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C 와인을 아시나요 [4]
콜리오(Collio) DOC: 두 번째 이야기
※제목의 3C란 Colli Orientali del Friuli DOC, Carso DOC, Collio DOC 지역을 말함.
글, 사진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리볼라 잘라(Ribolla Gialla) 와인
리볼라 잘라는 COF와 콜리오 언덕에서 주로 재배되며 콜리오 언덕에서만 총 315 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생산된다. 햇빛이 잘 들고 바람도 적당히 부는 언덕에서 잘 자란다. 포도껍질은 얇아 터지기 쉽고 비가 많이 오는 해에는 곰팡이가 생기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병충해에 강하다. 리볼라 잘라100%로 양조했을 때 와인은 녹색빛이 살짝도는 볏짚색을 띠며, 드라이한 맛과 산미가 맵시있게 어울린다. 중간정도의 보디감에 강한 향이 나지만 코의 피로도를 높이지는 않는다.
콜리오에서는 보통 프리울라노(토까이), 말바시아 이스트리아나 등의 화이트품종과 블렌딩해서 콜리오 비앙코(Collio Bianco) 와인을 만드는데, 풍미가 좋고 조화로운 향기를 지니며 오래 숙성시킨 후 마시면 좋다. 또한 샤마(Charmat, 와인이 탱크에서 2차 발효를 거친 뒤 병입될 때 압력을 가하는 방식) 방식으로 만드는 브륏 스푸만테(Brut Spumante)도 생산하는데, 프리울라니(프리울리 시민)들은 이웃 베네토주에 생산되는 같은 타입의 프로세코 와인과 비교해 손색 없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1200년경부터 이곳에서 재배되었다는 리볼라 잘라는, 새 총독 부임할 때마다 로삿조(Rosazzo) 마을에서 열던 환영만찬에 꼭 오르던 축배주였다. 이 품종이 프리울리에 전달된 경로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리스 이오니아 제도의 달마티아 지방에서 재배하던 것을 베네치아인들이 유럽에 전파했다고 한다. 슬로베니아에서도 재배되며 ribolla gialla, rebolla, ribolla, ribolla bianca, raibola, ribuole, ribue’le, rebula 등으로도 불린다.
중세시대에는 우수한 와인으로 알려졌으나, 레드와인을 선호하던 지역 주민들로부터 냉대를 받아서 생산량의 대부분이 오스트리아로 수출되었다. 수출용 와인은 주로 달콤한 맛을 지녔는데 -지금의 잔당기준으로 한다면 dolce(스위트)나 amabile(미디움 스위트) 정도- 이는 발칸반도 민족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상술이기도 했고, 당시 부족했던 양조기술로 인해 알코올로 변환되지 못한 잔당이 남았기 때문이다.
한편 리볼라 잘라 와인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늘어나는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상업적인 대규모 생산이 이루어졌고, 포도가 자라기에 부적합한 곳에서까지 마구잡이로 재배되는가 하면, 조기수확, 잦은 여과와 정제, 획일적인 배양효모의 사용 등으로 천편일률적인 맛의 개성없는 리볼라 잘라 와인이 유통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외면하지 않고 와인의 평판을 우려하던 소수의 생산자들은 마침내 리볼라 잘라 와인의 실체를 되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90년대 중반 콜리오 언덕의 동쪽 끝 마을 오스라비아(Oslavia)에서 시작되었는데, 수백 년 동안 콜리오 언덕에서 만들어졌던 방식으로 리볼라 잘라 와인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와인은'오스라비아 내추럴 와인’ 또는'오렌지 와인’으로 알려졌고, 라디콘 와이너리 소유자인 스타니스라오 라디콘(Stanislao Radikon)이 최초로 시도했다.(자세한 내용은 '기원전으로의 회귀, 암포라 와인’ 참고)
라디콘이 구현하고자 하는 과거의 리볼라 잘라 와인은, 포도수확량을 과감히 줄이고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즉'포도밭에서의 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개혁은 양조 과정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화이트와인 양조에 레드와인 양조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머스트(발효 전 또는 발효 중의 포도즙)가 포도껍질과 접촉하는 침용기간을 늘리고, 양조장에 자생하는 야생효모로 발효를 일으킨다. 이 때 양조자가 개입하는 유일한 순간은, 온도조절장치도 없는 개방형 발효통에서 껍질과 머스트를 섞어주는 때 뿐이다. 여과와 정제, 아산화황 첨가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라디콘의 실험정신은 요스코 그라브너(Josko Gravener)와 니코 벤사(Nico Bensa)에게 영향을 주었고, 동지가 된 그들은'오스라비아 트리오(Oslavia Trio)’라고 불렸다. 이 트리오는 발효/숙성 용기의 재료와 크기는 고려할 점이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보테, 바리크, 암포라, 시멘트 용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또한 니코 벤사는 와인의 침용기간을 8일로 제한하는 한편, 라디콘과 그라브너는 6~7 개월씩 놔두기도 했다. 이렇듯 급진적인 화이트와인 양조방식은 레드와인과 흡사한 화이트와인을 탄생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콜리오의 다른 화이트 품종(샤르도네, 소비뇽 블랑, 피노 그리죠, 리슬링)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이트와인은 레드 와인처럼 15~16도의 온도로 마신다. 와인은 쉐리의 올로로소와 비슷한 투명한 갈색을 띠는데, 짙은 오렌지 껍질색을 띠기도 한다. 모과나 서양배에 설탕을 넣고 끓인 냄새가 레몬이나 자몽 향과 섞여 나고, 딱히 구분하기 어려운 미네랄 향기와 코코아, 페인트, 가죽냄새도 같이 난다. 긴 침용기간 때문에 걸죽해진 와인을 마실 때는 마치 고기 씹는 기분이 들지만, 그렇다고 씹을 필요는 없다. 약간의 쓴맛은 일반적인 리볼라 잘라 와인의 맛을 떠올리게 하며, 입안을 조이는 타닌은 작지만 튼튼하게 지어진 집을 연상시킨다.
피노 그리조(Pinot Grigio)
피노 그리조 와인은 프리울리주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 가장 수출이 많이 되며, 생산량의 80%가 미국, 영국, 중국, 일본에서 소비된다. 프리울리주에서 이 품종이 재배되는 면적은 약 5110헥타르로, 이곳의 11개 DOC 와인에 쓰이면서 감초같은 역할을 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피노 그리조는 피노 그리(프랑스어)와 동일한 품종이며, 피노 블랑처럼 피노 누아의 돌연변이다. 피노 그리조와 피노 그리는 둘다 발음이 비슷하고 뜻도 같다(grigio와 gris는 '회색’을, pino는 '솔방울’을 뜻함). 이 때 '회색’은, 적포도와 청포도의 중간 정도되는 색 또는 분홍빛 도는 회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 양조기법이나 와인의 맛이 레드와 화이트와인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피노 누아만큼은 아니지만, 그 변종인 피노 그리조 역시 재배가 비교적 까다롭고 날씨에 민감해서, 고향인 부르고뉴처럼 기후가 서늘한 곳에서 잘 자란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의 날씨가 서늘한 북부에서 주로 재배하며 상당한 성과도 거두고 있다. 트렌티노-알토아디제주(이탈리아 최북단에 있는 주)에서는 포도가 다 익은 후에 바로 수확하지 않고 수확기를 늦춤으로써, 황금빛을 띤 볏짚색이 나는 드라이한 피노 그리조 와인을 만든다. 한편 롬바르디아주와 베네토주에서는 압착한 껍질과 머스트를 몇 시간 접촉시킨 뒤 발효시켜 로제와인을 만들거나, 기포와 함께 신선한 향이 발산되는 약발포성(프리쟌테) 또는 스푸만테 타입의 와인을 만든다.
콜리오 언덕과 COF언덕에서 생산하는 피노 그리조 와인은 일광욕에 살짝 그을린 피부색을 연상시킨다. 마른 풀, 아몬드, 발삼, 미네랄, 호두껍질 향이 나며, 7~8년 정도 숙성시키면 더 마시기좋은 와인으로 거듭난다. 모래나 자갈 함량이 높은 중부와 남부 프리울리의 토양에서 만들어진 피노 그리조 와인은 하얀꽃과 막 딴 과일 향이 난다.
피노 품종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1600년대로, 현재 프랑스에서는 알자스 지방 외에는 소량만 생산된다. 이탈리아에는 1820년경 피에몬테주의 알레산드리아와 쿠네오 지방에서 처음으로 재배되었으며, 1850년대부터 프리울리주를 비롯한 다른 북이탈리아 전체로 확산되었다.
피노 품종이 이탈리아의 다른 곳보다 프리울리주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된 것은 1863년 이후로, 이는 페칠레(Pecile) 상원의원의 남다른 피노 사랑 때문이었다. 프리울리의 토양과 기후에 피노 품종이 알맞다고 확신한 페칠레 의원은, 포도밭을 가진 농부들에게 이 품종을 적극추천했다. 피노 비앙코(피노 블랑과 동일)와 피노 그리조 품종은 그의 기대처럼 프리울리에 잘 적응했지만, 피노 누아의 경우 현재까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39년에 농학자 귀도 포지Guido Poggi’는 그의 저서 “프리울리 포도품종 백과사전Atlante ampelografico”에서, 피노 품종은 프리울리주에서 재배하기 적합하고 부르고뉴에서 생산된 피노 와인에 견줄 만큼 품질이 우수하다고 언급했다.
프리울리주의 어디에서 생산되었든 간에, 적절한 산미와 입안에 오래도록 남는 다양한 풍미는 피노 그리조 와인이 사랑받는 이유다. 특히, 향신료나 강한 소스를 많이 쓰는 인도와 멕시코 레스토랑의 와인리스트에는 단골손님이다. 와인의 맛을 압도하는 레몬이나 식초가 주요 재료가 되는 요리, 또는 붉은 색 소스의 강한 맛을 지닌 요리가 아니라면 무난하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프리울리산 피노 그리조 와인 한 병쯤은 집에 비상용으로 준비해두면 좋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고 센스있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요리할 것도 마땅치 않은데 갑자기 친구들이 방문한 경우를 상상해 보자. 엉겁결에 있는 재료를 총동원해서 뚝딱 요리를 만들었지만, 뭔가 허전하고 무엇과 마셔야 될지 걱정된다. 이 때 비상시를 대비해 사다 놓았던 피노 그리조 와인을 기억해 낸다면 더 이상 고민은 없다. 와인의 다양한 향과 맛이 급조된 음식맛을 보충해줄 뿐만 아니라, 피노 그리조의 긴 여운처럼 친구들과의 우정도 오래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레포스코 달 페둔코로 로쏘(Refosco dal Peduncolo Rosso)
이탈리아인들은 독일어 단어가 길다고 투덜거린다. 두 단어가 하이픈(-)도 없이 길게 연결되어 있어, 숨쉴 곳을 모른 체 읽어야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불평은 무색하지 않을까 싶다. 한 줄의 반을 차지하는 이 포도품종 이름을 읽어야하는 한국사람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프리울리주에서 레포스코 달 페둔코로 로쏘(이하 레포스코) 품종을 재배하는 면적은 927헥타르로, 카르소(Carso, 프리울리주 최남동) 지역을 제외하고는 언덕과 평지, 바다 연안에서 골고루 잘 자란다. 껍질은 두껍고 과분이 두껍게 껴있으며, 질병에 강하고 수세도 좋아 특별히 기상조건이 나쁜 해가 아니면 생산량이 일정하다. 이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진한 루비색을 띠며 숲에서 막 따온 듯한 블랙베리, 블루베리, 블랙커런트 향이 난다. 중간 정도의 보디감에 타닌이 강하지 않아, 와인을 막 좋아하기 시작한 초보자라도 마시기에 좋다. 이 때문에 프리울리 대부분의 생산자들은 레포스코 품종을 기꺼이 재배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레포스코 농사만 잘 지으면 와이너리 기본유지비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1700년경부터 프리울리주에서 재배되어 온 레포스코 품종은 마을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Refosco, refosco nostrano, Refosco di Faedis, Refoscone, Refosco Gentile, Refosco di Rauscedo, Refoschin, Refosco degli uccelli, Refosco nostrano, Refoscone, Refosco del botton, Refosco di Guarnieri, Refosco di Scodavacca, Refosco bianco. 이는 남과 달라 보이길 좋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성향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품종이름이 모두 레포스코로 시작되어 뒤따르는 단어가 달라도 동일 그룹의 품종임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레포스코 품종은 프리울리주 밖에서도 재배되는데, 에밀리아 로마냐’주에서는 카니나 디 로마냐(Cagnina di romagna)로, 프랑스 사보아 지방에서는 몽되즈(mondeuse)로, 미국에는 캘리포니안 레포스코(Refosco californian)로 알려져 있다.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주는 화이트와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은 레드와인을 선호했다. 식탁에서뿐만 아니라, 약효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민간요법으로도 사랑받았다. 테라마노라는 레드와인은 다량 포함된 철성분 덕분에 빈혈치료제로, 레포스코 와인은 강장제로 마시던 것이 그 좋은 예다. 1866년에 발표된 “마리아 테레사 여제 농업학회 보고서”는 “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볍고 산미가 높은 레드와인을 마셔야 하는데, 이는 청량효과와 포만감을 주고 타닌성분이 몸의 열을 내려주기 때문”이라며 레드와인의 음용을 부추기기도 했다.
레포스코 품종은 민간요법의 영역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근대 양조학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860년 루이지 끼오짜(Luigi Chiozza) 교수와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가 함께 이 품종을 연구했으며, 이 연구팀에는 테누타 빌라노바(Tenuta Villanova) 와이너리 사장인 알베르토 레비(Alberto Levi)도 참여했다. 그는 1877년에 15년에 걸친 공동연구 결과를 정리, 발표했는데, 이 보고서는 “ 레포스코 와인은 정말 우수한 와인이며 ‘프리울리 품종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에 걸맞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며, 레포스코 품종에 가장 적절한 재배방식과 양조법이 망라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레포스코 와인을 생산하려는 사람은 꼭 참고해야 할 필독서로 알려져있다.
▶ [콜리오(Collio) DOC 첫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됩니다.
글쓴이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 baeknanyou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