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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순

오랜 연인처럼 다가온

Vino Cotto


글 이인순


와인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다양한 스타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품종에 따라, 양조 방식에 따라, 빈티지에 따라 수만 가지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있고 모든 와인이 코르크마개를 열고 잔에 따라서 감각으로 즐겨야 그 본 모습을 알 수 있기에 필자는 낯선 와인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올겨울 체감 온도가 영하 15도이던 어느 날, 또 하나의 낯선 그러나 따뜻한 느낌을 주는 와인을 만났다.



비노 꼬또 Vino Cotto?

lorese trnsprntbackgrnd1.jpg비노 꼬또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것이 어떤 스타일의 와인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구운 와인이라니… 와인이 고구마도 아니고 군밤도 아닌데 어떻게 구울까? 알고 보니 비노 꼬또는 Cooked Wine이란 뜻이고 이 의미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사람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 구운 와인이라고 명명했단다.

비노 꼬또는 이태리 중부 지방의 동쪽 마르께Marche 지방과 그 아래에 위치한 아부르조Abruzzo 지방의 특산품으로, 몬테풀치아노와 산지오베제와 같은 적포도 품종에 베르디끼오, 말바시오, 뜨레비아노와 같은 약간의 화이트 와인 품종을 섞어 만든다.

만드는 방법은 10월 중순경 이른 새벽에 포도를 수확하여 일단 포도즙의 양이 60% 정도 이하로 줄 때까지 뭉근한 불에 끓여 농축시킨 후, 발효를 거쳐 오크통에 넣어 장기 숙성한다. 숙성을 위하여 오크통에 넣는 과정까지 대개는 이 모든 일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동안 다 이루어진다고 하니 다른 와인 양조 과정에 비해 양조 과정이 초스피드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일단 오크통에 안착하고 나면 와인은 그 때부터 기나긴 오크통 살이를 하며 일반 와인보다 더 긴 숙성의 시간을 갖게 된다. 와인 레이블에서 일 로레세 스트라베끼오, 비노 꼬또 스트라베끼오와 같이 스라베끼오란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아주 오래된’이란 뜻으로 와인이 오크 통에서 오래 숙성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들이 흔치는 않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비노 꼬또를 끓이는 과정에서 캐러멜화된 당분은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 성분이 화이트 와인의 3배나 된다고 한다. 비노 꼬또의 독특한 양조 방식 덕분에 마시는 즐거움 외에도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셈이다.

비노 꼬또는 아주 오래 전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독특한 스타일의 와인을 즐기고 싶어서 자신들 소유의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들어 즐겨왔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태리 귀족들은 첫 아들이 태어나면 비노 꼬또를 만들어 잘 보관하였다가 그 아들이 장성하여 결혼할 때 만찬주로 내놓을 정도로 의미있고 귀하게 여긴 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이태리 와인 규정이 새로이 생기고 여러 가지 개혁이 일어나면서 비노 꼬또는 일반 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밀주로 분리되어 생산과 판매가 모두 금지되었다. 소수의 생산자에 의해 비밀리에 겨우 명맥이 이어져 오다가 2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이태리 정부로부터 생산과 판매를 허가받고 상품화되어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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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기다림이 선사한비노 꼬또의 풍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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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 꼬또를 처음 테이스팅할 때는 마치 오래 숙성시킨 올로로소 쉐리나 마데이라와 같은 잘 만들
어진 주정강화와인이나 도수 낮은 꼬냑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농축된 즙으로 만들어지니 알코올 도수가 높거나 아주 달겠지하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알코올 도수는 일반 와인에 비해 높지 않고 스위트 와인이라 하지만 나무 통에서 오래 숙성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풍미와 잘 어우러져 단 맛이 튀거나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비노 꼬또가 담긴 와인 잔을 45도로 기울여 보니 마치 금방 내린 옅은 농도의 커피 색과 비슷한 마호가니 나무 색을 띄고 있고, 가만히 와인 잔을 코에 가까이 가져가니 처음에는 적절히 잘 볶아진 원두로 갓 끓인 커피 향이 기분 좋게 스며든다. 잔을 살짝 흔들어 주자 살짝 스피리츠에 절인 과일이나 구운 과일과 같은 향기와, 말린 무화과, 살구, 자두와 같은 말린 과일 향과 정향, 감초, 계피 등의 달고 스파이시한 향들이 와인 잔 밖으로 퍼져 나온다. 거기에 호두나 아몬드 등 각종 견과류 향과 구운 밤이나 구운 고구마 냄새와 같이 토스티하면서도 구수한 향이 감돈다.

입안에서는 단 맛을 잘 받쳐주는 적절한 산미로 와인의 맛이 들척지근하지 않고 깔끔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감귤류 껍질이나 오렌지 마멀레이드에서 느낄 수 있는 쌉쌀한 맛과 토피 사탕(커피 맛이 나는 캐러멜) 맛이 액센트를 주고 있다. 입 안에 한 모금 잠시 머금고 있다가 삼키면 다양한 향들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입 안 전체에 감돌며 긴 여운을 남기고 천천히 사라져 간다.

티베리 다비드란 와인 메이커가 만든 비노 꼬또 스트라베끼오(빈티지 2001)을 마실 때는 놋수저로 음식을 먹을 때 느껴지는 약간의 금속성 냄새가 입안에서 살짝 느껴지기도 하여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와인을 만들 때 포도즙을 끓였던 구리로 만든 솥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고 하니 흥미로웠다.

비노 꼬또는 오픈하고 바로 한 병을 비워야 하는 와인도, 한번에 여러 잔을 마시는 와인도 아니다. 다른 와인에 비해 오크 통에서 오래 숙성되면서 공기와 많이 접촉하는 데서 오는 산화된 풍미가 있기 때문에, 오픈 한 후에 바로 다 마시지 않고 좀 시간을 가지고 여유 있게 한잔씩 음미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치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 가면 다락의 후미진 한 구석에 마치 신주 단지 모셔놓던 숨겨 놓고 할아버지가 약이라며 조금씩 꺼내 드시던 정체 모를 그러나 은은하게 묵은 향이 나던 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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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 꼬또를 즐기는 다양한 5W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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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비노 꼬또를 함께 테이스팅한 사람들과 무슨 음식과 함께 하면 좋을지 다양한 의견들을 나누었다. 처음엔 스위트한 스타일이니 자연스럽게 디저트 와인으로 생각하여 피칸 파이나 티라미수, 말린 과일 타르트 등 단 음식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반복해서 시음할수록 디저트 와인으로보다는 일반적인 음식과 매칭해서 마셔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How & Why 필자가 떠올린 음식은 북경식 오리구이 요리였다. 껍질을 바삭하게 구워 스모키하고 약간의 카라멜 향도 있는 오리 고기 한 점을 밀전병에 파나 오이와 싸서 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고 비노 꼬또를 한 모금 마시면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 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족발 요리와 약간 스파이시한 풍미의 동파육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스파이시한 향이 강한 아시아 계열의 음식과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단맛과 스모키한 향이 있어서 이태리의 파마산 햄이나 스페인의 하몽처럼 짭짤한 풍미의 전채 요리나 숙성된 진한 맛의 치즈와의 매칭도 무난해 보인다. 와인을 시음한 시간이 마침 오후 5시, 좀 출출할 때였기에 우리는 머리 속으로 비노 꼬또를 마시며 각종 음식들을 매칭하여 먹어보는 상상을 신나게 해보았다.

Where비노 꼬또를 마시면 마실수록, 반드시 특정 음식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가볍게 한잔 할 수 있는 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 바람이 매서운 이 계절, 따뜻한 실내에서 좋은 사람과 담소를 나누며 한잔 마시면 몸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고 기분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와인 같았다. 거기에 아몬드, 호두, 짭짤한 칩스 혹은 호두를 가운데 박고 돌돌 말아 썰어놓은 곶감 단자 등을 간단히 곁들여도 좋을 것 같았다.

When 화려한 붉은 색이나 향으로 단박에 사람을 휘어잡지는 않지만, 오래 묵어서 빛 바랜 색채와 은은한 향을 발하는 비노 꼬또는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느낌을 준다. 이제 곧 발렌타이 데이가 온다. 오래된 연인들이나 부부들의 경우 발렌타인 데이는 젊은 사람들만 즐기는 거라고 외면하고 지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발렌타이 데이에는 비노 꼬또를 함께 즐기면서, 오래 묵어서 더 은은하고 향기로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Who 필자도 이번 주말 오후에는, 연예인도 아닌데 바쁜 척하는 딸을 항상 안쓰러워하는 어머니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한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맛있는 피칸 파이나 호두 강정을 곁들이며 비노 꼬또를 조금씩 조금씩 마시며, 이제는 주름이 가득하지만 여전히 너무나 따스한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도란도란,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고 싶다. 어머니의 주름진 미소와 그 다정한 목소리에서 삶의 긴 여운을 느끼고 싶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게 느껴진다. 설 연휴의 푸근했던 날씨 덕에 두꺼운 코트를 벗어 던지고 성급히 봄을 기대해보지만 추위는 잠시 더 우리 곁에 머물거라고 한다. 바깥의 날씨는 여전히 춥지만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의 왈츠를 들으면서 이 색다른 와인 비노 꼬또와 함께 곧 다가올 계절의 에너지를 미리 느껴보면 어떨까.


글쓴이 _ 이인순
WSA PDP (Wine & Spirit Academy) 교육부장 및 대표강사


비노꼬또 국내수입처 _ 비노꼬또 코리아 (042 525 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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