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아르헨티나의 멘도사로 날아가는 작은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안데스 산맥은 필자를 두 번 놀라게 하였다. 먼저, 끝없이 이어지는 긴 산맥의 광활함에 압도되었으며, 두 번째는 그 넓은 곳에 나무들이 별로 없는 삭막함이었다. 이 산맥이 긴 역사 동안 칠레를 외부와 단절시켜 놓았고, 와인산업에서도 적잖은 숙명처럼 굴레를 지웠다. 그 단절을 딛고 칠레 와인이 세계 무대로 나선 것이 1980년대 후반. 지금부터 약 30년 전이다. 그 짧은 데뷔 기간 동안 칠레 와인은 실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양적 팽창은 당연하지만, 질적으로도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이제부터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질적 진보에 관한 것이다.
칠레는 1830년 국립 종묘원을 설립하여 유럽 식물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850년대 친불 정책으로 유지들의 자제를 프랑스로 보내 농업을 배워 왔으며, 프랑스 포도 품종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아마도 남미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유럽 친화적인 산업 구조와 와인 품질을 이루었다면 이 이유가 클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중반의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으로 세계 경제 체재에서 소외되는 불행한 시절을 겪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73년 들어선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부는 민심을 추스르기 위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고, 그 일환으로 와인산업이 장려되었다. 기존의 와인 생산 전통에다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때마침 스페인과 캘리포니아 등 선진 와인 생산국의 투자 관심이 더해져 향후 30년간에 걸친 양적 팽창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의 대부 로버트 몬다비와 칠레의 한 양조자와의 만남이었다. 그가 바로 에라쑤리스사의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이고, "손진호의 그레이트 와인피플" 첫 인터뷰 주인공이다.
■ 칠레의 명문가 에라쑤리스
에라쑤리스 Errazuriz사의 에두아르도 채드윅 Eduardo Chadwick 회장은 에라쑤리스사의 창립자 돈 막시미아노 에라쑤리스 Don Maximiano Errazuriz의 5대손이다. 채드윅 회장의 친할머니가 돈 막시미아노의 손녀가 되니, 경영권이 사위 가문 쪽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와인산업에서 이런 승계는 흔히 볼 수 있다. 샹파뉴 지방에서도 부르고뉴 지방에서도.
1870년에 설립된 에라쑤리스사는 칠레 와인의 개척자이자 칠레 와인의 고급화를 이끈 유서 깊은 와인 명가이다. 처음엔 필자도 그저 오래된 농업 가문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가문을 자세히 알아보니,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각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명문 가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정계에도 자그마치 4명의 대통령을 배출하여 칠레의 케네디가로 불리고 있다.
이 가문에서 와인 농장을 차린 돈 막시미아노 에라쑤리스(1832~1890)는 칠레 생산자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방문하여 직접 최고의 포도 품종을 선별하여 들여와 포도밭을 조성하였다. 다른 모든 생산자들이 마이포 밸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안데스 최고봉인 아콩카과 산기슭 지역을 주목하여 이 지역에 최초로 포도밭을 조성하였고 오늘날 칠레 최고 와인 생산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러한 개척 정신은 그대로 채드윅 회장에게 이어진 듯하다. 현 사주인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도 1983년 가업을 계승한 후, 보르도를 방문하여 현대 와인 양조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밀 페노 Emile Peynaud 교수로부터 양조학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 또한 최고의 양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하여 나파 밸리 등 세계의 명산지를 여행했고 칠레로 돌아와 그 기술을 연마했다. 특급 와인의 세계를 직접 접한 후 탄생시킨 와인이 바로 돈 막시미아노 파운더스 리저브(Don Maximiano Founder’s Reserve)이며, 칠레 최초의 토종 프리미엄 와인이다.
■로버트 몬다비와의 합작
1992년 로버트 몬다비가 칠레를 방문했을 때, 채드윅은 그의 여러 일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로버트 몬다비는 아콩카과, 마이포, 콜차과 등 보르도 품종을 재배했던 칠레의 주요 포도원을 1주일에 걸쳐 방문했다. 당연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여러 양조장들도 둘러보았다. 방문을 마치면서 몬다비는 1970년대에 나파 밸리의 와인산업을 자기가 키운 것처럼, 그런 잠재력을 바로 이곳 칠레에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몬다비는 나파 밸리라는 무명의 와인 산지를 세계적 산지로 이끌어 낸 인물이었기에 칠레가 그런 잠재력을 가진 것을 한눈에 알게 되었고 자기가 그 과정에서 어떠한 도움을 얼마나 줄 수 있을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몬다비가 합작 사업을 제안했을 때 채드윅 회장은 매우 기뻤고, 자신을 믿어 준 것에 대해 더욱 겸손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에라쑤리스는 상대적으로 작은 회사였는데, 몬다비는 채드윅 회장에게서 고급 와인 생산의 열정을 느꼈으며, 같은 와인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아울러 채드윅 회장은 오랜 기간 몬다비를 자신의 멘토로 여겼던 만큼 그의 우정이나 믿음 같은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고 채드윅 회장은 술회했다.
▲ 에두아르도 채드윅과 故로버트 몬다비
이렇게 해서 세냐를 탄생시킬 수 있었고, 프랑스 바롱 필립과 합작해 만든 나파 밸리의 오퍼스원이 성공한 것처럼, 세냐도 칠레 와인 고급화의 이정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합작 와인의 이름을 세냐 Sena 라고 정한 것도, 스페인어로 신호 signal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칠레 와인산업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첫 신호이자, 칠레 와인이 고급화의 길로 가는 첫 신호라는 의미를 넣고자 하는 의도였다. 물론 북미와 남미, 두 최고 가문의 합작으로 탄생한 최고급 아이콘 칠레 와인임을 서명하고 인정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세냐의 성공과 또 다른 도전
1995년 첫 빈티지 세냐는 새로운 와인이라기보다는 기존 돈 막시미아노를 생산했던 와인 중 가장 좋은 배럴 샘플을 뽑고, 포도 품종도 카베르네 소비뇽 등 보르도 품종에다가 칠레를 대표하는 까르메네레 Carmenere 품종을 블렌딩한 와인으로 탄생하였다. 이렇게 세 빈티지의 세냐를 만드는 동안, 진정한 새로운 와인을 위한 새로운 포도밭을 찾았고, 결국 좀 더 바다 쪽으로 내려간 아콩카과 밸리 유역에 최적지를 찾았다. 1998년부터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해서 2004~2005년경에 식재가 완성되었다. 서늘한 태평양으로부터 41km 떨어진 계곡의 서쪽에 있는 포도밭은 42ha에 이르며 밭 사이사이와 중간중간에 올리브 나무 등 다른 식생들이 존재하는 등 자연 친화적으로 조성되었다. 이 포도밭에서는 초기부터 지속 가능한 영농법을 도입하였으며 2004년부터는 바이오 다이내믹 영농법을 도입하여 2007년에 인증서를 받았다.
세냐는 양조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쁘띠 베르도 품종에 말벡과 까르메네레 품종까지 블렌딩하니, "보르도보다 더 보르도다운" 와인을 생산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후 세냐는 지속적으로 품질을 높이고 개성을 독립시켜 가장 우아하고 섬세한 보르도 타입 칠레 와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번 인터뷰의 계기가 된 것도, 세냐 2012년 빈티지가 유명한 와인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98점이라는 전무후무한 점수를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 자리였기도 했다. 이제 세냐는 더 이상 신호 Signal 이 아니라, 명실공히 인정.서명 Signature의 세냐가 되었다.
▲아콩카과 밸리에 있는 세냐 농장
■베를린 테이스팅 Berlin Tasting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통과의례(등용문)라는 것을 거친다. 와인 전문가의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고, 유명인과의 일화 때문일 수도 있고, 품평회에서 우승할 수도 있고, 기존 최고 와인들과 계급장 떼고 경쟁하여 이기는 방법도 있다. 이 중 채드윅 회장이 택한 것이 마지막 방법인데 가장 스마트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확고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최고 와인들과 경쟁한다면, 이기면 대박이요, 져도 본전인데, 그 홍보 효과는 엄청나다. 1976년의 파리의 심판에서 이미 증명되지 않았던가!
2004년 채드윅 회장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기획한다. 에라쑤리스의 아이콘 와인들과 보르도, 이탈리아의 최고급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결하는 <베를린 테이스팅>이 바로 그것이었다. 2004년부터 10년간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 18개국에서 해당국의 와인 전문가들을 모아 놓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진행했다. 총 22회 개최된 베를린 테이스팅에서 에라쑤리스의 와인들은 20회에 걸쳐 3위 안에 올랐다.
<파리의 심판>은 1976년 한 번으로 끝이 났지만 베를린 테이스팅은 10년간 계속되었다. 1회 때, 즉각 1, 2 등을 휩쓸었고, 그때 멈추어도 충분한데, 채드윅 회장은 과감하게 매년 진행하였다. 2013년 마지막 서울에서의 테이스팅 행사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돈 막시미이노 2009가 1위를, 세냐 1997이 2위를, 3위는 보르도의 샤또 마르고 2003, 그리고 4위~8위까지가 다시 채드윅 회장의 와인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샤또 라뚜르와 사또 라피트 롯칠드가 있었다.
■진취적 행동가 에두아르도 채드윅
채드윅 회장의 뚝심과 진취적 기상을 보여 주는 단면과 같은 일화가 있다. 2002년에 에라쑤리스사의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보여 주기 위해 그는 프리미엄 와인 돈 막시미아노 파운더스 리저브 와인 한 병을 들고, 언젠가 자신의 와인이 도달할 것이라 믿는 높이를 상징하는 의미로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아콩카과 산 정상에 올랐다. 전문 산악인도 아닌 그가 이를 위한 체력을 기르기 위하여 6개월 동안 마라톤 등 체력 단련을 하였다니 그의 의지와 실행이 놀랍기만 하다.
또한 2015년 1월 17일에는 제임스 서클링에게서 받은 98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기념하기 위해 2012년 세냐 와인을 들고, 새롭게 밝혀진 칠레 최고봉이라고 하는 오호스 델 살라도 Ojos del Salado (6,893m 화산 봉우리)에 올랐다. 98점은 칠레 와인이 이제껏 받은 국제적 평가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로서, 칠레 와인의 품질이 세계 최정상급 수준으로 인정받은 것이며, 이에 대한 세냐 와인의 선도적 역할을 자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용감하고도 혁신적인 시도를 통해 칠레 와인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앰버서더로 존경받고 있다.
▲오호스 델 살라도 Ojos del Salado' 정상에 오른 채드윅 회장
현재, 채드윅 회장은 칠레 와인협회 Wines of Chile 이사회의 이사를 역임하고 있으며, 칠레 와인의 품질과 이미지를 감독하는 와인산업후원단 Brotherhood of Wine industry Merit 의 회원이다. 또한 그는 와인 교육과 칠레 와인 고급화에 관심을 보여 1999년부터 와인 마스터협회 Institute of Masters of Wine를 후원해 오고 있다. 채드윅 회장은 영국 디캔터지가 선정한 핵심인물 리스트 50위 Top 50 Power list 에 여러 번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2010년에는 칠레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칠레 정부로부터 First Chilean Recognition Award 를 수상했다.
이번 인터뷰는 세냐 2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시간을 잡다 보니, 앞뒤 일정 문제로 매우 짧게 끝났다.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제 베를린 테이스팅도 마감했고, 세냐 2012로 최고 점수도 받았고, 앞으로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화이트 와인 프로젝트를 넌지시 내비쳤다. 물론 아직은 베일에 가려 있지만… 맞다! 그의 아이콘 와인들은 모두 레드 와인뿐이지 않은가.
북쪽의 아타카마 사막과 남쪽의 푸에르고 빙하지대, 서쪽의 광활한 태평양과 동쪽의 험준한 안데스 산맥으로 완벽하게 막힌 국가 칠레. 결국 이곳을 뛰쳐나가려면 땅을 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비상이 필요할진대, 그 선두에 선 큰 독수리가 바로 내가 만난 에두아르도 채드윅이었다.
■채드윅 회장과 함께한 와인■
▲ 2012 빈티지세냐Sena
품종 블렌딩은 카베르네 소비뇽 52%, 까르메네레 23%, 메를로 12%, 말벡 7%, 쁘띠 베르도 6% 이다. 역대 와인 중 까르메네레 (칠레식 표현)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칠레 아이콘 품종에 대한 경의 일까? 칠레의 DNA를 더욱 강조한 것일까? 프랑스 오크통(new barrel 70%)에서 22개월을 숙성시켰다. 알코올은 14%vol로 지나치게 강하지 않으면서도 용맹스러움을 뽐낼 수 있는 기본 저력을 갖추었다. 아직 싱싱한 초년의 와인이기에, 블루베리와 블랙 체리 그리고 블랙커런트의 과일 풍미가 제일 먼저 진하게 풍겨 왔다. 이어서 감미로운 비닐라와 다크 초콜릿 그리고 정향과 아니스, 육두구의 살짝 매큼한 향신료 풍미가 뒤이어 찾아 온다. 마지막에는 까르메네레 품종의 영향으로 세련된 제비꽃과 붉은 장미 향이 가미된 섹시 포인트까지 갖추었다. 풍부한 타닌과 농축된 내용물이 풀바디 와인의 맷집을 구성하며 힘차게 뻗어 나가지만, 질감만큼은 매우 부드럽고 매끈한 편이다. 여운에 다시 등장하는 과일과 산도가 생동감을 주니, 우아한 균형감각을 유지한 채 십 수년을 숙성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