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글 [이브 퀴에롱의 귀환과 북부 론의 재건]에서는, 한 때 보르도의 정상급 와인들과 겨루는 품질과 명성을 지녔던 북부 론의 와인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배경,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이후 북부 론의 와인이 명성을 되찾고 종종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명성을 능가하는 와인을 만들게 된 과정을 다루었다. 글의 마지막에는, “중요한 것은 완벽한 와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좋은 상태의 포도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이브 퀴에롱의 양조 철학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덧붙였다.

두 번째 글 [콩드리유의 연금술사, 이브 퀴에롱]에서는, 2012년의 기후가 수확에 미친 영향과 더불어 지구온난화에 대해 언급하였고,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퀴에롱을 “천재”라고 표현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비오니에’ 와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단 두 번의 인터뷰와 몇 차례의 와인 시음만으로, 그 와인과 와인양조가를 모두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꾸준한 만남과 시음을 통해 매번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한걸음씩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2013년 겨울 한국을 다시 찾은 이브 퀴에롱과의 세 번째 만남 역시, 작년과는 또다른 이야기와 또다른 와인들로 새롭게 채워졌다.


와인은 사람을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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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브 퀴에롱은, 샤토 그리에와 에르미타주를 제외한 모든 북부 론 AOC 와인을 만든다. 3.5헥타르에 지나지 않던 자기 소유의 포도밭 면적이 20여 년 사이에 약 50헥타르로 늘었고, 게다가 현재 양조장을 증축 중이라니, 이브 퀴에롱은 분명 성공한 와인양조가다. 하지만 포도밭 확장과 양조장 증축은 그에게 있어 “더 많은 노동”에 다름아니다. 기계로는 결코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일은 온전히 그의 두 손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와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좋은 상태의 포도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그의 소신은, ‘자연에 순응하되 인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불리한 조건에 대처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포도가 만생종이냐 조생종이냐에 따라, 포도송이가 땅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 혹은 포도송이와 잎이 우거진 정도를 와인양조가들은 결정해야 한다. 즉, 수확기에 최대한 잘 익고 건강한 상태의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 자연적인 방법으로 포도가 익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포도 재배상의 이유로, 포도의 건강상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와인양조가라면 포도밭을 떠나지 않고 매번 상태를 점검하고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좋은 포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종종, 최신 기술로 무장한 양조기술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무관심’은 순전히 기자의 표현으로, 처음에'경멸’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수정하였다). 퀴에롱은,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기만 하면 양조 과정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도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반면, 품질이 썩 좋지 않은 포도를 각종 상업 제품들로 보완하는 (예를 들면, 산도, 당, 효모 등을 첨가하는 등) 기술의존적인 와인양조가들이 많은데, 이들은 결코'장인’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와인양조가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임해야 할 ‘포도밭에서의 노동’을 게을리하여 포도의 질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겠지만) 퀴에롱의 말대로 와인양조가의 노동의 강도와 고민의 흔적이 포도의 품질에서 드러나는 것이라면, “포도는, 또는 와인은 그 사람을 닮는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포도에 맺힌 와인양조가의 땀방울까지 헤아리면서 와인을 감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온전히 와인애호가들의 자질에 달려있는 문제겠지만.


이브 퀴에롱의 비오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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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dP 비오니에,콩드리유)

퀴에롱은 뱅드페이(VdP)와 콩드리유 AOC, 두 가지의 비오니에 와인을 생산한다. 일반적으로 VdP급 비오니에 와인은 풍미가 분명하고 재빨리 인식되므로 마시는 이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다. 퀴에롱의 VdP 비오니에는 흰 꽃 향, 잘 익은 배와 흰 복숭아의 풍미를 드러내며 비스킷처럼 고소한 풍미가 살짝 스친다. 또한 기름처럼 매끈한 질감이 입 안을 감싼다.

한편, 콩드리유 AOC는 포도나무가 토양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어 미네랄 풍미가 한층 짙고 섬세한 비오니에 와인을 생산한다. 퀴에롱의 콩드리유 와인은 잘 잡힌 균형, 은은하고 기분좋게 퍼지는 꽃 향, 구슬이 혀 위를 구르는 것처럼 매끄럽고 유연한 질감을 선보인다. 비오니에 와인은 출시 후 5년 내 소비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브 퀴에롱 콩드리유의 경우 5-10년 사이에 소비해도 될만한 구조감과 농축된 풍미를 지니고 있다.


이브 퀴에롱의 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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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VdP급 시라, 생 조셉 라마리벨르, 생 조셉 라 세린느, 코트 로티 마디니에르, 코트 로티 테르 솜브르)

퀴에롱의 VdP급 시라는 단순하고 분명한 과일 풍미, 매끄러운 타닌, 튀지 않는 산도 덕분에 마시기 편한 스타일의 레드 와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일 향에 이어 은은하게 장미 향도 드러난다.

퀴에롱이 북부 론의 생 조셉 AOC에서 만드는 두 가지 시라 중 하나인 ‘라마리벨르(L’Amarybelle)’는 과일 향에 더하여 흰 후추와 부싯돌의 향이 옅게 드러나며, VdP급 시라에 비해 과즙과 타닌이 좀더 풍성하다. 빈티지에 상관없이 일관된 품질과 풍미를 선사하는 가격 대비 밸류 와인이다. 생 조셉 AOC에서 생산하는 또다른 레드 와인 ‘레 세린느(Les Serines)’는, 라마리벨르의 풍미에 화사한 민트 향이 한겹 더해져 신선하고 상쾌한 느낌을 준다. 타닌은 살집 있으며, 서서히 짙어지는 체리 향이 입 안에서 오래 남는다.

퀴에롱은, 에르미타쥬 AOC와 함께 북부 론의 최고급 와인산지로 인정받는 코트 로티 AOC에서 황홀할만큼 매력적인 레드 와인을 만든다. 먼저 ‘마디니에르(Madiniere)’는, 입안의 양쪽 볼을 미세한 타닌이 덮는데, 그 질감이 생 조셉 AOC 와인에 비해 훨씬 부드럽다. 또한 검붉은 베리와 은은한 민트 향, 훈연 향 등 복합적인 풍미를 뽐낸다. 한편 ‘테레 솜브르(Terres Sombres)’는 강렬한 풍미와 살집 있는 과즙으로 다소 남성적인 인상을 남기며,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잘 익은 베리와 은은한 향신료의 풍미 그리고 미세한 타닌은 긴 여운으로 이어진다.


이브 퀴에롱의 브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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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로티 브라소, 생 조셉 브라소)

브라소(Bourasseau)는 이브 퀴에롱이 콩드리유 AOC, 생 조셉 AOC, 코트로티 AOC 내의 가장 훌륭한 토양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드는 와인이다. 생산량은 각각 3개 바리크 밖에 되지 않는데, 이 또한 퀴에롱의 기준에 미치지 않으면 생산하지 않는다. 이처럼 브라소는 매년 생산되는 와인이 아닌데다가 생산량마저 극소량이기 때문에 쉽게 접하기 힘든 와인이다. ‘브라소’라는 와인의 이름은, 이 특별한 와인의 레이블을 그린 화가 로버트 브라소의 성을 딴 것이다.

이브 퀴에롱 방한 기념으로 신사동의 아카데미 듀뱅에서 열린 세미나에 2007년 빈티지의 생 조셉 브라소와 코트 로티 브라소가 등장하여 참가자들의 뜨거운 기대를 모았다. 두 와인 모두 2년 가까이 오크통 숙성을 거친 후 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나, 풍미와 질감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었다. 코트 로티 브라소의 경우, 신선한 포도와 검붉은 과일의 풍미가 강렬하고, 뒤를 잇는 향신료의 풍미가 매혹적이다. 풍만한 보디감은 매끄럽고 미세한 타닌과 어우러져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완벽한 포도로 만든 완벽한 와인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한편, 생 조셉 브라소는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한 와인이다. 코트 로티 브라소에 비해 풍미의 복합성은 다소 덜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말린 과일과 가죽 등의 다양한 향이 은은히 피어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살집 있고 매끄러운 질감을 지녔으나 수렴성이 강한 편이다. 코트 로티 브라소의 절반 가격임을 감안할 때, 생 조셉 브라소의 품질 대비 가치는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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