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이탈리아 와인규정 중에 'Menzione geografiche aggiuntive’라는 항목이 있다. 이는 특정 등급(DOC)을 가진 와인에만 해당되는데, 포도밭이 이 항목에 등록되어 있으면 와인이름과 함께 포도밭 이름을 나란히 표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지역명칭 추가’라는 뜻으로 '크뤼’로 해석한다면 이해가 더 빠르다. 피에몬테주의 대표적인 와인 바롤로 다음에 카누비(Cannubi), 몽프리바토(Monprivato), 부르나테(Brunate), 지네스트라(Ginestra), 폰타나프레다(Fontanafredda) 같은 유명한 포도밭 이름이 따라온다던가, 바르바레스코 앞뒤로 아시리(Asili), 마르티넨가(Martinenga), 라바야(Rabaja), 갈리나(Gallina) 같은 포도밭 이름이 붙는 경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바롤로 와인을 흠모하는 와인 애호가라면 한 번쯤 마셔봤거나 마셔보길 희망하는 와인은 바로 카누비(Cannubi)와 나란히 오는 바롤로일 것이다. 카누비 포도원은 1500년 대에 지어진 팔레티(Falletti) 후작 가문의 주거지였고, 현재는 주립에노테카와 와인 박물관(WIMU)이 소재하는 '팔레티 바롤로(Castello Falletti di Barolo)성’을 정상에 두고 있는 바롤로 마을 북쪽에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이다.

 

 

지라포조(girapoggio) 방식에 따라 포도나무가 동서로 배열된 모습은 마치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는 남자아이의 가지런하게 잘 빗은 머릿결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필자는, 한 여름에도 서늘해서 얇은 카디건을 걸쳐야 할 만큼 높은 곳에 있는 포도밭이라야 우수한 와인을 생산한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누비 언덕은 이런 믿음이 융통성 없는 선입견일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필자의 태도를 보다 유연한 절충식으로 바꾸어놓았다.

 

키 재기 하듯 우뚝 솟은 언덕(예를 들어 라모라La Morra, 세라룽가 달바Serralunga d’Alba, 몽포르테 달바Monforte d’Alba, 카스티리오네 팔레토Castiglione Falletto 마을)에 비해 아담한 크기의 카누비 언덕을 옛날에 한번이라도 보았다면, 또한 이 높은 언덕들 덕분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칼날 같은 바람과 서리로부터 카누비 언덕이 보호받는다는 말을 귀담아 들었다면, 포도밭의 고도와 와인의 품질이 비례할 거라는 필자의 풍수지리설이 허술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을 것이다.

 

카누비는 좌우가 긴 타원형 언덕으로 총 15헥타르의 포도밭으로 덮혀 있고, 해발은 바롤로 마을 정상보다 약간 낮은 250m다. 포도밭이 모두 동쪽과 남동 방향을 향하고 있어, 이곳에서 자라는 네비올로는 하루 중 온도가 가장 낮은 아침 일찍부터 정오까지 햇살을 듬뿍 받는다. 15헥타르 남짓한 카누비 언덕을 약 20여개의 와이너리가 소유하고 있는데, 그 중 체레토, 다밀라노, 파올로 스카비노, 마르케시 디 바롤로, 보르고뇨 와이너리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카누비의 고수들이다.

 

 

지금이야 카누비는 바롤로 와인 레이블에 쓸 수 있는 190여 개의 포도밭 이름 중 하나지만, 1844년 이전만 해도 랑게 심장부에서 나는 우수한 와인을 대표했다. 즉 카누비는 18세기 바롤로의 상징이었다. 한편 카누비 와인이 바롤로라는 용광로에 녹아들게 된 것은 줄리 콜베르 팔레티(Juliette Colbert Falletti) 후작 부인의 활약 때문이다. 그녀는 루이14세 때 재무부 장관을 지낸 콜베르의 증손녀였는데, 외교관 신분으로 파리에서 근무하던 카를로 탄크레디 팔레티(Carlo Tancredi Falletti) 후작과 결혼했다. 팔레티 후작은 바롤로 마을과 그 주변에 거대한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고, 당시 그곳에서 재배된 네비올로로 만든 와인은 달콤하고 약한 기포를 지닌 와인이었다.

 

 

파리의 상류층 집안에서 자라 보르도 와인에 익숙했고 와인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던 그녀는, 배우자의 영토에서 난 네비올로에 보르도 와인양조방식을 접목시킨다면 보디감과 풍미가 개선될 것이라 믿었고. 결국 고향에서 양조가를 불러와 다양한 실험을 거친 후 타닌이 두드러지며 드라이한 맛을 지닌 네비올로 와인양조에 성공했다.

 

이렇게 재탄생한 네비올로의 맛이 대단하다는 소문은 사르데냐 왕국의 카를로 알베르토 왕에게까지 들어갔고, 후작 부인은 네비올로로 가득 채운 600리터짜리 보테(botti, 나무통) 300통을 수레에 실어 왕의 거처가 있는 토리노로 보냈다. 와인의 맛에 반한 왕은 즉시 그린자네(Grinzane) 마을에 왕실용 포도밭을 구입하게 한 후 오직 왕을 위한 네비올로 와인을 만들게 했고, 새로 구입한 포도밭이 있는 마을을 다스리던 카밀로 카브루(Camilo Benso Cavour) 백작에게 임무를 맡겼다. 백작은 부르고뉴 출신의 양조가 루이 오다(Louis Oudart)와 함께 와인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병입과 코르크 마개를 도입하여 와인의 변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카브루 백작의 업적도 상당했지만, 새로운 네비올로 와인의 이름에는 후작 부인의 그것이 다분히 반영되었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 그녀가 네비올로를 재탄생시켰던 바로 그 바롤로 마을의 이름이 와인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바롤로 와인은 사르데냐 왕국 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이들이 유럽왕실을 방문하거나 각국 귀족들이 궁을 방문할 때마다 만찬와인으로 등장해'왕의 와인’ 또는'와인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레이블에 '바롤로’만 표기된 와인보다 '카누비’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바롤로 와인의 경우 가격이 2-3배 이상 높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와인 진열대에서 사라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카누비 와인 = 균형 잡힌 맛”이라는 등식 때문이다. 실제로 카누비 와인은 다른 바롤로에 비해 (레드와인의 주요 성분이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주기도 하는) 산도와 타닌이 부드럽고, 알콜이나 폴리알콜(polyalcohol) 등 매끈한 질감을 주는 성분과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장점은 네비올로 포도나무 뿌리가 카누비로부터 흡수하는 독특한 토양성분이 만들어낸 합주곡이다. 카누비 토양은 주로 산타가타(Sant’Agata, 이회토)로 구성되는데, 토르토니아노와 엘베지아노 이회토가 골고루 섞여있다. 탄산마그네슘과 탄산망간 성분이 풍부한 석회암 지형으로 토질이 차갑다. 엷은 하늘색과 회색이 도는데 멀리서 보면 눈 덮인 밭으로 착각될 정도다.

 

 

토르토니안 토양의 장점을 취한 카누비 와인은 갓 출시된 바롤로라도 잘 짜인 구조감을 지니며 짙은 체리와 장미 향을 발산하고 타닌, 산도 등 모든 요소가 화음을 이룬다. 한편 엘베지아노 토양은 와인에 장기숙성 잠재력을 부여하는데, 15~2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어떤 뜻 깊은 날 마개를 열었을 때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와 같은 '땅 예찬론’에 더하여, 몇 대째 카누비 와인을 만들어온 바롤로의 고참 E. Pira & Figli 사의 키아라 보스키스(Chiara Boschis) 사장은 토박이 농부들의 숨은 공도 있음을 다음과 같이 넌지시 비친다.

 

“마력이 굉장한 엔진을 장착한 페라리도 운전자가 경험이 많아야 제 능력을 발휘합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와인을 만드는 몫의 70%는 포도밭에서, 나머지 30%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 토양을 본능처럼 느끼는 (그래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경험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토박이 농부라는 인간적인 요소에서 옵니다. 즉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