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르데냐섬의 에메랄드빛 바다는 이탈리아인의 최고 여름 휴양지다(위 사진).필자가 사는 동네의 여행사 쇼윈도에 여름이면 걸리는 사르데냐섬 포스터를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포스터 안의 모델이 누워있는 해변의 주인공이 될테야"라는 희망을 품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꽁꽁 묻어두었던 그 꿈이 이루어져 푸른 바다 속으로 다이빙할 날을 맞게 되었다.
사르데냐가 고향인 친구에게 나의 소망을 털어놓자, 6월말에서 7월초는 비수기라서 관광객이 적고 항공요금도 저렴하니 당장 시도해보라고 하는게 아닌가. 바닷물이 따뜻해지기 때문에 해수욕하기에 적당하다는 말과 함께, 친척집에서 멀지 않은 B&B(조식과 침대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숙소)를 소개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곧장 항공권 할인 사이트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비수기라도 이미 항공권 좌석이 90% 이상 예약되어 있었고 검색하는 순간에도 예약 가능한 좌석이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정년 퇴직한 노부부나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이 비수기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고객층이었다.
친구의 조언과 항공권 예약을 고려해서 고른 사르데냐섬의 목적지는 술치스(Sulcis) 지방으로 사르데냐섬의 남서쪽에 위치한 외진 곳이다. 관광객이 많은 곳을 피하고 싶기도 했지만 예전에 맛있게 마신 까리냐노 와인의 기억이 이곳을 점찍은 이유다. 또 한번 나의 이탈리아 여행은 와인을 만나러가는 와인여행으로 둔갑했다.

사르데냐에 도착한 첫날부터 여행사 포스터 모델처럼 하얀 모래밭에 누워있는 나의 멋진 모습은 포기해야 했다. 기온이35도가 넘는 한낮에는 피부에 화상을 입지 않으려고 열심히 그늘을 찾아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바닷가에서는 태양이 움직일 때마다 파라솔 딸린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그늘 아래 숨었다. 아래 사진은Is Arenas Biancas 해안으로, 사르데냐섬에서 가장 긴 백사장 중 하나다.
반면 밤과 이른 아침에는 기온이 17~18도로 뚝 떨어졌는데, 얇은 옷 밖에 없어 동네 옷가게를 기웃거리며 긴 팔 윗도리를 사야 했다. 이렇듯 널뛰는 기온은 체온조절에 둔감한 내 몸에 도전처럼 느껴졌다.

3일째가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햇빛이 가장 뜨거운 오후 1~5시에는 해변의 파라솔 아래 또는 시원한 호텔에서 낮잠을 자고, 해풍이 불기 시작하는 오후 5시경부터 커피숍에서 시원한 스피릿 칵테일이나 베르멘티노 와인을 마시면서 초저녁을 맞는 것이 이곳의 여름 관습이란다. 그래서인지 레스토랑과 커피숍을 제외한 상가 입구에는 “오후1~5시 영업중단”이란 안내판이 걸린 채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하루는 미스트랄(mistral, 프랑스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이 불어와 해수욕을 할 수 없었다. 초속 15-20 미터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 때문에 바다가 심하게 출렁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탄티오코(SantAntioco) 섬으로의 짧은 여행으로 그날 일정을 대신하기로 했다. 산탄티오코섬은 사르데냐섬에 속한 부속섬으로,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배편을 이용하지 않아도 갈 수 있기 때문에 본섬(사르데냐)에 실증 난 관광객들이 기분전환지로 선호하는 곳이다.
산탄티오코로 불어오는 거센 미스트랄은 무화과와 올리브나무를 뽑아버릴 기세였다. 그런 미스트랄을 온몸으로 버티어내고 있는 포도나무가 눈에 들어왔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땅에 납작 엎드린 것처럼 보였다. 거센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땅은 흰모래사장으로, 먹음직스런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녹색의 백련초로 둘러쳐진 울타리와 이국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위 사진의 포도나무는 까리냐노(carignano) 품종으로, 흙의 결합력이 약한 흰모래밭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포도나무뿌리진디의 위협이 거의 없다. 까리냐노 품종은지중해를 면하고 있는 여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나라별로 다른 이름을 가진다. 사르데냐에서는 카리냐노, 프랑스에서는 Carignane Noire, Mollard, Girarde, 스페인에서는 Carinena, Mazuela, 사르데냐 외의 이탈리아(마르께와 토스카나)에서는Legno Duro로 불린다.
까리냐노 포도나무를 보고 나니 까리냐노 와인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다. 포도밭에서 멀지 않은 어촌 칼라셋타에 갔는데, 쪽빛 바다에 흰 요트가 떠있고 해풍이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길을 낸 골목에는 흰색 회칠을 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축제가 있었는지 골목마다 바다빛과 흡사한 깃발도 걸려있었다.

그리스 산토리니섬의 하얀집을 닮은 바에 들어가 까리냐노 한 잔을 시키니 냉장고에서 꺼낸 와인병에서 따라준다. 와인을 따르는 솜씨를 보니,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차갑게 마시면 타닌이 강하게 느껴지고 와인의 향이 제대로 피어나지 못한다는 상식쯤은 알고있을법 했다.
와인을 따르는 그의 능숙함은 그저 반복적인 일에서 오는 기계적인 습관이겠거니 하고 김이 서린 잔에 담긴 까리냐노를 입에 가져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갈증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청량감에 온 몸이 서늘해지는 것이 아닌가! 타닌은 또렷했고 향기는 냉기에 눌려 있었지만, 차가운 레드 와인이 주는 서늘함의 비상식은 상식을 비웃고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술치스의 와인숍이나 동네 수퍼에 진열되어 있는 와인은 실온과 같은 35도에서 보관된다. 그리고 필자가 간 어촌의 바처럼 규모가 작은 곳에는 변변한 셀러가 없기 때문에 더위로부터 와인의 변질을 막는 유일한 자구책은 냉장보관이다. 더욱이 차가운 까리냐노 와인의 냉기는 더위에 지친 이방인들의 목을 타고 온몸으로 흐르니, 실온의 레드 와인이 오히려 비상식인 셈이다.
아래 사진은사르데냐섬의 특산물 중 하나인 코르크 장식품. 이곳에서는 코르크를 가공해 다양한 장식품을 만든다.

까리냐노 품종이 사르데냐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둘로 나뉜다. 첫 번째 의견은 페니키아인이 사르데냐에 상륙한 3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니키아인이 첫 식민지를 건설했던 곳은 Sulcis 마을이었고 지금의 산탄티오코 섬에 위치한다. 페니키아인의 지배력은 본섬인 사르데냐 남서부로 확장되었고 이들이 들여온 까리냐노 품종의 보급도 식민지 확장속도와 일치했다.두 번째 의견은 16세기 스페인의 아라곤 왕조가 사르데냐를 지배했던 시기로 보는 설이다. 이 설의 근거는 사르데냐 방언에서 찾을 수 있는데, 까리냐노를 “Axina de Spagna"로 불렀고 이는 "스페인 포도"란 뜻을 가진다.
까리냐노 포도밭은 카르보니아-이글레시아스(Carbonia-Iglesias)와 Cagliari(칼리아리) 현에 속하는 17군데 마을에 모여있다. 술치스 지방은 바다의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내륙 언덕에 위치한 몇 군데 마을, 그리고 지속적인 해풍과 사막처럼 건조한 여름기온 그리고 바다의 짠 습기 영향을 받는 해안 마을로 양분된다. 필자가 반나절을 보냈던 산탄티오코섬의 까리냐노 포도밭 환경은 술치스 지방의 포도밭을 축소해 놓은 거울인 셈이다.
내륙쪽에서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까리냐노를 재배하지만 해안 쪽 마을은 옛날 로마 농부들 방식대로 과일 나무(알베렐로, alberello latino)처럼 키운다. 키가 사람의 무릎 높이로 자라 해풍을 덜 맞기도 하지만, 나뭇잎 수가 적어 건조한 여름의 불필요한 수분증발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까리냐노는 술치스 지방의 1700여 헥타르에서 재배되지만, 사막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생산량이 낮고 고품질의 카리냐노 와인은 Carignano del Sulcis DOC 뿐이다. 사르데냐의 다른 지역에서 만드는 까리냐노 와인은 IGT della Sardegna이며, 다른 토착 레드 품종과 섞어 만들기 때문에 카리냐노 고유의 맛과 향이 희석된다.
술치스에서는 갓 딴 포도로 드라이, 로제, 햇와인을 만들며 햇빛에 건조시켜 달콤함이 농축된 파시토 와인도 만든다. 드라이 와인은 5개월간 숙성하면 짙은 루비색을 띄는데 2~3년 지나면 차분하고 투명한 루비색으로 변한다. 방금 딴 검붉은 과일향과 막 자른 잔디의 풋풋한 향기가 피어나며, 와인이 투명한 루비색이 될 즈음에는 향신료의 향이 같이 난다. 타닌은 입안을 꽉 채우지만 부드럽게 혀를 적시며 톡 쏘는 산미는 알코올의 매끈함과 결합해 상큼함으로 와 닿는다.

▲메사 와이너리의&apos까리냐노 델 술치스’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