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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표

프랑스 보르도 일부 지역의 와인들이 가격과 품질에 따라 그 등급이 나뉘어진 1855년부터 2004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간 그 품질을 유지한 샤또의 위용은 대단하고 아무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세월의 모진 풍파를 지내오면서 끊임없이 회생의 기회를 모색하고 결국 이를 달성했다면 이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라그랑쥐가 바로 이런 와인이다.

즉, 밑 빠진 독에 물 고일 날이 있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준 케이스가 바로 최근 1983년 이후의 샤또 라 그랑쥐다. 한동안은 “메종 노블르 드 라그랑쥐 몽테이(Maison Noble de Lagrange Monteil)”로 불리던 중세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60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1842년 뒤샤텔 백작(Duchatel, Charle-Marie-Tanneguy)의 소유 하에 다른 어느 포도원보다 먼저 배수관을 설치하고 1855년 와인 등급 구분에서 3등급으로 분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60년대 이후 이 샤또는 오랜 침체기에 들어 갔었다.

유럽 전체를 강타한 포도뿌리 혹벌레의 피해와 세계대전과 경제 공항의 여파 그리고 여러 소유주들의 경제적 상황의 악화로 포도원의 관리가 소홀해 진 것은 물론이고, 포도원도 조각조각 매각되어 과거 화려했던 시절의 명성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1980년대 이후 불사조처럼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나 와인 애호가들의 미각을 사로잡은 샤또 라그랑쥐. 이와 같은 회생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사또 라그랑쥐가 그냥 밑 빠진 독이 아니라 아주 좋은 독이기 때문일 것이다.

침체기 동안에도 샤또 라그랑쥐가 수많은 투자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이 샤또가 프랑스의 셍 쥘리엥(St. Julien)에 그리고 이 지역의 가장 좋은 토양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셍 쥘리엥 지역은 보르도 지역의 다른 어느 곳 보다도 1855년 등급 분류로 크뤼 급 와인이 많이 나는 곳이다. 비록 1등급 와인은 없지만, 지역의 80%가 그랑 크뤼 급으로 분류되며, 2등급 와인 5개, 3등급 2개 그리고 품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4등급 와인 4개가 있는 지역이다.

최근 들어 특히 그 품질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지역으로 북쪽에 있는 뽀이약과 남쪽에 있는 마고 지역 와인들의 성격을 잘 조합해 놓은 와인들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 로빈슨(Jancis Robinson)은 섬세함, 균형과 전통있는 와인을 찾는다면 이 지역의 와인을 꼽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니까 어느 정도의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인지 알만하지 않은가?

이외에도 MW(Master of Wine)인 Michael Broadbent는 그의 책 “Bordeaux Atlas”에서 이 지역을 “영국인들이 선호하는 레드 와인의 원형the archetypal Englishman’s claret”라고 칭할 정도니 샤또 라그랑쥐가 품질의 하강곡선을 그리던 1925년 스페인 바스크 지역 Cendoya 가문에서 이 샤또를 구입하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그 잠재력은 충분히 드러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센도야 가는 샤또 라그랑쥐 전성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셍 쥘리앙에 위치해 있으면서 라그랑쥐가 1983년까지 이렇다 할 좋은 와인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였는지도 모르겠다. 1925년 당시만 해도 필록세라의 여파로 와인 업계가 깊은 침체 상태였고, 세계대전의 여파로 별다른 진전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1925, 1927, 1930-1932 그리고 1935-1939년 연이은 안 좋은 작황으로 샤또 라그랑쥐의 와인들 중 많은 부분이 다른 레이블로 판매될 수 밖에 없었고 라그랑쥐 이름은 점점 과거의 명성이 퇴색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1860년에 690 에이커에 달하던 포도원도 이 시기에는 388 에이커로 줄었다. 결국 1981년 샤또 라그랑쥐는 깊은 수렁 속에서 필연적으로 새로운 주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라그랑쥐와 산토리와의 만남은 양쪽의 노력, 아니 산토리사의 게이조 사지(Keizo Saji)의 와인 열정 덕에 성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게이조 사지는 여러 해동안 보르도의 좋은 와인너리에 투자하기 위해 셍쥘리앙의 토양과 기후 그리고 세부적인 특성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미쉘 드롱(Michel Delon)과 에밀 페이노(Emile Peynaud)에게 조언을 들으면서 열심히 그의 와인 열정을 꽃 피워 줄 샤또를 물색했다.

페이노는 특히 Gunzian 자갈로 구성된 라그랑쥐의 토양을 극찬했으며, 여러 시내와 하천 그리고 19세기에 설치한 배관 등을 이용한 최상의 배수 시스템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를 사지에게 추천했다.

주변에 조언을 해주는 친구들도 있고 산토리 사의 매입 결정은 그런대로 쉽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직접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프랑스는 일본 투자자에 대해서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2년 간이나 판매 관련 계약을 연기했으며, 1983년 산토리에게서 샤또나 셍쥘리앙의 와인 전통에 유배되지 않는 선에서 4백만 불 이상 투자할 것을 약속 받고 나서야 적지 않은 돈 1천8십만불에 샤또 라그랑쥐를 사지에게 넘겨주었다.

호락호락 하지 않은 것은 비단 프랑스 정부 뿐 아니었다. 샤또 라그랑쥐도 썬토리사에게 쉽게 즐거움을 안겨주지 않았다. 취득 이후에도 샤또 라그랑쥐는 11년 동안 10년간 백만불씩 손해를 보았다. 하지만 그 후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벌써 20년째 샤또 라그랑쥐의 양조를 담당하고있는 마르셀 뒤카스(Marcel Ducasse)의 덕이다. 페이노의 제자인 뒤카스는 초반부터 라그랑쥐의 재건을 총괄했으며 세심한 연구를 통해 토양이 줄 수 있는 최상의 맛을 병에 담도록 노력했다.

그는 포도원을 우선적으로 재정비했으며 이를 위해 1백38 에이커의 기존 포도원에 포도 나무를 새로 심고 190 에이커를 추가로 구입하고 새로운 포도 나무를 심었다. 이와같이 포도원을 넓힘으로 라그랑쥐는 메독에서 가장 넓은 포도원을 가진 샤또가 되었다.

뒤카스는 새로 포도 나무를 심음과 동시에 각 품종의 재배 비율도 조정했다. 까베르네 소비뇽 65%, 메를로 28%와 쁘띠 베르도 7%. 전통적인 보르도 품종에 속하는 까베르네 프랑과 말벡이 재배되지 않는 포도원.

그러나 뒤카스는 맛의 깊이를 떨어뜨리는 이 품종들을 사용하기 보다 과감하게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와 쁘띠 베르도로 품종을 한정시킴으로 더욱 맛이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한다.

품종에 대한 엄격한 선별 이외에도 포도 나무 사이의 간격은 에이커 당 3천 그루였던 것을 3천4백 그루로 좁혔다. 이는 포도 나무의 뿌리로 하여금 양분을 찾기 위해서 더 깊이 더 힘겹게 여러 지층을 뚫고 가게 하여, 포도 알의 크기를 제한하고 더욱 농축된 맛을 갖도록 했다.

달리 말해 포도 나무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여 더 적은 양의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들겠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이는 사지의 장기적인 안목과 와인에 대한 여유 있는 시각과 뒤카스를 비롯한 사또 라그랑쥐의 양조팀의 자신 있는 선택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어려운 시도였다.

‘밑 빠진 아주 특별한 독’에 대한 투자는 포도원 뿐 아니라 양조장과 샤또 건물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85년에는 56개의 온도 조절이 가능한 양조통(vat)이 설치 되었다. 60에서 220 헥토리터들이 양조 통들에는 품종별로, 수령별로, 포도원별로 구분되어 가장 섬세하면서도 엄격하게 와인의 스타일을 조절하고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산토리社의 이런 지속적인 투자, 품질에 대한 철저한 관리는 높이 평가 받는 와인들로 그 열매를 맺었으며, 덕분에 소비자들은 가격대비 품질이 훌륭한 와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양조에 일본인 켄지 수쥬타(Kenji Suzuta)가 합류하고 있어 일본인들의 섬세한 솜씨마저 담고 있어서 맛이 한층 더한 이 샤또의 와인들에게는 그랑 뱅인 샤또 라그랑쥐와 세컨드 와인인 “라그랑쥐의 봉토(Les Fiefs de la Grange)” 그리고 화이트 와인 “Les Arums de Lagrange Blanc”이 있다.

샤또 라그랑쥐의 그랑 뱅의 경우 일일이 숙성정도를 보고 딴 포도들은 28-30도에서 발효되며 섬세한 맛을 위해서 발효과정 중의 와인을 뒤섞는 회수도 제한하여 섬세한 감각으로 양조한다.

과일 향과 깊이 있는 맛을 강조하는 샤또 라그랑쥐는 까베르네 소비뇽이 50-60%, 메를로가 30-40 그리고 쁘띠 베르도가 10-15%가 작황에 따라 블랜딩 되며, 이중 60%가 20개월동안 새 오크 통에서 숙성과정을 거쳐 병입된다.

산토리社가 인수하고 새로 양조 시설을 설치한 1985년 빈티지부터는 진한 블랙 커런트, 체리, 각종 허브, 불에 살짝 그을린 나무, 삼남무와 숯 향기까지도 드러내고 매년 생산되는 2만3천 여 상자의 샤또 라그랑쥐는 이제 고정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격대비 좋은 품질로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세컨드 와인 “라그랑쥐의 봉토(Les Fiefs de la Grange)”다. 이 와인은 10%만 새오크 통에서 숙성되며 샤또 라그랑쥐에는 수령이 최소한 15년 이상 된 포도 나무의 열매를 사용하는 것에 반해 이 와인에는 수령이 15년 미만인 나무의 열매가 사용되며, 까베르네 소비뇽이 80% 그리고 메를로가 20% 블랜딩 된다.

사또 라그랑쥐의 포도원이 위치한 토양, 기후, 지형 그리고 지질학적인 모든 것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기를 추구한다면 세컨드 와인인 Les Fiefs de Lagrange는 맛의 균형이 잡히고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다.

화이트 와인 “라그랑쥐의 아룸(Les Arums de Lagrange Blanc)”은 1997년부터 이 샤또에서 시도 하고 있는 화이트 와인이다. 샤또의 포도원 중 약 4헥타르에서 재배되는 소비뇽 블랑(60%), 쎄미용(30%)과 뮈스카델(10%)로 양조하는 이 와인은 12개월간 효모 등을 거르지 않은 상태로 숙성되며, 그윽한 맛의 엷은 빛깔과 산미가 좋은 와인이다.

밑 빠진 독으로만 보이던 샤또 라그랑쥐는 아마도 이 와인들로 다시 가득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또 라그랑쥐는 장거리를 뛴 마라톤의 승자이며 1855년 그랑 크뤼(3등급)으로 평가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셍쥘리앙이 갖는 토양은 아직도 많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비록 일본인 사지가 사또에 자신이 직접 쓰기 위해 데판야기를 설치했고 연중 일본인 관광객이 수도없이 방문하고 있긴 하지만, 이 와인은 일본 와인이기 보다는 진정한 보석을 알아보는 그리고 그것에 믿음과 열정을 실어준 와인 애호가의 와인이다. 긴 싸움을 하고 있는 이들과 같이 나누며 곧 있을 승리의 순간을 위해 건배를 들고 싶은 와인이다.

[_이석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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