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이 아돌프 베드거의 “봄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교향곡 1번, Op. 38 ‘봄 Spring’을 ‘봄 마중곡’으로 찾아 튼다. 봄의 기쁨과 환희를 알리는 트럼펫의 힘찬 울림이 마침내 봄이 왔음을 알린다. 나비가 춤추고 새가 지저귀며 꽃이 피는 봄의 정경, 싱그러운 바이올린 소리에 꽃비가 내리고 넉넉한 대지의 품으로 안내하는 첼로의 소리와 클라리넷의 명랑함에는 꽃망울이 터져나가는 듯 판타지가 느껴진다.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을 생각한다. 스승인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을 사랑한 나머지, 결혼에 반대하는 장인과 법정 소송까지 불사하면서 얻어낸 전쟁 같은 사랑 끝에 그들은 결혼에 성공한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미르테의 꽃 from Myrten, op.25’이라는 가곡집을 헌정하고, 독일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답게 ‘시인의 사랑 Dichterliebe op, 48’이라는 곡을 바쳐가며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한다.하지만 신혼의 단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조울증에 시달리던 슈만이 끝내 라인 강에 몸을 던지고 만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 포옹까지 그들의 지극한 사랑은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아름답다.
이들의 사랑을 평생 말없이 지켜보던 브람스의 클라라를 향한 연정은 또 어떠한가! 브람스는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평생 연모하며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낸다. 유행가 제목처럼 ‘보이지 않는 사랑’이고'미련한 사랑’을 한 것이다.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남모르게 하는 순애보적 사랑, 그게 바로 브람스 식 사랑이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을 때까지 그녀와 가족들을 돌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다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하는 ‘네 개의 엄숙한 노래Four Serious Songs op. 121’를 그녀의 묘에 바치며 클라라를 떠나 보낸다. 그리고 이듬해 봄 ‘오 세상이여! 나는 그대를 떠나야만 하네’라는 마지막 곡을 남기고 그 역시 고단한 사랑의 긴 여정을 마감한다.
예술가들은 비극적인 삶 속에서 ‘예술’이라는 결정체를 만들어낸다. 이는 치열하고 열정적인 사랑과 예술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야만 비로소 얻는 잔인한 운명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복하고 순탄한 인생 속에 편하게 작품을 남긴 예술가보다는 치열하고 배반적인 삶을 살아간 이들이 남긴 불멸의 작품을 마주할 때 더 감동하고 경배하게 된다.
브람스의 ‘네 개의 엄숙한 노래’ 음반은 차분하고 관조적인 음색을 갖춘 ‘클라우스 메르탱’의 목소리로 듣는다. 슬픈 사랑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져, 턴테이블에 LP를 걸어놓고 가슴 시린 사랑의 춘정에 못 이겨 기어이 피노 누아 와인 한 병을 열고 만다. 어떤 품종과도 섞이지 않고 피노 누아 품종으로만 만든 와인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열정을 바치는 순수하고 고결한 예술가의 사랑과 닮아 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상당수 와인애호가들이 갖는 공통점 중의 하나다.음악과 와인 모두 인고의 노력과 열정적인 삶의 흔적이며, 고통을 인내할수록 더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하는 불가역적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면 과대망상일까. 그래도 할 수 없다. 이건 필자가 와인을 사랑하는 방식이니까.
치열한 고통 속에서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는 과정은 척박한 토양에서 위대한 와인이 탄생하는 과정과 흡사하다.와인 스트레스 (Wine Stress)라는 말이 있다. 비옥하고 영양이 풍부한 땅에서 자라 스트레스를 덜 받은 포도나무의 열매는 단순하고 품질이 낮은 와인을 만든다. 반면 척박한 바위나 자갈 토양의 경사면에서 자란 포도나무는 영양분을 찾아 수십 미터의 땅 속까지 뿌리를 내리며, 이렇게 스트레스를 견디어 온 포도나무의 열매로 만든 와인은 복합미를 지닌 위대한 와인 그랑 뱅(Grand Vin)을 탄생시킨다.
사람도 마찬가지로,척박한 환경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태도야말로 삶을 진정 깊이 있고 단단하게 만든다.위대한 와인이 탄생하기까지 포도나무가 견뎌내는 스트레스와 불멸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예술가들이 겪어야 할 산통의 행간의 뜻을 헤아려 보면서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3월이라지만, 꽃샘추위 칼바람이 얇아진 옷차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추위에 몸을 떤다. 그래도 마음만은 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산책길 옆 버들강아지는 여차하면 “봄이다!”하고 꽃봉우리를 터트릴 기세다. 이제 필자도 이 지겹고 무거운 겨울 외투를 벗어버리고 봄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꽃 향기 싱그러운 소비뇽 블랑 와인 한잔 따라 놓고 아름다운 봄날의 오후를 즐기려 한다.
[봄날의 와인 추천]
슐로스 폴라즈(Schloss Vollrads)
클라라의 슈만에 대한 고결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은 독일의 리슬링 와인과 닮았다. 슐로스 폴라즈(Schloss Vollrads)는 8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독일의 와인생산자로, 오직 리슬링 품종으로만 와인을 만든다. 이곳의 리슬링 와인은 깔끔한 산미와 낮은 알코올 도수, 신선한 포도의 달콤함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금양인터내셔날 수입)
비비 그라츠, 테스타마타(Bibi Graetz,Testamatta)
슈만의 정신분열적 예술혼과 지나친 자아성찰적 사고는 이태리 토스카나의 와인생산자 비비 그라츠(Bibi Graetz)의 완벽주의와 어울린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일절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 태도로 와인을 만들어 왔으며, 그 중에서도 산조베제 품종으로 만든 테스타마타(Testamatta)는 복합미와 우아함을 갖춘 완성도 높은 와인이다.(와이넬 수입)
도미니크 라퐁 볼네이 피노 누아(Dominique Lafon, Volnay Pinot Noir)
브람스의 험난하고 고결한 사랑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프랑스 부르고뉴의 와인양조가 도미니크 라퐁(Dominique Lafon)이 만드는 와인을 연상시킨다. 그가 볼네 지역에서 재배한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은 짙은 과일 풍미와 더불어 깊이 있고 우아한 면모를 드러내며 멋진 여운을 선사한다.(비노쿠스 수입)
테멘트치어렉(TEMENT,Zieregg)
봄날에 어울리는 화이트와인 하면 소비뇽 블랑이 떠오른다. 오스트리아의 정상급 와인생산자 테멘트(TEMENT)가 만드는 치어렉(Zieregg)은 매우 세련된 소비뇽 블랑 와인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봐야 할 와인 1001”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배, 구즈베리, 민트, 스파이스 등의 화려한 풍미를 뽐낸다.(퍼플퀸 수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