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포도밭을 본 적이 있는가? 말라 비틀어진 포도나무 쭉정이를 불태우는 희뿌연 연기와 회색 하늘, 하얀 벌판. 한 해의 고난 끝에 남겨진 적요한 풍경이다. 겨울에 마시는 피노 누아 한 잔과 겨울에 듣는 슈베르트의`겨울 나그네’는 마치 겨울의 포도밭을 닮았다.
겨울의 중심에서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해를 맞이한다.`그날이 그날 같건만, 지나고 보니 어제는 오늘과 사뭇 다르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만시지탄만은 아닌 것 같다. 따뜻한 거실에 편히 앉아 피노 누아 한 병을 열고 있자니, 문득`이 한겨울 부르고뉴 코트 드 뉘의 포도나무는 잘 지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는 쓸쓸한 겨울, 눈 덮인 들판을 맞바람 맞으며 한 청년이 구부정하게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재킷의 LP 음반을 꺼내어본다. 왠지 측은지심의 애절한 상념이 피어오르는 노래, 슈베르트의`겨울 나그네(Winterreise)다.
“차가운 눈물방울이 언 뺨 위로 흘러내린다.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린 것조차 몰랐단 말인가! 눈물이여, 이렇게 아침 이슬처럼 싸늘한 얼음으로 얼어버렸네.”
실연을 당해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한 청년이, 눈보라 치는 겨울의 이른 새벽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며 슬픔의 노래를 부른다. 그 유명한 제3곡`얼어붙은 눈물(Gefror’ne Traenen)’의 한 구절이다. 지난해 5월 타계한 독일 가곡의 전설적인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cher Dieskau)의`겨울 나그네’ LP를 골라 EMT 930st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한 잔의 와인을 따른다. 디스카우의 중후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가 칼 엔젤(Karl Engel)의 청량한 피아노 연주에 맞추어 웅혼한 소리로 울려 퍼진다.
이 곡을 듣고 있으니 한없이 쓸쓸하고 우울이 깊어져 정체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슈베르트는 지구라는 별에 홀연히 나타난 히치하이커처럼, 31세의 젊은 나이에 이 고독한 슬픈 연가 속에 실낱 같은 희망을 슬쩍 숨겨놓고는, 그 스스로 겨울 나그네가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비록 그는 찰나의 삶을 살았지만, 우리는 수백 년도 넘게 그의 노래를 들으며 위안을 받고 살아간다. 24개 연가로 구성된 이 곡들은 슈베르트가 죽기 일 년 전 작곡했다. 그가 죽은 지 일 년 후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Wilhelm Miller)가 노랫말을 붙여 발표한, 정통 독일 가곡`리트’의 백미이자 역사상 가장 찬란한`남자가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다.
서정적이고도 지적인 목소리의 이안 보스트리치(Ian Bostridge), 강건하고 정확한 독일 남자 스타일 한스 호터(Hans Hotter), 청아하고도 귀족적인 프리츠 분더리히(Fritz Wunderlich), 첼로같이 깊은 목소리 마티아스 괴르네(Mattias Goerne), 두툼한 중•저음이 매력인 마르티 탈벨라(Martti Talvela) 등. 모든 음반이 다 좋다고 느껴지는 건 아마도 원전의 위대함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슈베르트의`겨울 나그네’는 완전하고 완벽하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들어보시라. 제철 음식이 그러하듯`겨울 나그네’는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부는 지금 들어야 깊은 맛이 느껴진다. 슈베르트의`겨울 나그네’와 피노 누아 한 잔, 그 정도면 겨울 밤은 충분하다. 지금은 새로운 한 해,`겨울나그네’ 연가 중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22번째 곡`Mut(용기)’를 들어보자.
“눈송이가 얼굴에 떨어지면, 흔들어 떨어뜨리리. 내 마음속 슬픈 울음이 터져나오면, 난 밝고 명랑한 소리로 노래 부르리. (중략) 바람과 거친 날씨를 헤치고 쾌활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가리라! 신이 지상에 없다면, 우리들이 바로 신이다!”
위대한 클래식은 경외감과 동시에 무언가 가슴을 뒤흔드는 감동이 있고, 슬픔을 보듬는 정화의 힘이 있다. 삶의 무게에서 잠시 비껴나 노래에 귀 기울여보자. 눈 덮인 하얀 겨울 들판을 달려가다 보면 눈물이 마르고 새싹이 움트는 희망의 봄을 잠시나마 맞이할 수도 있다. 슈베르트의 노래 한 곡으로 슬픔에서 빠져 나와 희망으로 유체 이탈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좀 더 고양된 정신세계를 경험한다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겨울 나그네’를 겨울에 들어야 하듯 겨울에 맛있는 와인이 있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는 어떤 와인을 마시면
제일 맛있을까요?” 필자가 요즈음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다. 그럴 때면 “추운 지역에서 만든 와인이 겨울철
에 가장 맛이 좋은 것 같다”고 답한다. 그러고는 대표적인 추운 기후의 와인 산지 중 하나인 프랑스 동남쪽 부르고뉴 지역의 피노 누아를 추천한다. 세계에서 가장 고급 와인 산지로 알려진 부르고뉴는 프랑스 내에서도 포도밭 면적이 고작 3%에 지나지 않는 데다, 무려 140여 개국에 수출하다 보니 생산량이 공급량을 따라가지 못해 값비싼 와인의 대명사가 되어왔다. 따라서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과 미식가들이 오매불망하는 와인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보르도 와인이 3~4개의 포도 품종을 블렌딩해서 와인을 만드는 데 반해, 부르고뉴 와인은 거의 대부분 화이트 와인은 샤르도네로, 레드 와인은 피노 누아라는 단일 품종으로 만든다. 부르고뉴가 독특한 또 하나 이유는 그 신비스러움이다. 비슷한 위치의 포도밭에서 자란 같은 품종의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도, 밭의 몇 이랑 차이를 두고 수십 배씩 가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와인이 이렇듯 독특하고,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와인이 된 까닭은, 중세 수도사들이 수세기에 걸쳐 포도밭을 클리마(Climat)라 부르는 수천 개의 구획으로 나눈 탓이다. 수천 개의 구획은 각각 다른 맛과 색, 다른 향의 와인을 만들어 내는 독특한 테루아(Terrior)가 되었다.
부르고뉴 와인이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단순히 적은 생산량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유일무이한`맛’과`결’ 때문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환경, 즉 그들만이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위대한 땅과 여러 가지 생장 환경을`테루아’라 부른다. 약 2억5000만 년 전의 화강암, 화산암, 편마암, 편암 등으로 구성된 지층 위에, 1억5000만 년 전 쥐라기 시대 당시 바다에 잠겨있는 동안 형성된 퇴적토(점토, 이회암, 석회암으로 이루어짐)이 덮고 있는 이곳의 토양은, 포도나무가 복합미를 갖게 만드는 천혜의 환경을 조성한다.
이렇게 척박한 토양과 함께, 부르고뉴는 세계 모든 와인 생산지 중 가장 추운 최북단에 있어 추위가 혹독하고 햇빛은 부족하다. 이처럼 이곳에서는, 어느 것 하나 충분한 게 없는`결핍’이 오히려`축복’으로 환치되는 포도나무의 역설을 목격하게 된다. 추운 지역에서 천천히 무르익는 포도가 섬세하고 단단하며 복합미 넘치는 관능적인 와인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어려운 환경에서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훌륭한 사람으로 성공한 인물들의 이야기와 맥락이 동일하다.
오랜 전통과 천혜의 테루아, 강인한 포도나무의 생명력, 그리고 이를 재배하는 포도 농부의 헌신적인 노력. 이른바 천(天)•지(地)•인(人)이 합쳐진 와인이 부르고뉴 지역의 피노 누아 와인이다. 몇 년 전 부르고뉴에서 지낸 겨울의 기억들이 생생하다. 혹독한 추위와 칼바람, 우중충한 회색빛 날씨는 부르고뉴의 겨울을 상징한다며, 마치 내가`겨울나그네’라도 된 것처럼 겨울 들녘을 헤매던 기억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가을철 포도 수확기가 되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황금색 구릉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하여 붙은 이름,`코트 도르(Cote d’Or)’는 지금쯤 하얀 눈에 온통 뒤덮여 흰색의 구릉`블랑 도르(Blanc d’Or)’가 되어버렸겠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한겨울의 포도밭 가운데 길을 자동차로 가로질러 달리다 보면 이런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낮게 드리운 회색 하늘 밑 포도밭, 말라비틀어진 포도나무 쭉정이를 불태우는 희뿌연 연기가 낮은 하늘 구름과 맞닿은 아련한 풍경들. 그리고 기억된다. 한 해의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위대한 그랑 크뤼 와인 한 병을 탄생시킨 농부의 노고와 대자연의 생명력. 와인 한 병에 새겨 있는 고통과 성장통을 추억하며 이달의 와인으로는`사랑하는 연인들’이라는 뜻을 지닌 로베르 그로피에(Robert Groffier)의 ‘레 자무레즈(Les Amoureuses)’을 고른다. 새해가 사랑을 완성하는 그랑 크뤼한 빈티지(한 해)가 되기를 빌며.
◀Robert Groffier Les Amoureuses (비노쿠스 수입)
이 글은, 유경종(WineOK.com 발행인, 이탈리안 비스트로 와인북카페 대표) 칼럼니스트가 매거진 뮤인MUINE에 기고한 와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