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자는 거인’으로 불려왔던 스페인은 몇 해전부터 기지개를 활짝 펴고 있는 듯 하다. OIV(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Wine and Vine)의 통계에 따르면 스페인의 포도밭 면적은 1백만 헥타르로 세계 1위이며(2011년 기준), 생산량은 2012년 기준 3천만 헥토리터로 프랑스, 이태리에 이어 3위를 지키고 있다. 와인 수출 부문에선 금액으로 3위, 물량으로 2위를 차지하는데 주요 수출국은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이며 최근 중국과 러시아, 일본이 바짝 뒤따르고 있다.
 
한편, 이런 기록들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점은 스페인 와인이 양보다 질적인 측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2년 미국의 스페인 와인 수입량은 5천2백만 병으로 전년 대비 8% 늘었으며 꾸준히 상승하는 추세다. 스페인 와인의 이러한 성장세는 지속적인 홍보 활동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유명한 요리사이자 엘 불리(El Bulli)의 오너인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와, 엘 불리에서 경험을 쌓은 또다른 요리사 호세 안드레스(Jose Andres)를 통해 스페인 요리가 소개되고 사랑 받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리오하나 리베라 델 두에로 뿐만 아니라 토로(Toro), 후미야(Jumilla)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의 와인들을 대형 마트 와인코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알바리뇨(Albarino)나 베르데호(Verdejo) 같은 스페인의 화이트 와인은 레스토랑에서 글라스 와인으로 활발히 팔린다. 또한 스페인 와인은 주로 15~20불 사이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훨씬 비싼 스페인 와인들도 못지 않게 선전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잘 만든 스페인 와인이 보르도와 나파의 값비싼 와인들의 훌륭한 대안으로 손색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가 와인 시장에서 스페인 와인은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높은 품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써 합리적이고 현명한 와인소비자들의 구매를 유도하고 있다.
 
국내 와인 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무역협회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3년 4월까지 스페인 와인의 수입 금액은 전년 대비 50.7%나 상승했다. 이는 여덟 개 주요 와인 수입국가 중 최대 성장률로, FTA 효과를 보는 미국 와인의 수입보다도 높은 수치다. 저렴한 가격대의 스페인 와인이 저가 와인 시장의 최대 강자인 칠레 와인의 경쟁자로 떠오른 것이 아니냐는 분석과 함께, 고가의 스페인 와인 성장 또한 기대된다.
 
Castell del Remei castle.jpg
▲ 이 글에서 소개할 까스텔 델 레메이 와이너리의 내부에 위치한 성.
 
 
프랑스 품종 도입한 스페인 최초의 와이너리, 까스텔 델 레메이
 
이런 분위기를 타고 최근 수입사 와이넬 주최로 '까스텔 델 레메이(Castell del Remei) 와인 디너’가 열렸다. 까스텔 델 레메이는 1780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가족 경영 체제로 운영되어 오면서 연간 8십만 병 가량의 와인을 생산한다. 와이너리는 바르셀로나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카탈로니아 지방 레이다(Lleida) 주의 페넬레스(Penelles) 에 자리잡고 있다.
 
까스텔 델 레메이의 설립자 이그나시 지로나(Ignasi Girona)는, 보르도를 방문하여 익힌 포도재배 기술과 양조기술(특히 와인 숙성 기술)을 자신의 와이너리에 적용해 나갔다. 그 중 중요한 하나는 미국산 오크통에서 와인을 숙성시키는 것으로, 별도의 숙성 없이 와인을 판매하던 것이 관행이었던 당시에 까스텔 델 레메이는 카탈로니아에서 오크 숙성시킨 와인을 브랜드화해서 판매하는 최초의 와이너리가 되었다. 1889년부터 1907년 사이 까스텔 델 레메이는, 생산한 와인들이 세계 와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카탈로니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품질 와인 생산자로 등극하게 된다. 와인을 마셔보면 알 수 있듯이, 까스텔 델 레메이의 오크 사용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Castell del Remei cellars.jpg
 
또다른 중요한 사실은, 1921년 까스텔 델 레메이의 양조 시설을 확장하면서 스페인 최초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세미용 품종을 프랑스에서 들여와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카탈로니아를 비롯한 스페인 대부분의 와인산지에서는 토착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 벌크 단위로 저렴하게 판매하는데 치중했다. 까스텔 델 레메이는 새롭고 차별화된 와인을 만들고자 프랑스 포도 품종을 과감하게 도입했고, 토착품종으로 와인을 만들던 평범한 와이너리에서 고품질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로의 대전환을 시도했다. 한편, 까스텔 델 레메이는 프랑스 품종은 프랑스산 오크에, 스페인 품종은 미국산 오크에 숙성시킨 후 품종 간 블렌딩하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였다.
 
Castell del Remei vineyards.jpg
까스텔 델 레메이의 포도밭 면적은 140헥타르로,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시라,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같은 국제 품종과 더불어 템프라니요, 가르나차, 마카베오 같은 토착품종을 재배한다.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약 25년이다. 포도밭은 해발 270m의 평평한 평지에 위치하는데, 지중해성-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이 외에도, 까스텔 델 레메이의 와인 양조 기법 중 주목할 점이 있다면 바로 블렌딩이다. 까스텔 델 레메이는 프랑스 품종과 스페인 토착 품종의 블렌딩을 통해 완벽한 균형미를 추구한다. 그 예로 소비뇽 블랑과 마카베오, 또는 샤르도네와 마카베오를 블렌딩한 두 가지 화이트 와인을 들 수 있다. 또한 레드 와인의 경우 최대 다섯 가지 품종을 블렌딩하는데, 각 품종들이 상호 보완하여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은 경이롭기까지 하다(이하는 와인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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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스텔 델 레메이 블랑 플라넬 2012
Castell del Remei blanc PLANELL 2012
Macabeo 55%, Sauvignon Blanc 45%
 
블랑 플라넬은 포도밭이 위치한 “평원”을 뜻한다. 편하게 마시기 좋은 화이트 와인으로 오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청량함이 살아있다. 청사과, 복숭아, 감귤류, 라임 향이 매우 신선하다. 여운에서 쌉싸래한 맛이 느껴져서 깔끔한 뒷맛을 선사한다. 식전주로 마시기에 좋고, 가벼운 샐러드나 해산물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까스텔 델 레메이 오다 블랑 2011
Castell del Remei ODA blanc 2011
Macabeo 50%, Chardonnay 50%
 
블랑 플라넬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샤르도네와 마카베오의 조합으로, 8개월 동안 각각 프랑스산과 미국산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후 블렌딩한다. 견과류와 열대과일, 바닐라, 구운 향이 복합적으로 난다. 오크 풍미가 과하지 않고, 꽃 향기가 나면서 신선함도 느껴져 두 품종 간 조화를 잘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와인만 마셔도 좋지만 흰 살 생선 요리나 크림 파스타와 잘 어울린다.
 
 
까스텔 델 레메이 고띰 브루 2010
Castell del Remei Gotim Bru 2010
Tempranillo 35%, Garnacha 32%, Cabernet Sauvignon 20%, Merlot 8%, Syrah 5%
 
좋은 품질과 좋은 가격을 갖춘 덕분에, 소위 “잘 나가는” 베스트 셀러 와인이다. 1923년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바르셀로나를 방문했을 때 환영 만찬 공식 와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7년 빈티지부터 총 일곱 차례나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90점 대의 높은 점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Best Buy’로도 뽑히면서 가격 대비 품질의 우수성과 일관된 품질을 인정받았다. 붉은 과실과 향신료 향과 구운 향이 나며 신선한 과실의 맛이 난다. 중간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지고 부드러운 타닌과 산도의 균형도 좋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마시기 편안한 레드 와인으로, 음식과 무난하게 어울린다는 것도 장점이다. 샐러드, 생선요리, 고기요리 등 여러 요리와 매칭이 가능해서 전천후 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코리스 2010
Sicoris 2010
Garnacha 35%, Cabernet Sauvignon 30%, Tempranillo 20%, Merlot 10%, Syrah 5%
 
강렬한 붉은 색 레이블의 시코리스 와인은 포도밭 근처에 흐르는 강의 이름을 차용했는데, 레이블에도 산과 강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원래 미국과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데 독일의 루프트 한자(Lufthansa) 비즈니스 클래스 기내 와인으로 선정되어 화제가 되었다. 고띰 브루과 같은 포도 품종으로 구성되어 있고 10개월 동안 미국산과 프랑스산 오크에서 숙성시킨 후 블렌딩했다. 검붉은 과실의 향이 달콤하고 밀키하게 느껴지며 구운 향과 꽃 향기도 이어진다. 깊고 부드러우면서 구조감도 좋으며 풍미가 매우 오랫동안 지속된다. 바비큐 또는 소시지가 들어간 피자와 마시면 잘 어울릴 것이다.
 
 
까스텔 델 레메이 오다 2008
Castell del Remei ODA 2008
Merlot 60%, Tempranillo 25%, Cabernet Sauvignon 15%
 
고띰 브루, 시코리스와 달리 메를로가 절반 이상 블렌딩된 와인으로, 특히 스페인 와인 초보자가마시기에 부담이 없겠다. 12개월 동안 미국산과 프랑스산 오크에서 숙성시킨 후 블렌딩했다. 4-5년 더 숙성 가능할 것 같은 와인으로 산딸기, 검은 과실, 감초, 클로브 또는 커리를 연상시키는 매콤한 향도 난다. 입 안에서 부드럽게 넘어가지만 힘이 있어 풍미가 오래 지속된다. 메를로 품종의 영향이 잘 드러나는 우아한 와인이다.
 
 
까스텔 델 레메이 '1780’ 2006
Castell del Remei '1780’ 2006
Cabernet Sauvignon 50%, Tempranillo 20%, Garnacha 15%, Merlot 5%, Syrah 5%
 
까스텔 델 레메이의 설립 년도를 와인 이름으로 사용함으로써 2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대변해주는 플래그십 와인이다. 2013년에 매거진 “레스토랑”이 전세계 1위로 선정한 레스토랑 “EL CELLER DE CAN ROCA”의 와인리스트에도 올라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 품종으로 했고 18개월 동안 프랑스와 미국산 새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후 추가로 2년 동안 병 숙성시켰다. 고띰 브루, 시코리스, 오다에 비해 더 힘차고 깊은 맛을 지닌다. 발사믹 뉘앙스, 초콜릿, 검은 자두, 블랙베리, 커피 향이 복합적으로 풍긴다. 견고한 구조감과 실크 같이 매끄러운 질감을 선보인다. 깊이감과 함께 여운 또한 길게 이어지며 상당한 무게감을 준다. 스테이크 같은 고기요리와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와인이다.
 
 
한편, 까스텔 델 레메이는 독특한 방식으로 빈티지를 표기하는데, “2000년”을 뜻하는 “DOSMIL”에 뒷자리 수 두 개를 덧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0 빈티지는 DOSMIL에 10을 붙여 DOSMIL10로 표기하고, 2011 빈티지는 DOSMIL에 11을 붙여 DOSMIL11로 표기한다. 한편, 스페인 와인의 숙성 등급을 나타내는 크리안자, 리제르바, 또는 그랑 리제르바라는 표기를 까스텔 델 레메이의 와인 레이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리오하나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는 숙성 등급을 표기하지만 발렌시아와 카탈로니아에서는 표기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까스텔 델 레메이는 230년 넘게 이어진 와인 생산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지금의 상태에 안주하지 않는다. 까스텔 델 레메이는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현대적이고 진취적인 와인 생산의 철학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스페인 최초, 카탈로니아 최초’라는 명예로운 수식어를 획득하였으며, 우아하고 균형 잡힌 와인 스타일을 완성해냈다. 국내 와인 시장에서 스페인 와인의 성장을 점치며, 견실한 까스텔 델 레메이의 활약 또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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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_ 와이넬 (02 325 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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