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와인 문화는 와인의 역사나 한 병의 와인이 생성되기까지 걸리는 인내의 시간에 비하여 아주 짧다고 할 수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1947)'中>
그래서 와인을 대할 때 마다 필자인 나는 이 시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떨어지는 국화 꽃잎을 보면서 이른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대던 기억을 떠올리는 시인의 다감성이 와인이 만들어 지는 과정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고 과연 나는 와인을 어떻게 즐기고 있는 지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와인 한 병을 위해 농부들은 일 년 내내 겨울철 가지치기를 시작으로 해서 밭갈이, 잡초 뽑기, 곁 가지치기, 열매 솎아내기에 땀과 노력을 쏟는다. 그리고 농부들의 이러한 정성 속에 포도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여러 층의 토양으로부터 정갈한 물과 각종 영양분을 빨아 올려 알알이 고이 간직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포도가 수확되어 발효와 숙성의 과정에서 고유한 맛과 향까지 생성케 되니 와인이야말로 대지(大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순수한 생명수(生命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익어가는 포도송이 | 2) Hand picking | 3) 분 쇄 |
하지만 요즘 한국에서 와인을 마시는 이들은 중 몇이나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할까 싶지 않다. 이들에게 와인은 건강 음료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 또는 숙취 없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이성을, 특히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방법에 그치지 않나 하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걱정이다.
물론 안 좋은 음주 문화를 수정하고 보다 알찬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건강에 신경을 쓰는 것도 중요하다. 와인이 (특히 레드 와인) 우리 몸 안에서 해로운 콜레스테롤의 생성을 억제하는 등 고혈압과 심장병의 예방 및 치료 효과를 주며 피부암과 유방암의 발병률을 줄이는데 도움을 준다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점차 확산되어 가는 외국 식습관- 육류와 덜 자극적인 음식에 대한 선호 형태와 맞물려 한국에서의 와인 보급을 더욱 손쉽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와인은 취하기 위해서 보다, 그리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보다 식사와 함께, 그 맛과 향을 즐기고, 그러므로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참된 ‘삶의 멋’을 즐길 수 있게 하기에 더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와인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하게 변화하는 황홀한 경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마시는 그 순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생성과 변화, 숙성의 전 범위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와인은 역사와 예술 그리고 심지어는 과학까지 깃든 실로 놀라운 대상이다. 와인에 들어가는 공정과 시간. 그러한 노력의 연장선 상에서 즐기게 되는 와인은 의학적인 효과에서 마시는 와인과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와인을 음미한다는 것은 풋풋한 소녀에 비유될 수 있는 햇 술의 거친 맛이 발랄하고 어여쁜 처녀로 그리고 나아가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으로, 또는 귀품이 있는 완숙한 여인에 비유될 수 있는 섬세함과 완숙미로 숙성되는 모든 단계를 즐김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선머슴에 비유될 수 있는 와인이 더벅머리 총각으로, 그리고 나아가 강건하고 강력한 영화배우 존 웨인 또는 섬세하면서 우아한 연기를 보여준 데이비드 리븐에서 느낄 수 있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와인으로 발전되는 맛의 전모를 깊게 느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가까운 데서 비유를 찾자면, 우리가 겉 저리와 막 담근 김치의 맛에서부터 김장 김치의 그윽한 감칠 맛까지 전부를 그리고 그 각각을 다 즐기는 것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처럼 다양하고 다채로운 와인을 단순한 양조의 산물이 아니라 신비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고 이제 와인을 막 소개 받은 이들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한국은 풍토상 와인 생산에 적합한 포도가 나지 않아 와인과 친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8년의 서울 올림픽, 정부의 개방정책과 국제화 추진 노력, 크고 작은 다양한 국제회의의 개최 등의 영향으로 지난 10여 년 전부터 와인 소비량이 증가하였다. 1997년 말에 닥친 IMF위기가 국민의 소비환경을 위축시켰고 이는 와인의 소비량의 급격한 감소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에 들어서서는 다시 소비량이 회복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증가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이와 같은 소비의 증가는 향상된 경제 여건도 있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와인에 대한 소개나 다양한 와인관련 정보들이 고정적으로 소개하고 와인전문 매장, 와인 바, 와인 관련서적의 출간 등이 눈에 띄게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와인 전문가를 육성하는 '와인학교'도 여러 곳에 설립되었으므로, ‘와인은 술이다’, ‘와인은 건강에 좋다’는 극히 제한된 의미에서 즐기는 데서 나아가 와인을 그 자체의 매력으로 받아 들이게 될 날이 멀지 않은 듯 하다.
물론 아직 사회 전반적인 지지가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인터넷 등을 통해서 각 와인의 가격과 품질에 대한 많은 정보가 제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비자들은 비싼 값을 주고서야 와인을 구입해야 한다. 이는 와인에 입문하는 이들로 하여금 저가의 와인을 찾게 하고 결과적으로 고품질의 와인을 통해 진정한 와인을 맛을 느끼기 보다는 대량 생산되는 저가의 와인을 이용해 취하는 문화만을 지속시킬 것이다.
와인의 적절한 가격을 위해서는 주세를 낮추는 방안도 모색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와인을 들여올 때 마다 관세청에 샘플을 제공해서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것도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보다 깊고 넓게 뿌리내리는 건전한 와인문화를 위해서 수입상들도 지나친 이윤 추구보다 보다 실질적인 가격 책정을 통해 와인 시장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도모해야 한다. 와인 전문점들도 더욱 그 숫자를 키워 소비자들에게 전문적인 지식과 질 좋은 품질의 와인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갖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와인 소비자들이 허식이나 왜곡된 와인 정보를 기반으로 와인을 마시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아직 나아갈 길이 많긴 하지만, 2000년을 기점으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 한국의 와인 문화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해외 생활을 하고 온 이들이 제대로 된 와인 문화의 전도사들이 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보여주기 위한 소비보다는 의미 있는 소비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한 병의 와인에 담겨 있는 역사, 이를 즐기는 현재, 그리고 이를 통해 앞으로 더욱 발전될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한꺼번에 다 마시기 보다는 그 미래를 맛보기 위해 장기 보관 숙성 시키는 데서 오는 만족감까지 모든 것은 즐기는 문화가 하루 속히 한국에도 자리 잡길 바란다.
[_이석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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