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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표

[ 연재에 앞서 ]
2005년을 맞이하여 베스트와인에서는 와인문화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컬럼을 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번째는 신년특집으로 ‘세계 와인산업과 문화의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로 와인 평론가 이세용씨의 컬럼을 총 7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세계 와인업계의 흐름을 짚어보며 동향을 읽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와인은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적 차원에서도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해주는 ‘웰빙 음료’ 혹은 ‘라이프 스타일 생산품’(lifestyle product)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와인애호가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은 와인이라는 ‘알코올’을 마신다기 보다는 ‘와인미학’을 향유하고 ‘와인문화’라는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고 있다. 서구 문명사에서 와인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전 세계의 대중적 차원에서 와인문화가 확산된 것은 비교적 20세기 후반 최근의 일이다.

와인산업의 눈부신 변화와 발전

와인산업의 발전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난 세기의 마지막 20년에서 30년은 역사상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눈부신 변화와 발전의 시기였다. 영국의 와인 전문가인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도 2002년 7월 비엔나에서 열린 주최 국제 심포지엄의 기조발제를 하는 자리에서 지난 30년간 와인산업의 발전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변화의 폭과 속도가 보여준 ‘가속화’(acceleration)라고 규정한 바 있다.

자신이 발간하는 격월간 와인잡지 의 창간 25주년을 맞은 로버트 파커(Robert M. Parker, Jr.)도 미국의 월간지 2003년 9월 호에 기고한 ‘와인과 함께 한 25년 : 파커 보고서 (25 Years in Wine : The Parker Report)’ 라는 글에서 지난 25년은 세계 와인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회고한다. 파커는 와인산업의 급진적 변화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빼어난 일류 와인 산지들(classic wine regions)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와인 애드버킷>이 창간된 1978년의 경우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보르도, 부르고뉴, 샹빠뉴 그리고 이탈리아 삐에몬테의 바롤로와 바르바레스꼬, 토스카나 정도가 올드 월드 양대 와인강국의 ‘클래식’ 와인 산지였다. 그러나 그 이후 프랑스의 론 밸리가 재발견되고 이탈리아에서는 토스카나의 ‘수퍼 터스칸’(Super Tuscan) 와인들을 비롯하여 중부와 남부의 와인 산지들이 새롭게 부상했다.

파커는 특히 1980년대에 시작되어 19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기간을 통해 새롭게 재평가된 대표적 와인산지를 하나로 묶어 ‘선 벨트’(the sun belt)라고 부르는데 일조량이 많고 따뜻한 마이크로 클라이미트(the warm microclimates)가 특징인 지역을 뜻한다. 이러한 ‘선 벨트’는 스페인,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중부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중부 및 남부를 잇는 와인산지의 띠를 지칭하고 있다. 가격 대비 품질이 뛰어난 와인들이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파커는 ‘선 벨트’를 밸류 와인의 주산지(the value zones)라고도 부른다.

가장 눈부신 변화를 보인 캘리포니아를 예로 들어보자. 1980년대 들어 ‘론 레인저’(Rhone Ranger)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캘리포니아의 중부 및 남부 해안가를 따라 재배된 프랑스 론 밸리의 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든 일군의 와인 메이커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와인들은 풍부한 과일과 스파이시한 풍미로 와인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또한 나파 밸리와 소노마 카운티에선 새로운 고유 브랜드의 보르도 스타일 블렌드 와인들(proprietary Bordeaux-style blends)이 출현했다. Joseph Phelps의 ‘Insignia’를 필두로 Opus One, Dominus, Triology, Verite, Infinity, Arietta, Journey, Rubicon 등의 명품 와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캘리포니아의 컬트 와인들(cult wines)과 함께 캘리포니아 와인생산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 좌로부터 Dominus, Insignia, Verite, Opus One

신세계 국가들 가운데 최대 와인 수출국으로 부상한 호주 와인산업의 발전도 괄목할 만하다. 1970년대 말 호주는 세계 무대에서 그다지 비중이 있는 와인강국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시장에선 호주가 자랑하는 펜폴즈 그레인지(Penfolds Grange) 조차도 일반 와인애호가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호주는 적어도 40여개 안팎의 월드 클래스 와인들을 보유한 와인강국으로 떠올랐다. 파커는 특히 바로사 밸리 (Barossa Valley)와 맥래런 베일(McLaren Vale)과 같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강건하며 과일 맛이 농축된 최상급 쉬라즈 와인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호주는 또한 중저가 그룹의 와인에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뛰어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가격대 전반에 걸쳐 고른 경쟁력을 갖춘 드문 케이스의 나라다.

이 밖에도 지난 사반세기 동안에 독일, 알자스, 오스트리아의 드라이 리슬링(dry Riesling) 와인의 품질 향상에 따른 수요가 늘어났으며 남미의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글로벌 와인시장에 신흥 와인 강소국으로 등장했다. (파커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뉴질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와인산업의 변화에 대해선 별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

둘째, 포도원과 와이너리의 혁명이다. 포도재배 기술의 발전은 포도원 관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겨울과 봄철에 과감한 가지치기(pruning), 적은 소출을 겨냥한 포도송이 잘라내기(crop thinning), 포도알이 햇빛에 잘 노출될 수 있도록 포도잎을 잘라 내거나 통풍을 고려한 캐너피 매니지먼트(canopy management) 등이 도입되어 건강하고 잘 익은 포도를 생산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최상의 와인은 포도밭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이 굳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유기농 재배 및 바이오다이내믹(biodynamic) 방식의 친환경적 지속가능한 영농법을 채택하는 포도원도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와이너리에 도입된 양조기술의 발전도 주목을 요한다. 일부 선진적 와인메이커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걸쳐 유행했던 온도조절 스테인리스 스틸 발효탱크 대신에 개방형(open-top) 온도조절 목조 발효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파쇄와 발효에 들어가기 앞서 잘 익은 건강한 포도만을 엄격히 가려내기 위해 분리대(sorting table, 불어로 table de tri)를 도입했다. 양조의 전 과정에 걸쳐 보다 자연스런 와인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 조작을 억제하는 이른바 ‘비개입적 와인 메이킹’(non-interventionist winemaking)이 사려깊은 양조방식으로 각광 받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청징을 안하고(non-fining), 여과를 안한(non-filtered) 와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셋째, 미디어 혁명이다. 특히 미국에서 와인 소비자들과 업계를 대상으로 한 와인 전문지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새로 창간되기 시작했다. 가 1976년에 창간호를 선보였고 1978년에는 이 창간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스티븐 탠저(Stephen Tanzer)의 가 1985년에 나왔으며 1988년에 가 창간되었다. 이러한 잡지들은 와인문화 보급의 새로운 기수로 떠올랐으며 IT혁명이 인터넷 세상을 열어 놓으면서 와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전파 시키는 데 와인 저널리즘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넷째, 와인 판매점과 레스토랑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바뀌었다. 영국에선 런던을 비롯하여 주요 도시에 수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와인 전문점이 존재했지만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비로소 전문성을 갖춘 와인 수입상과 판매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도 전문적 식견을 지닌 소믈리에들이 출현하면서 1980년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와인들을 고객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와인과 음식을 매칭(matching)하는 식도락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파커는 지난 25년에 걸쳐 글로벌 와인혁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창의적 정열과 비전을 지닌 수많은 와이너리 소유주와 와인 메이커들 그리고 전문성을 갖춘 와인 수입상 덕택이라고 강조한다. 1978년 이후 매년 평균 1만병의 와인을 시음해 온 파커는 25년 동안 25만병을 시음했다면서 결론적으로 2003년 시점에서 볼 때 와인의 품질은 모든 와인산지, 모든 가격대에 걸쳐 25년 전보다 월등하게 향상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와인의 장래를 매우 낙관적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 와인평론가 이세용 -

다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

[세계 와인산업과 와인문화의 회고와 전망]
1. 와인산업의 눈부신 변화와 발전 (회고)
2. 와인의 유통혁명과 와인 웹 사이트의 발전(전망)
3. 프랑스 와인산업의 위기와 코르크 마개의 퇴출
4. 스페인 와인의 부상
5. 말벡 품종의 품질 상승과 미국와인 생산지역의 변화
6. 떠오르는 와인산지 이탈리아 남부
7. 품질대비 가치있는 와인 선택과 와인의 다양성


[ 필자소개 : 이 세용 ]

- 1953년 생
- 서울고,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
- MBC 문화방송 국제협력부에 근무하면서 외국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던 중
와인에 대한 심도 있는 학습과 연구를 하게 되었다.
- 특히 신세계 대륙의 와인에 대한 정보와 세계적 와인 평론가들에 대한
높은 관심과 견해를 가지고 와인평론가로서 와인산업에 기여하고 있다.
- 현재는 MBC 문화방송 통일방송협력단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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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 와인산업과 와인문화의 회고와 전망 (Ⅰ)- 로버트 파커의 견해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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