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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영 Baek Nan Young (baeknanyoung@hanmail.net)
AIS(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 과정 1,2,3 레벨 이수 후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이탈리아 와인투어 전문기관 바르바롤스쿠올라(BARBAROL SCUOLA)를 운영하고 있다. 베를린 와인 트로피 심사위원이기도 한 백난영은, 이탈리아 와인 및 와인 관련 문화, 행사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와인 관련 전문 통/번역가, 랑게와인 앰버서더(Langhe Wines Ambassador)로도 활동 중이다.
Certified Professional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l President of Barbarolscuola, specialized in Italian Wine & Gastronomic Tour l Columnist of Korean Online Wine Magazine l Member of Judging Panel at: The International Wine Award Mundus Vini, International Wine City Challenge, Emozioni Dal Mondo, Portugieser Du Monde l Blogger l 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l Awarded as Best Foreign Journalist for Roero Win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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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모지오네 달 몬도(Emozioni dal Mondo) 품평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와인들이, 품평회 이튿날 아스티노 수도원에서 열린 시음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는 비가 섞인 안개를 뒤로 밀어내며 플랫폼으로 기차가 도착한다. 스마트폰을 열어 전자티켓에 써있는 열차번호와 칸이 맞는지 확인한 후 열차에 올랐다. 밀라노 중앙역을 느릿느릿 빠져나온 레조날 기차(무궁화호급)가 속도를 내기 시작할 때쯤 스피커에서는 40분 더 가면 베르가모에 도착할거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차창 밖의 짙은 안개속에 뿌옇게 드러나는 식물들의 음영은 음침하고 습기찬 지중해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두 달 전 “에모지오네 달 몬도: Emozioni dal Mondo: Merlot e Cabernet” 품평회 초대장을 받았을 때, 기쁨과 동시에 베르가모에서 이런 행사가 열리는것에 문득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토착 품종의 산실인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메를롯과 카베르넷 계열로 만든 와인의 우열을 가리는 와인품평회가 열린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구심은 곧 이탈리아 와인에 길들여진 나의 입맛을 깨우고 외래품종으로 만든 이탈리아 와인의 현주소를 알고 싶은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베르가모는 중세 때 쌓은 성벽이 옛도심을 포근히 감싸안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성곽이 잘 보존된 몇 안 되는 도시이다. 성곽 안에 있는 도시 치타 알타 (Citta’ Alta)는 인구가 늘어나자 이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치타 바싸(Citta’ Bassa)를 내려다 보고 있다. 치타 알타의 관문인 성문들은 지어질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베네치아 공국의 수호 동물인 사자상 음각이 새겨진 쟈코모(Porta San Giacomo)문은 베르가모에서 만나는 뜻밖의 베네치아다. 쟈코모문에서 그 반대편 에 서있는 알렛산드로(Porta Sant’Alessandro)문까지 나있는 콜레오니(Via Bartolomeo Colleoni) 길은 바로크풍으로 한껏 멋을 낸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에모지오네 달 몬도 품평회는 올해 12회를 맞이하며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롯 품종으로 만든 와인만 심사한다는 점에서 일반 와인 품평회와는 다르다. 발칼레피오 와인콘소시엄의 디렉터이자 양조가인 세르조 칸토니(Sergio Cantoni) 씨가 메를롯과 카베르네 품종을 확산, 보급시키기 위해 시작했으며 베르가모 포도재배자 연합회(Vignioli Bergaschi S.C.A)와 발칼레피오 와인 콘소시움(Consorzio Tutela Valcalepio)이 본 품평회 진행 및 경제지원을 담당한다. 올해는 236종의 와인이 베르가모로 보내졌고 27개 국에서 온 83명의 심사위원들이 이 와인들의 우열을 가렸다.
 
이탈리아 농림부의 인가와 OIV(국제와인 기구) 감독 하에 진행된 본 품평회에서는 금메달, 와인미디어 상(Premio Della Stamp), 웹 어워드(Web Award)를 각각 가려냈다. 금메달을 받은 와인은 71종으로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이스라엘, 아르헨티나, 러시아, 중국, 터키, 헝가리, 슬로베르니아, 세르비아, 독일, 체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와인에 돌아갔다. 세 품종의 종주국인 프랑스 와인은 금메달 리스트에 오르지 못했고 중국과 러시아 와인이 다수를 수상해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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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모지오네 달 몬도 품평회(왼쪽 포스터)는 발칼레피오 와인콘소시움(오른쪽 포스터)의 지원을 받아 2004년부터 개최되고 있다.
 
 
품평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와인의 약 50%(38종)는 이탈리아 와인인데, 5종만 제외하고 모두 북이탈리아에서 생산된 점이 흥미롭다. 또한 메달을 받은 와인은 거의 와인등급에 올라있는데, 40여 년 전만 해도 프랑스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이탈리아 정부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품질이 우수해도 테이블 와인으로밖에 취급 받지 못했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등급와인은 모두 522 종류(DOCG등급 74개, DOC등급 330개, IGT등급 118개)이며 그 중 프랑스 품종으로 만든 와인으로 등급을 갖고 있는 와인은 68 종이다. 여기서 잠시 이탈리아 내의 프랑스품종 와인의 현주소를 살펴보자.
 
이탈리아의 양조용 포도 재배 면적은 총 63만 헥타르로, 그 중 메를롯은 2만 3천631 헥타르, 카베르네 소비뇽은 1만 3천 258 헥타르, 카베르네 프랑이 6천여 헥타르를 차지한다. 이 세 가지 프랑스 품종이 차지하는 총 면적은 4만3천 헥타르인데, 이탈리아 토착품종 중 재배 면적이 가장 넓은 산조베제의 5만 3천 865 헥타르와 비교할 때 이들 외래품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또한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몬테풀차노와 네로다볼라 품종의 재배면적을 합친 4만 3천 900헥타르와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이탈리아에서는 토착품종만 재배할거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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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015년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된 20대 포도품종과 재배 면적(Unione Italiana Vini에서 발행하는 Il Corriere Vinicolo 신문자료 인용)
 
 
이탈리아에서는 세 종류의 프랑스 품종을 블랜딩한 와인을 ‘탈리오 보르돌레제(Talio Bordolese)’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보르도식 블랜딩’이다. Talio(탈리오=블랜딩)는 이탈리아 농부들이 옛날부터 해오던 양조방식 중 하나로, 와인의 맛을 부드럽게 한다든가 좋지 않은 향을 줄이기 위해 장소가 다른 밭에서 수확한 다양한 수령의 포도를 섞어 발효시킨 것을 뜻한다.
 
보르도식 블랜딩은 이젠 너무 흔한 양조방식이 되버렸지만 이 블랜딩을 시도하여 상업화시킨 곳은 토스카나 주이다. &apos수퍼 투스칸’으로 더 친숙한 이 와인은,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와인애호가라도 사씨까이아, 티냐넬로, 오르넬라이아, 솔라이아, 마세토 같은 와인 이름이 입에서 술술 나올 만큼 국제어가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이탈리아식 보르도 스타일 와인을 국제 명품으로 올려놓은 수퍼 투스칸의 주역들은 적어도 8백 년 전부터 토스카나 와인의 명맥을 이어온 토착 명문귀족들이다.
 
수퍼 투스칸 와인이 이탈리아의 아이콘 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엄격하게 말해 이탈리아 와인은 아니란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탈리아 토양에서 자란 보르도 품종을 세계인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수퍼 투스칸보다는 이탈리아의 토양과 기후를 담아낸 와인이 더 이탈리아 와인답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에모지오네 달 몬도 품평회에서 수상한 와인들은 산미가 높고 덜 다듬어진 타닌이 입안에서 겉돌기도 하지만 싱그러운 과일 향이 놀랍도록 순수하다. 또한 와인을 숙성시키는 나무도 밤나무, 아카시아, 체리나무 등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며 오크통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개별 생산자의 노하우와 손맛이 스며있는 거침없는 카베르네 와인을 마시면서 우리의 오감은 자유롭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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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품평회가 열렸던 팔라쪼 마에스트리 궁(1790년대 건축물)
 
 
이탈리아 와인생산자들이 프랑스 품종에 갖고 있는 불편함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는 아마도 안젤로 가야와 다마지 와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부친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안젤로 가야가 네비올로 나무를 뽑아내고 카베르네 소비뇽 나무를 심었는데, 집에 돌아온 부친이 이걸 보고 “다마지!” (“맙소사”라는 피에몬테 방언)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일화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고, 가야를 이단아라고 불렀던 피에몬테의 동료들은 랑게 언덕에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롯은 물론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같은 품종까지 재배하고 있다.
 
이탈리아 에노테카(와인 샵)에서는 피노 누아나 샤르도네로 만든 스푸만테가 베르멘티노, 베르디끼오, 가르가네가 등의 토착품종으로 만든 스푸만테보다 더 인기있고 비싼 가격에 팔린다. 2011년에는 세 가지 프랑스 와인 품종이 주가 되는 몇 종의 와인(Suvereto, Val di Cornia Rosso, Colli di Conegliano와인 등)이 DOCG 등급으로 지정되면서 토착품종 일색의 등급 보수주의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이런 추이를 보면서, 재배하기 쉽다는 이유로 또는 팔기 쉽다는 핑계로 카베르네나 메를롯에게 토착 품종이 양지 바른 언덕을 양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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