재와 접목시켜 소개하려는 신선한 움직임이 목격되고 있으며, 이는 산업 내에 긍정적인 변화의 기운이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