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아침에 떡국을 먹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한식 재료를 찾기 쉽지 않은 타국에서 떡국을 챙겨먹는 건 사치일 수 있다.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고, 닭을 통째로 고아 우려낸 육수에 토르텔리니(tortellini, 만두 모양의 라비올리)를 넣고 끓인 이탈리아식 만두국으로 떡국을 대신하며 대리만족을 느껴본다.
성탄절 휴가니 연말휴가니 해서 인구가 반쯤은 줄어든 토리노 시내는 한적했지만,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산카를로 광장은 배불뚝이 만두처럼 꽉 찼다. 그리고 모여든 이들의 양손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산과 스푸만테가 들려있었다.
“콰트로(4)! 트레(3)! 두에(2)! 우노(1)!”를 합창하자 폭죽과 코르크 마개가 일제히 하늘로 솟아 올랐다. 하늘로 올랐다 다시 쏟아져 내리는 스푸만테의 포말로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피하려는 이들의 우산도 동시에 펴졌다.
새해맞이 며칠 전, 드라이한 맛으로만 마셔오던 품종을 스푸만테로 만났다. 이 예상 밖의 스푸만테 중에는, 밥알이 빠진 동동주의 색과 영락없이 닮은 베르멘티노도 있었고 선홍색이 비치는 포르타나 품종으로 만든 수르리에(Surlie’)도 있었다. 산도가 적당한 품종이라면 머리카락 굵기의 탄산가스가 녹아있는 스푸만테로 변신하는 건 와인 장인의 손재주에 달려있음을 확인한 날. 이탈리안스런 희귀 품종과 포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장인의 솜씨가 낳은 몇 가지 스푸만테를 소개한다.
▲Vermentino Z Frizzante Sui Lieviti
(생산자:콰르토모로, 품종:베르멘티노)
콰르토모로가 만든 베르멘티노는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동동주 빛깔이라는 점과 와인의 원료인 베르멘티노가 자란 곳이다. 햇빛에 달아오른 베르멘티노 포도가 소금기 밴 해풍을 맞으면 화상을 입을 수 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다를 배후에 둔 낮은 구릉에 심었다. 알코올 발효 후 10개월 숙성시킨 드라이한 맛의 베르멘티노 와인에 새로 수확한 동일 품종의 포도주스를 소량 섞은 후 병 안에서 2차 발효시켰다. 와인의 색이 탁한 것은, 발효를 마친 효모의 앙금을 걸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잔손이 많이 간 스푸만테는 앞니로 자르고 어금니로 씹을 정도의 식감과 다양한 향이 포개어져 있다. 헤이즐넛, 호도의 견과류 향이 나다가 버터 바른 빵을 구운 향, 효모 향, 미네랄 향을 드러낸다. 탁한 색 때문에 기포를 잘 볼 수는 없지만 혀를 쏘는 감촉으로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둔탁함 속에 숨어있는 싱그러운 산미와 씁쓸한 맛, 드라이한 맛의 베르멘티노를 마실 때의 묵직함이 전해온다.
▲Fortana Surliè
(생산자:Mariotti, 품종:포르타나)
642km 길이의 포 강이 아드리아 해에 합류하기 전에 만나는 광활한 모래삼각주, 바로 이 모래땅이 굳어서 형성한 대지가 포르타나(fortana)의 재배지이다. 모래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때부터 이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마셨다고 하니 이 품종의 역사는 까마득한 옛날에 이른다. 이 와인은 이곳의 별미인 잠포네(zampone: 돼지다리의 내용물을 제거한 후 그 안을 갈은 돼지고기로 채운 것)나 갯장어로 만든 음식을 먹은 후 입안에 겉도는 느끼한 맛을 제거해주며, 산미와 타닌이 재료의 감칠맛을 돌게 한다.
마리오티씨는 포르타나 와인을 좀더 색다른 방법으로 양조하는데, 모래땅에서 자란 포도가 갖는 순수한 과일 향과 꽃 향을 스푸만테에 녹이기 위해 노력한다. 레드 와인을 만들 때처럼 침용과 알코올 발효를 거쳐 드라이한 와인이 완성되면, 이를 병에 담아 기포가 생길 때까지 60일 정도 둔다. 이후 12개월간 와인을 효모와 접촉시켜 그 맛이 배어들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듬어진 기포가 연이어 솟아오르며 청량감을 주는 것을 제외하면 체리 향, 후추 향, 타닌, 산미는 영락없이 어린 레드 와인의 그것이다.
▲Nosiola Arlecchino Brut
(생산자:Zeni, 품종:노시올라)
노시올라(nosiola)는 북위 46도 부근에 위치한 트렌티노 주에서만 자라는 품종이다. 북위 46도라면 만주 지역과 동일한 위도이지만 매서운 겨울 추위는 없다. 트렌티노 주의 서쪽, 가르다 호수가 일으키는 온기로 인해 한 겨울에도 올리브와 레몬이 한껏 푸르름을 발한다. 노시올라는 ‘헤이즐넛 열매’란 뜻으로 이 포도로 만든 와인의 주된 향이기도 하다.
제니씨가 포도를 압착하기 전에 탄산가스가 담긴 압력용기에 잠시 두었기에, 와인에서는 호두와 땅콩이 혼합된 구수한 향, 마른 꽃 냄새, 미네랄, 매운 열매를 맺는 식물의 잎 향기가 풍성하다. 와인 레이블의 오른쪽 모서리를 장식하는 색동 모자이크는 아르레끼노(Arlecchino), 즉 어릿광대를 상징하며, 장난기 어린 그의 몸짓을 보고 미소 짓는 관중처럼 마시는 이를 유쾌하게 한다.
▲4478 Noble Effervescence
(생산자:La Crotta di Vegneron 와인협동조합,품종:피노 누아)
알프스의 흰 눈이 녹은 천연수를 마실 때처럼 청량한 느낌의 와인이다. 이탈리아의 최북서 발레다오스타(Valle d’Aosta) 주에 소재한, 알프스의 고봉을 올려다보는 해발 800~900미터의 Saint Denis포도밭에서 자란 피노 누아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 여름에도 카디건을 입어야 할 정도로 서늘한 이곳은 균형잡인 산미의 피노 누아 생산에 적합하다.
햇빛에 잘 익은 구릿빛 색에, 색의 농도만큼 충만함이 입을 가득 채운다. 와인을 잔에 따르는 순간 미네랄, 허브, 노간주 열매, 라즈베리, 알프스의 들꽃 향이 주위를 메운다.
와인 이름의 ‘4478’은 마테호른 정상의 높이이며 1865년에 있었던 다음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발레다오스타 태생의 산악인 카렐(Jean-Antoine Carrel)과 스위스 출신의 윔피(Edward Whympe)는 마테호른 정상 등반을 두고 내기를 한다. 시합 날, 카렐은 이탈리아 쪽 마테호른 암벽을 오르기 시작했고 윔피는 반대쪽인 스위스쪽 마테호른을 타기 시작했다. 윔피는 7월 14일날 마테호른 정상에 올랐고 카렐은 삼일뒤에 도달했다. 4478미터는 비록 내기에서는 졌지만 이탈리아인 최초로 마테호른을 정복했다는 자부심을 표상한다.
▲Bombino D’Arapri Brut
(생산자 D’Arapri Srl.품종:봄비노 비앙코)
알프스 정상에서 남이탈리아의 평원을 달려 네그로 아마로와 프리미티보 와인으로 친숙한 풀리아 주의 봄비노 비앙코를 만나보자. 풀리아 주변의 남동이탈리아에서 주로 재배되는 봄비노 비앙코는, 포도송이의 모양이 팔을 벌린 남자 아이(bambino, 밤비노)와 닮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또한 ‘빚을 갚다’는 뜻의 파가데비트(Pagadebit)라고도 불리는데, 빚을 갚을 만큼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롤라모, 루이스, 울리코의 세 친구가 함께 만든 D’Arapri스푸만테의 특징은 굵은 선, 뚜렷함, 농축미다. 버터 바른 빵을 구운 향, 복숭아, 감귤 향, 12g의 잔당이 녹아 든 산미는 부드럽고 혀를 간질이는 기포는 상큼하게 터진다. 드라이한 맛의 단순함에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 샴페인 방식과 접목 후 드러나는 봄비노 비앙코의 각양각색의 풍미는 다채로움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