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세계에 입문했을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그리고 와인의 기준으로 자리잡는 것은 보통 프랑스 와인이다.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인 보르도(Bordeaux)와 그 대척점인 부르고뉴(Bourgogne)의 존재감을 알게 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보르도는 대서양 연안의 고온다습한 날씨와 넉넉한 햇살 덕분에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등 이른바 ‘보르도 블렌딩의 삼총사’ 품종으로 세계 최고의 레드 와인을 생산한다. 또한 1855년부터 면면히 이어져오는 영광의 계보, 보르도 5대 샤토를 위시한 ‘그랑 크뤼 클라쎄(Grand Cru Classe)’를 목숨처럼 지켜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보르도 와인을 음악으로 표현하자면, 다양한 악기의 특성이 잘 어우러져 훌륭한 합주곡으로 완성되는 베토벤의 ‘전원’이나 ‘합창’ 교향곡 또는 실내악 4중주와 같다. 반면 단 한가지 품종으로 만드는 부르고뉴 와인은 한없이 맑고 투명한 빛깔을 지니며 순수함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바이올린이나 첼로 독주를 연상시킨다.
6월인 이맘때쯤 부르고뉴를 여행하면, 장미꽃이 포도밭 입구에서부터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수호신처럼 포도밭을 지키고 있는 장면을 곧잘 목격하게 된다. 병충해를 감지하여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포도밭에 종종 장미를 심는데, 그래서인지 피노 누아 와인은 장미 향이 유독 짙다.
세계적인 고급 와인 산지인 부르고뉴의 포도밭은 프랑스 전체 포도밭 면적의 3%에 불과한데다, 140여 개국에 와인을 수출하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값비싼 와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부르고뉴 와인은 와인애호가의 궁극점이자 미식가가 사랑하는 최후의 와인이며, 즐기기에 까다롭고 어려우며 돈도 많이 든다.
부르고뉴는 보르도에 비해 북동쪽에 위치하며 대륙성 기후 탓에 훨씬 춥고 황량하다. 포도나무의 생장조건 역시 훨씬 예민하고 까다롭다. 게다가 단일 품종으로만 와인을 양조하기 때문에 (화이트 와인은 샤르도네, 레드 와인은 피노 누아) 그 해의 기후에 따라 발생하는 불리한 조건을 양조 기술로 극복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보르도의 경우 블렌딩 기술을 활용하여 빈티지의 결점을 보완하지만 말이다.
부르고뉴에서는 기후가 나쁘거나, 포도 재배와 양조 과정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그 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양조자의 솜씨와 기량, 테루아(terroir, 포도가 자라는데 영향을 미치는 모든 환경적 조건들) 등이 와인의 품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르고뉴 와인이'천지인天地人 와인’이라 불리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은, 똑같은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라도 수십 배, 수백 배, 수천 배의 가격 차이를 형성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10년 빈티지의 본 로마네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e-Conti) 와인은 요즘 시세로 2천만 원을 호가하는데, 이는 수확연도와 양조자 그리고 포도밭 등의 요소가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농산물로 만들어지는 역사상 가장 가혹한 진검승부가 이 평화로운 풍경의 포도밭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부르고뉴는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다가 프로방스로 향하는 A6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2시간 거리로, 프랑스 최고의 화이트 와인 산지인 샤블리Chablis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약 200km에 위치한 보졸레(Beaujolais) 지역까지 포함한다. A6고속도로를 타고 샤블리를 지나 A38고속도로로 접어들면, 미식가를 위한 천국이라 불리는 디종Dijon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국도 N74 주변으로 작디작은 군소 포도원들이 모자이크처럼 짜여 있는, 일명 ‘황금의 언덕(Cote d‘or, 코트 도르)’이 나타난다.
특히 부르고뉴의 중심이자, ‘나폴레옹의 와인’이라는 애칭을 자랑하는 피노 누아 와인의 정수는 바로 쥬브레 샹베르탱(Gevrey-Chambertin)이다. 쥬브레 샹베르탱은, 피노 누아 애호가들이 오매불망하는 주옥 같은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이다.
좁고 길게 포도밭이 늘어선 부르고뉴는 선사시대부터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어 왔다. 이후 6세기경 부르고뉴를 다스리던 왕이 수도원에 포도밭을 기부하였고, 12세기 시토 교단의 엄격한 포도 경작 및 양조 체계 확립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와인이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와인이 된 것은, 중세의 시토 회와 베네딕트 회 수도사들이 클리마(Climat)라는 수천 개의 구획으로 포도밭을 나눈 데서 비롯된다. 이는, 테루아에 따라 포도밭을 나눔으로써 각기 다른 맛, 색, 향을 지닌 와인을 구분하여 생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1375년에 내려진 Philippe Le Hardi의 칙령에 따라 피노 누아 품종만으로 와인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는 부르고뉴가 오늘날 피노 누아의 성지가 된 기반이 되었다. 이후 16세기까지 부르고뉴 공국의 영광과 함께 군주를 위한 와인이 필요해지면서 와인의 품질은 더욱 높아졌고, 이로써 수출에 적합한 고품질 와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5~17세기에는 와인 병의 발명이 와인 품질에 혁신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생겨난 복잡한 상속법은, 한 구역의 밭을 수십 명의 소유자가 나누어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부르고뉴가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이해하기 어려운 와인이자 와인 산지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부르고뉴 지역은 와인 생산량과 포도밭 면적이 매우 작다. 총 60,000에이커(240평방 킬로미터)의 포도밭 면적은 서울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정도이며, 프랑스 전체 포도밭 면적의 3%에 불과하다. 생산하는 와인의 절반은 수출하는데, 특급 와인(Grand cru, 그랑 크뤼)의 경우 부르고뉴 와인생산량의 1.5% 밖에 되지 않아 희소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적은 재배면적과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부르고뉴에는 개별 포도원이 4천 개, 네고시앙(와인중개상)은 250여 곳이나 있다. 또한 100개의 AOC(원산지 표시제도에 따른 명칭, 위 사진)가 있으며 그 중 그랑 크뤼는 33개다. 부르고뉴의 AOC는 포도원의 테루아를 반영하며 크게 4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각 등급은 와인의 품질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한편, 이렇게 작은 땅덩어리에서 수많은 와인생산자들이 경쟁하다 보니, 부르고뉴 와인은 자연스레 고품질, 고부가가치, 희소성에 의한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고가 전략으로 시장에 자리잡게 되었다. 즉, 부르고뉴 와인이 프리미엄 시장을 형성하게 된 주요 요인은 희소성 및 꾸준한 수요 확대로 요약된다. 여기에, 수 세대에 걸쳐 와인을 만들어 온 와인 명가들의 전통과 비전이 더해져 부르고뉴 와인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해 낸다.
부르고뉴 사람들에게 부르고뉴 와인이 왜 이토록 위대한가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다. 그 답은 처음부터 끝까지 테루아로 일관되는데, 한마디로 “부르고뉴의 테루아는 전 세계 그 어디에서도 흉내 낼 수 없다”로 요약할 수 있다.
부르고뉴의 토양은 약2억 5천만 년 전의 화강암, 화산암, 편마암, 편암으로 구성된 지층 위에, 바다로 덮였던 1억 5천만 년 전 쥐라기 시대의 퇴적토가 쌓여 있어 포도가 복합적인 풍미를 지닐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또한 코트 도르의 구릉은 일조량을 최대화하고 배수를 원활하게 하는데 기여한다.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 깊이 뿌리 내린 포도나무는, 다양한 지층으로 구성된 토양에서 풍부한 영양분을 흡수하여 마침내 복합적이면서도 미묘한 맛을 내는 와인을 만들어 낸다.
한편, 부르고뉴가 전 세계 와인 산지 중 가장 추운 최북단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혹독한 추위, 부족한 햇빛과 강수량, 척박한 토양 등을 의미하는데, 이는 어느 하나 충분한 게 없는 결핍이야 말로 오히려 축복으로 환치될 수 있다는 ‘포도나무의 역설’을 완성시킨다.
잔에 따른 후 색깔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품종을 짐작할 수 있는 피노 누아는, 포도 품종 중에서도 가장 맑고 투명하며 섬세하고 담백한 맛을 낸다. 체리, 산딸기, 제비꽃, 날고기 등의 풍미는 피노 누아의 특징이며, 부르고뉴의 지질학적 특성 때문에 미네랄 풍미가 더해진다.
피노 누아는 주로 추운 지역에서 잘 자라고, 덥고 습하면 생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재배하기가 까다롭다. 또한 흰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 테루아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에 와인마다 복잡하고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부르고뉴는 피노 누아 품종에 최적의 테루아를 가진 곳으로 평가 받는다.
부르고뉴의 샤르도네 와인은, 굳이 몽라셰(Montrache)가 아니더라도 석회암의 지질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미네랄 풍미가 매우 뛰어나며 질감이 부드럽고, 감미롭고 산뜻하며 화사한 꽃 향을 지닌다. 은은한 감귤류의 향기와 부드러운 향신료의 꽃 향기가 묻어나는 신선한 과일 풍미는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부르고뉴의 테루아에서 오는 복합적인 특징에 따라 어떤 포도밭은 부르는 게 값이다. 전 세계 수입상들은 와인을 소량씩 할당 받는데,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비자에게는 고급 와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부르고뉴 와인의 높은 가격에 대한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대개 ‘훌륭하고 독특한 테루아’로 일관된다. 소비자나 와인 애호가로서는 매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르고뉴 와인의 가격을 원망하면서 미국 오리건 지역의 피노 누아 같은 대안을 찾지만, 여전히 속으로는 부르고뉴의 그랑 크뤼 피노 누아에 침을 흘린다.
세계 각지의 포도 재배자들이 유난히도 까다로운 이 품종을 성공시켜보려고 노력을 기울이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샤르도네처럼 재배가 수월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물론 뉴질랜드, 호주, 미국의 오리건 주 등 일부에서는 피노 누아 재배에 성공했으나, 여전히 부르고뉴가 아니면 안 되는 ‘맛’과 ‘결’의 임계점만 확인하게 할 뿐이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일물일어(一物一語)의 세계를 보여준다. 대체불가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동그랗고 볼이 커다란 피노 누아 잔에 로마네 콩티나 리쉬브르는 아닐지언정, 쥬브레 샹베르탱이나 에세조 같은 와인을 가득 따른 후, 눈을 지긋이 감고 잔을 돌려가며 코끝을 들이대고 향을 맡으면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피노 누아 애호가들에게 있어 염원의 끝자락이란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로마네 콩티, 앙리 자이에, 엠마뉴엘 후제 등 피노 누아 장인들의 손길과 철학이 녹아 든 신의 물방울 몇 모금을 입에 담는 그 순간. 그게 뭐 그리 대단한지는 아는 사람만이 안다. 불가역의 세계는 모두가 다 아는 뻔한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부르고뉴 피노 누아 & 샤르도네 와인 추천
Jean Paul & Benoit DROIN Chablis
장 폴 & 베누아 드루앵 샤블리
/ 비노쿠스 수입
드루앵 가문은 1620년부터 지금까지 5세기에 걸쳐 14대째 와인을 만들어 왔으며, 유서 깊은 와인가문답게 샤블리 원산지 보호와 명성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드루앵의 와인은 유럽의 귀족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는데, 매년 여름 바캉스 때 와이너리를 직접 찾아와서 와인을 싣고 가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황제가 드루앵 가문의 와인을 마신 후 선물했다는 따스뜨뱅(tastevin, 와인 시음에 사용하는 은제 시음잔)이 가문대대로 전해내려 오고 있기도 하다. 드루앵의 와인은 유질감이 풍부한 풀보디 스타일을 띠면서, 동시에 순수한 과일 풍미와 샤블리 특유의 미네랄 풍미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William Fevre Chablis 1er Cru Vaillons
윌리엄 페브르 샤블리 프리미에 크뤼 “바이용”
/ 나라셀라 수입
비교적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페브르는 샤블리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최고의 와인 명가로 급부상하였다. 특히 무분별한 포도밭 확장으로 특징을 잃어가는 샤블리 지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그 누구보다도 샤블리의 전통을 계승하고 유지하는데 집중해 옴으로써 이 지역 생산자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윌리엄 페브르가 생산하는 프리미엄 샤르도네 와인인 바이용은, 과일과 흰 꽃 향을 비롯해 샤블리 지역 특유의 토양에서 비롯된 미네랄 풍미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얼음 띄운 버킷에 담긴 샤블리 와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가시는 듯하다.
Bouchard Pere & Fils Volnay 1er Cru Caillrets
부샤 뻬레 피스 볼네 프리미에 크뤼 까이에레
/ 나라셀라 수입
부르고뉴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와인 명가 부샤 뻬레 피스. 부르고뉴의 최대 지주라 할 만큼 넓은 면적의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12헥타르의 그랑 크뤼 밭과 74헥타르의 프리미에 크뤼 밭이 포함된다. (위에서 추천한 윌리엄 페브르의 양조장도 이곳이 소유하고 있다.) 특히 부샤 뻬레 피스의 프리미에 크뤼(1er Cru, 1등급) 와인은 독보적이라 할 만큼 뛰어나며, 그 중에서도 볼네 마을에 위치한 까이에레 포도원은 최고의 프리미에 크뤼로 꼽힌다. 부샤 뻬레 피스의 간판급 와인인 볼네 프리미에 크뤼 까이에레는, 정교하고 짙은 과일 풍미에 스파이시한 풍미가 어우러져 복합적이며 육감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이 와인의 장기숙성 능력은 그랑 크뤼에 못지 않다.
Jean Louis Trapet Gevrey Chambertin
장 루이 트라페 쥬브레 샹베르땅
/ 비노쿠스 수입
‘죽기 전에 마셔야 할 100대 와인’,'전설의 100대 와인’ 등에 선정되었으며,'나폴레옹이 사랑했던 와인’,'부르고뉴 와인 중의 왕’ 등 숱한 별명을 지닌 장 루이 트라페는 그야말로 쥬브레 샹베르땅의 보석 같은 와인이다. 1919년에 설립되어 현재 7대째 가족 경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곳은 쥬브레 샹베르땅의 터줏대감인 아르망 후소(Armand Rousseau)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비오디나미 농법의 선구자로서 철저히 자연주의에 입각하여 와인을 만들고 있다. 트라페의 와인은 쥬브레 샹베르땅 와인들이 대부분인데, 이 와인의 특징은 매우 남성적이고 힘이 넘치며 강건한 동시에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을 띤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