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품평회 초보 심사위원으로서의 나의 경험기
이유 없이 와인이 좋다 보니 와인을 직업 삼아 사는 사람이 어디 한 두 명이겠는가! 필자의 경우, 한때 인연을 맺었던 관광업계에서의 경험과 와인에 대한 열정이 만나니 와이너리 투어 조직과 운영을 아예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방문 예약 때문에 와이너리와 지루하게 주고받는 이 메일들, 일정관리 및 차량섭외, 이동거리 계산을 하다 보면 와인에 대한 열정이란 초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와인 병이 병모양을 닮은 지갑처럼 보이게 된다. 와인을 핑계 삼아 꾸려 가는 타산적인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원초적 순간이 있는데, 바로 와인품평회의 심사위원으로서 와인 병에 담긴 내용물만 순수하게 대면할 때이다.
직업상 와인생산자를 일대일로 만나서 눈을 맞추어 가며 설명도 듣고 이런저런 소감을 나누지만, 심사위원 역할은 와인 생산자들의 결실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간접적 만남으로 일의 연장인 셈이다.
필자의 심사위원으로서의 첫 경험은 베를린 와인트로피(Berlin Wine Trophy)로 2년 전 겨울 주최측인 독일와인 마케팅사(DWM)로부터 초청장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초청장을 받고 들뜬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한참이나 걸렸던 그 순간을 그 후로도 네 번 더 경험하는 행운을 누렸다.

베를린 와인트로피는 1994년 처음 개최되었고 6년 뒤에는 출품하는 와인의 수가 7500여종에 달하는, 세계 5위 안에 꼽히는 굴지의 와인 품평회로 성장했다. 늘어나는 와인의 수를 모두 소화하기 위해 2010년부터는 매년 두 차례(2월 달, 7월 달)에 나누어 개최하고 있다. 2012년에는 모체인 베를린 와인트로피에 아시아 와인트로피(Asia Wine Trophy), 2014년에는포르투갈 와인트로피( Portugal Wine Trophy)가 각각 추가되어 명실공히 와인 트로피의 대륙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심사를 몇 번 가다 보니 스스럼없이 지내게 된 심사위원 선배도 생겼다. 이들은 필자를 다른 와인품평회에 추천해 주어 와인 심사의 매력에 눈뜨게 했다. 그 중 한 분은 헝가리 출신 의 와인 저널리스트인 요셉 코사르카(Jozsef Kosarka)로, 2015년 한 해만 무려 17군데의 와인품평회 심사위원으로 초대된 와인심사의 달인이다. 또 다른 인연은 엔조 조르지(Enzo Giorgi)로 Citta’ Del Vino 와인협회 리구리아주 조정관이자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AIS) 와인강사다.
필자가 참가했던 와인품평회는 OIV(국제와인기구)에서 승인하는 와인평가방식을 채택해서 와인을 평가, 심사하고 그 기준을 통과한 와인에 메달을 수여한다. 이 평가 방식의 핵심은 OIV의 점수표(Score Sheet) 이며, 10개 항목으로 와인을 심사하는 드라이 와인(still Wine)용과 여기에 탄산가스의 상태를 평가하는 항목을 추가해 총 11개의 항목을 심사하는 발포성 와인(sparkling wine sheet)용으로 나뉜다.
독일와인 마케팅사가 채택해서 세군데 와인트로피와 함께 사용하는 OIV점수표를 예로 들어 보자. 아래의 점수표는 드라이와인 심사용으로 세로축의 첫 두 열(적색)은 감각 기관의 종류와 해당 기관별로 평가하는 항목을 나열하고 있다. 그 옆의 일련의 다섯 개 열(노란색)은 심사위원이 와인을 시음한 후의 느낌을 숫자로 환산해서 “X”표시하는 곳이다. 첫 번째 열은Excellent , 두 번째 열은 Very Good, 그리고 Good, Fairly, Insufficient순으로 점수가 낮아진다. Excellent 열 근처에 X표가 많은 와인은 Grand Gold, Gold, Silver메달 후보가 될 확률이 높으며 반대로 Insufficient열 부근에 X 표가 많은 와인은 그만큼 메달에서 멀어지게 된다.

너무나 분명하고 단순한 원리로 와인이 평가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심사위원 개개인의 날카로운 감각 훈련 수준과 과거에 시음한 와인의 수량 및 타입이 심사과정에 반영되기 때문에 시음하는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다. 표면상 심사위원이 와인을 평가하지만 매번 와인을 시음할 때마다 심사위원의 역량이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상 심사위원 자질이 잣대에 오르는 셈이다.
평가하는 와인이 심사위원에게 익숙한 와인이라면 확신을 갖고 평가를 하지만 마셔본 적도 없고 처음 들어보는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라면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지 막막한 경우도 있다. Airen, Grasa de Cotnari, Nicht Angegeben이란 품종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품종의 유전적 특성상 어릴 때 가볍게 부담 없이 마시는 와인을 심사할 때 나의 감각기관은 주저 없이 은메달감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적절한 양조방식을 사용해 품종의 특성이 제대로 드러난 이 정직한 와인은 금메달 자격이 있지 않을까 싶어 순간 고민에 빠진다.
와인품평회는 와인의 공정한 심사와 심사위원들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본연의 목적 외에도, 특정 와인지역과 그 지역의 특수한 환경을 세상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도 한다. 와인선배의 소개로 가게 된 ” Selezione del Sindaco ”가 그랬다. 본 품평회는 올해 5월 초 라퀼라(L’Aquila, 남이탈리아 아부르조의 주도)에서 열렸는데 이곳과 그 주변도시는 2009년에 강도 6.3의 지진이 강타해서 309명이 사망, 1600여명이 상해를 입은 곳이다.

복구 노력이 꾸준히 있었지만 워낙 피해가 커서 복구작업은 늦어지고 있으며 벽에 심하게 금이 간 건물들은 임시 철근구조로 연결시켜 간신히 붕괴만 지연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지진은 주변의 몬테풀차노 와인지역도 덮쳐 상당수의 생산 및 숙성시설이 손상되었고 최근에야 생산활동이 정상 궤도에 올랐다. 전세계에서 온 와인심사위원들은 와인피해 지역의 복구 작업 촉구와 몬테풀차노 와인생산자들의 품평회 참여를 유도해 천재지변 이후로 더욱 향상된 품질의 몬테풀차노와인으로 이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헝가리의 남서부에 소재한 Pècs 시의 Zsolnay Cultural Quarter에서 2014년부터 열리는 “ Portugieser Du Monde” 는 한 품종만 집중적으로 평가하는 품평회다. 중부유럽에서 생산된 포르트기저(portugieser) 와인 전문 품평회로 Young Portugiesers(생산 후 1년 내 와인) 부문과 Vintage Portugieser(생산 후 2년 이상된 빈티지) 부문으로 나뉘어 심사한다.

포르트기저 와인은 짙은 보라빛과 농익은 붉은 과일, 꽃 향기, 후추 등의 향신료 향이 매력적인 레드 와인으로 생산량의 90%는 양조 후 2~3년 이내에 소비되며 포도가 풍작인 해의 빈티지는 10년 이상 숙성시킨다.
품평회는 이틀 동안 열리며 포르투기저 와인과 관련된 이벤트 행사로 풍부하다. 헝가리의 주요 포르트기저 와인 생산자 방문 및 품평회에 와인을 출품한 생산자들이 주최가 되어 열리는 포르트기저 시음회 및 메달 수여식으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