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의 와인피플> 네 번째 주인공은 하이트진로의 와인팀 사령탑 권광조 팀장이다. 그는 2013년에 하이트진로로 자리를 옮긴 이후 와인팀 내에 많은 변화를 일구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때 이른 한파가 급작스럽게 몰려온 12월 중순, 한 기업의 와인사업부를 총괄하는 이답게 말쑥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에게서 일종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필자는 그가 가져온 와인을 시음하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 있었는데, 하이트진로가 수입하는 샴페인과 Wine Spectator의 Top 100에 수 차례 선정된 바 있는 레드 와인 때문이었다. 섹시한 칼라의 샴페인 병을 얼음물 속에 담그고 나파 밸리의 뜨거운 태양을 받고 자란 카베르네 포도로 만든 와인을 디캔터에 옮겨 담자, 무더웠던 2010년의 열기가 공기를 가득 채우는 듯했다.
■와인양조학 전공으로 다져진 기초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가장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ROTC였는데, 칼같이 다린 제복을 입고 2~3명씩 조를 이뤄 다니며 “충성!”을 외치던 그들은 ‘강한 남성’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권 팀장이 ROTC였다니 갑자기 사람이 달리 보인다. 통솔력과 결단력, 추진력의 살아있는 표본이 아닌가. 어디를 가든 빠르게 적응하며 조직을 만드는 그의 능력은 바로 이런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해외 유학을 고민하던 그는, 지인들의 권유로 와인을 배우기 위해 가이젠하임 대학(Geisenheim University)에 들어갔다. 와인에 관한 한 독일 최고의 명성을 지닌 가이젠하임 대학은 독일의 유명 와인 산지 중의 하나인 라인가우 지방에 위치해 있다. 그 지역의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슐로스 요하니스베어그 농장(Schloss Johannisberg)에서 내려다보면, 저 멀리 오른편 아래 강가에 자리잡은 가이젠하임 대학이 보인다.
넉넉한 라인 강이 유유히 흐르고 독일에서도 비교적 온화한 지역에 위치한 포도밭을 보면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년간 와인과 사랑에 빠진 권광조 팀장. 그는 이곳에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전공하며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라인가우와 모젤 그리고 프랑켄 등 최고의 와인 산지가 밀집되어 있는 독일 서남부에서 향긋하고 신선하며 세련된 독일 와인을 매일같이 접하고 실력 있는 와인전문가들과 교우하면서, 그는 와인 산업에 대한 부푼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고 보니,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황만수 대표 역시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와인의 길로 접어든 사례다. 독일이란 나라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힘을 가지기라도 한 것일까.
<오랜 파트너인 독일 헨켈 社의 관계자와 함께>
■ 브랜드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다
독일에서 와인을 공부하고 게다가 미식가였던 그는 졸업 후 자연스럽게 와인 산업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그의 첫 직장은 진로 그룹의 자회사였던 고려 양주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루피노, 폰타나프레따, 지네스테, 옐로우테일, 운두라가 같은 브랜드를 배우고 연구했다. 이후 수입사 동원와인플러스로 자리를 옮겨 마케팅뿐만 아니라 와인수입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익혔고, 코노수르, 헨켈, 펠시나, 코얌, 다렌버그 같은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국내 시장에서의 인지도를 키워나갔다. 지금은 하이트진로에서 수입하고 있는 헨켈의 경우, 동원와인플러스에서 수입하던 당시 "헨켈 와인 사진 콘테스트"처럼 잘 알려진 이벤트를 통해 대중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제 그는 세 번째 도약의 장에 서 있고, 그 무대는 하이트진로이다. 우연의 결과지만, 그의 첫 직장인 고려양주가 진로 그룹에 속해 있었고 진로를 껴안은 하이트가 다시 와인 사업을 일으켰으니, 결국 그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간 셈이다. 하이트진로의 전신인 하이스코트 시절에는 몇몇 미국 와인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가 한정되었던 반면, 하이트진로로 사명을 바꾸고 권 팀장이 합류하면서부터 대대적인 브랜드 수급과 체질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는 현재 하이트진로의 와인사업부에서 기획, 마케팅, 영업 등을 총괄하고 있다..
하이트진로 와인 포트폴리오의 핵심은 샴페인을 비롯한 스파클링 와인과 미국 와인이다. 예를 들어 스파클링 와인 분야에서는, 호텔과 클럽에서 최근 소비가 급증하고 있는 ‘떼땅져’ 샴페인과 애호가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온 ‘헨켈’, 그리고 감미로운 미감으로 누구에게나 친근한 모스카토 와인 ‘까비앙카’ 등의 다채로운 라인업으로 발포성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더불어, 칠레의 뷰마넨은 그가 최근 주력하고 있는 아이템이라니, 칠레 와인의 춘추전국시대에서 어떻게 자수성가해 나갈지 기대된다.
<칠레에서 찍은 사진>
■ 마케팅을 하려면 트렌드를 읽어라
마케팅 철학에 대해 묻자, 그는 "소믈리에나 와인평론가들의 와인에 대한 평가 기준과 나의 평가 기준은 좀 다를 수 있다"고 운을 떼며, "시장을 먼저 이해한 후 상품화할 수 있는 와인을 발굴하고, 소비자가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브랜드를 홍보한다"며 본인의 마케팅 관점을 설명했다. 또한 "각 소비층마다 각기 다른 브랜드와 마케팅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덧붙이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성장하고 있는 대중적인 시장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와인을 소개하고, 음식과 잘 어울리되 지나치게 까다롭지 않은 조합을 소비자에게 알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이트진로가 수입하는 ‘타파스(Tapas)는 이러한 카테고리를 대표하는 와인 브랜드이다. 반면 와인애호가가 주를 이루는 성숙한 시장에서는, 품격 있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권위 있는 전문가 또는 매체를 인용하는 방식을 통해 차별화를 꾀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다. 지난 해 FIFA월드컵 공식 샴페인으로 지정되었던 ‘떼땅져(Taittinger)’ 또는 백악관 만찬주로 알려진 ‘샤플렛(Chappellet)’ 같은 와인은, 정통성과 최고급 이미지를 바탕으로 소비자 만족도를 높인 대표적인 사례다.
요약하면, 시기, 대상, 트렌드에 맞추어 발 빠르게 제품을 개발하고 소비자들에게 이를 알리는 것은 권팀장이 생각하는 마케팅의 핵심 요소이다. 여기에 하이트 맥주와 진로 소주를 통해 다져 놓은 전국 60여 개 하이트진로 지점망의 활용도까지 더해지면, 하이트진로 와인사업부는 다른 와인 수입사들에 비해 엄청난 부가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 신뢰와 동반 성장에 기반한 관계 형성
공급사-수입사 관계에 있어서 권광조 팀장은 “서로 협력하고 때로는 위험도 함께 감수할 수 있는 형제 같은 파트너십“을 강조했는데, 실제로 이런 생각을 공유하며 그가 하이트진로로 자리를 옮길 때 수입사를 하이트진로로 변경한 와인브랜드들도 있다. 나아가 한국 와인 산업의 핵심 주체인 수입사-소믈리에-미디어 사이에서도 이런 파트너십이 요구된다고 덧붙이며, 그는 온라인 와인 판매가 가져다 줄 이점, 소믈리에 후원을 통한 와인 판매 활성화 방안, 미디어가 소비자와의 소통에 기여하는 점 등에 대한 의견을 덧붙였다.
입을 열지 않으면 묵묵하게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 왠지 강한 와인을 좋아할 것 같다는 필자의 예상을 깨고, 권광조 팀장은 리슬링(독일 유학파다운 선택이다!) 품종의 화이트 와인과 샴페인, 샤또 생 삐에르(Chateau St.Pierre)처럼 촉촉한 스타일의 보르도 레드 와인을 선호한단다. 이번 인터뷰는 야심 찬 와인 비즈니스맨이자 섬세한 와인애호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동시에 엿볼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패기와 연륜을 양손에 쥔 그의 노력으로 한국 와인 시장이 한 단계 도약하길 기대한다.
< 하이트진로 권광조 팀장과 함께 한 와인 >
Champagne Brut Reserve, Taittinger NV
샴페인 브륏 리저브, 떼땅져 NV
2014년 FIFA 월드컵 공식 샴페인인 떼땅져 브륏 리저브는 샤르도네 40%에 피노 누아와 피노 므니에가 블렌딩되었다. NV(Non Vintage)의 기본급 샴페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샤르도네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인데, 그만큼 전체적인 분위기가 우아하고 부드럽다. 총 35개 포도밭의 포도가 블렌딩되어 상당한 복합미를 연출하며, 3년이라는 긴 숙성 기간을 통해 형성된 풍부하고 짙은 풍미를 감상할 수 있다. 높은 산도와 세련된 미네랄, 싱그러운 레몬, 고소한 비스킷과 바게트 풍미가 시음 전반을 거쳐 지속적으로 표현된다. 인터뷰 장소로 활용된 와인북카페의 소고기 카르파초, 해산물이 들어간 부야베스 등의 요리와 잘 어울렸다.
Champagne Nocturne DISCO Sec, Taittinger NV
샴페인 녹턴 디스코, 떼땅져 NV
브륏 리저브에 이은 두 번째 떼땅져 샴페인은, 맛과 외관 모두 섹시하다는 표현과 잘 어울리는 녹턴 쌕이다. 샤르도네 40%에 피노 누아와 피노 므니에가 블렌딩된 이 샴페인은, 4년이라는 긴 2차 발효 숙성 기간을 거치면서 부드럽고 통통한 살결을 가진 육체파로 거듭났다. 17.5g/l의 잔당이 우리를 부드러운 꿈나라로 인도하는, 그야말로 매혹적인 밤의 샴페인이다. 반짝이는 바이올렛 퍼플 컬러의 드레스를 입힌 환상적인 패키지까지 더해져, 눈 앞에서 현란하게 춤을 추며 잠 못 이룰 흥분을 선사한다(빈 병도 챙기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청사과와 말린 살구, 부드러운 향신료, 구운 아몬드와 갓 구운 빵 풍미가 인상적이며, 아카시아 꿀과 레몬의 산미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맛있는 샴페인이다. 오프 드라이 (off-dry)한 이 샴페인은, 로즈마리 향이 은은한 감자 뇨끼와 사프란 소스 파스타와 매혹적인 교감을 이루어냈다.
Chappellet C/S, Signature, Napa Valley 2010
샤플렛,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시그니쳐 2010
검붉은 다크 체리 색상에 바이올렛 뉘앙스를 지닌 이 와인은, 까시스와 블루 베리의 매혹적인 카베르네 DNA와 모카, 바닐라, 유제품 향 등 나파 밸리 DNA를 동시에 드러낸다. 섬세한 질감과 미디엄-풀 보디의 단정한 무게감으로 포장된 이 레드 와인은, 개봉 후 24시간이 지나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아로마의 향연과 훼손되지 않은 미감의 산미를 자랑하며, 숙성을 기대할 수 있는 굳건한 구조를 느끼게 한다. 이 와인은, 설립자인 돈 샤플렛이 나파 밸리의 350m 고지에서 화산토양에서 자란 적포도로 프랑스 스타일의 우아한 레드 와인을 만들고자 했던 꿈의 실현이다. 특히 2004와 2006년 빈티지 샤플렛 시그니처 카베르네가 Wine Spectator의 Top 100에 선정되면서, 품질과 가격이 모두 만족스러운 레드 와인으로 명성을 높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