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상영된 와인 관련 영화를 꼽으라면 <사이드웨이(Sideways)>, <와인 미라클(원제 Bottle Shock)>, <어느 멋진 순간(원제 A Good Year)> 등이 떠오른다. 특히 <사이드웨이>는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오스카 상까지 거머쥐었고, <와인 미라클>과 <어느 멋진 순간>은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꾸준히 회자된 영화다. 이 외에도 와인을 주제로 다룬 영화(또는 다큐멘터리)가 간혹 제작되고 있지만 아쉽게도 국내에 공식적으로 상영된 적은 거의 없다. (2013)도 그 중 하나인데,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봄, 여름, 수확기 그리고 겨울로 이루어진 “부르고뉴의 1년”과, 빈티지 자체가 삶의 역사인 부르고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첫 장면에 나레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부르고뉴 지방의 포도밭
여기까지 보면 영화의 주인공이 마치 수입상 소니에, 와인 양조가 그리고 그의 가족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모든 장면과 등장인물의 구심점은 다름아닌 포도밭이다. 감독 데이비드 케너드(David Kennard)는 포도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와인 양조가의 한 해를 통해 부르고뉴의 역사, 지형,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결국 와인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와인에 온전히 초점을 맞춘 심도 있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영화의 배경이 된 부르고뉴의 2011년은 호의적이지 않은 빈티지에 속한다. 봄에는 소나기, 여름에는 가뭄과 폭염, 그리고 수확 직전 우박과 폭풍으로 인해 포도는 많은 손실을 입었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채 포도를 수확하고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양조가의 노력과 정성이 그대로 전해지는데, 와인을 단지 “맛이 있다, 없다”로만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태도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마음 한 켠이 숙연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 "부르고뉴의 여제"라 불리는 르루아 여사는, 1955년에 아버지를 도와 네고시앙으로 와인 업계에 발을 들여 놓음과 동시에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e Conti)의 양조가로서 큰 명성을 얻은 부르고뉴의 아이콘 와인 양조가이다. 그녀는 부르고뉴 지역에서도 비교적 빠른 1989년부터 비오디나미 농법을 도입하였으며, 재배농법, 양조 철학, 와인 감별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르고뉴의 전설적인 양조가 중 한 명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와인은 하나같이 양조가를 쏙 빼 닮았다. 8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도 재배, 수확, 양조 전반에 걸쳐 전방위로 활약하는 랄루 비즈 르루아 여사는 와인을 마치 자신의 자녀 대하듯 이야기한다. 아이가 엄마를 보고 반가워하듯, 포도나무들이 자기를 보고 행복해 하는 것을 느낀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사랑과 열정이 가득하다.
▲ 미셸 모레이와 그의 아들 티보. 부르고뉴에서는 자녀들이 도멘을 이어 받는다. 이전 세대들이 주로 아버지나 할아버지로부터 양조 기법을 전수 받았다면, 2011년 영화 촬영 당시 30세인 티보 세대의 젊은 양조가들은 양조학교에서 전문교육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 미셸 모레이와 파비안느 코피네가 결혼하면서 선물로 받은 7 헥타르의 땅에서 시작한 도멘 모레 코피네, 이곳의 수확기 모습 역시 인상적이다. 이들 부부는 수확을 도울 인부들이 도착하는 기차역까지 나가 그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수확이 진행되는 2주 동안 파비안느는 하루에 두 번씩 네 가지 코스 요리로 20여 명의 식사를 혼자서 준비하는데, 이는 여간한 책임감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소규모 가족 도멘일수록 생산, 관리, 양조, 식사, 사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가족 구성원 모두가 힘을 모아 처리할 수 밖에 없는데, 외부의 조력을 받는 때는 오로지 가을 수확 시기뿐이다.
겨울이 되면 양조가들은 지하로 내려간다. 이들은 지하에 마련된 저장실에서 숙성 중인 와인이 내는 소리를 듣고 양조 과정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미셸 모레이의 아들이자 장차 도멘 모레 코피네의 미래를 짊어질 티보는, 지하 와인 저장실이 빚어내는 경건한 침묵에 대해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낀다. 세상의 어떤 소리와도 단절된 그곳에서 그는, 이 저장실을 만든 16세기 시토 수도회 성직자들의 와인에 대한 종교에 가까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하 저장실에 들어가는 일이 일종의 신성한 종교적 체험이었다면서 말이다.
또 한가지 인상 깊은 것은,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 티보의 할아버지가 1976년 빈티지 와인을 들고 나오는 장면이다. 삼십 년도 전에 본인이 만든 와인을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이 장면은 영화의 모든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아버지 앙리 페로 미노(Henri Perrot-Minot)의 명성을 이어 도멘 페로 미노의 위상을 한층 격상시킨 크리스토퍼.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와인은 지극히 현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으나, 영화를 보는 동안 그가 아버지의 경험과 도멘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부르고뉴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도멘 페로 미노에서는 첨단 과학과 기술을 도입한 양조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NASA의 우주 센터를 방불케 한다.
“I respect you workers. So I hope you respect my work.”
수확을 앞둔 포도밭에서 도멘 페로 미노의 크리스토퍼 페로 미노는 인부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일년 간 공들여 키운 포도를 조심스럽게 다뤄달라는 당부의 말이다. 언급했다시피 부르고뉴의 2011년은 양조가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해였다. 영화에서는, 날씨 탓에 썩은 부분이 많아서 한 알 한 알 건강한 포도만 골라내고 이렇게 골라낸 포도를 최적의 상태에서 양조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크리스토퍼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언젠가 기자가 참석했던 시음회에서 앙리 페로 미노의 와인과 크리스토퍼 페로 미노의 와인을 비교하며 설전이 오갔던 순간이 떠오르면서 미안한 감정이 밀려온다.
마지막으로, 언제든 최신 첨단 기술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포도를 밟아 으깰 때 전해지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비로소 양조가 가능하다는 크리스토퍼의 말을 전해야 할 것 같다. 이 문장을 비롯한 영화 전반을 통해, 이들 부르고뉴의 와인 양조가들은 스스로를 절대 자연과 떼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땅과 자연을 존중하는 이들 양조가의 정신이야 말로 부르고뉴 와인의 가치를 높이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화에 등장한 양조가 한 명 한 명을 다시금 떠올리며, 天地人의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와인을 탄생시킨다는 진리가 이곳 부르고뉴에서 만큼은 영원히 빛을 발하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및 참고자료 : http://ayearinburgundy.com/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