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로마 시대에도 보르도의 포도주는 그 양질의 품질로 인정 받았으며 많은 문서나 고고학적 자료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지롱드 지역에 처음으로 포도 나무를 들여온 이들이 로마인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처음으로 포도나무를 경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로마인들이 버디가라(Burdigala)라고 부르던 보르도市는 와인 무역과 선적의 중심지로서 와인생산지역으로 지정되기 전부터 이미 와인을 생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 윌리암 영거는(William Younger)는 그의 저서 Gods, Men and Wine에서 1세기 이 지역의 포도주 재배 가능성을 눈여겨 보았으며, 지중해로부터 북쪽과 서쪽의 골(Gaul) 지방1 을 통해서 포도나무의 이동진전이 서서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AD 92년 로마 제국의 곡물 부족 현상으로 이태리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포도 재배를 자제하라는 도미티언 황제의 칙령이 하달되어 포도 농원의 확장은 일시 중지 되었다. 4 세기까지 포도 농원의 신장이 어려울 것으로 보이던 것이 AD 280년 프로버스 황제에 의한 도미티안 칙령의 페지로 포도재배가 다시 활성화 되었고 지롱드 지역에도 광범위하게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했다. 비록 일부 포도 나무는 보디가라市 주위 땅에서 경작이 되지만 앙트르 두 메르(Entre - deux - Mers)의 높은 지대와쎙테밀리옹 주위의 도르도뉴 계곡 위에서 보다 좋은 품질의 포도가 경작되었다.
이 당시 대부분의 보르도 와인과 포도 농원의 첫 기록자들이 재배지를 소유하였는데 Ausonius 이란 사람 또한 자기의 이름을 따서 재배지의 이름을 지었다. 오조니우스(Ausonius)는 AD 310 년 보르도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 생의 전반기를 인문학에 몰두하였으며 그 후 보르도 대학교의 수사학(Rhetoric) 교수로 30여년 동안 재직하였다.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그라시안(Gratian)의 가정 교사로 임명을 받았고 그라시안이 로마제국의 횡재가 되었을 때 골(Gaul)의 집정관이 되었다가 후에 총독이 되었다. 그는 AD394 혹은 395년 사망하였다. 오조니우스는 시인이며 또한 포도 농장의 소유주다. 은퇴 후 그는 1000에이커의 토지에 100에이커의 포도 농원에서 생애를 보냈다. 그는 지롱드의 유명한 와인에 관해 자주 얘기 하였으며 노을로 노랗게 물든 가론강에 비치던 자신의 포도밭에 대한 얘기도 했다고 한다.
이 포도 농원은 오조니우스의 아버지 소유로 가론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 후 오조니우스는 보르도의 교외 지역인 쌩테밀리옹과 쌩톤지(Saintonge)에 토지를 구입하였다. 오조니우스가 루시아나컴에 살았다고 하는 지방구전의 증거로 샤또 라 카퍼리에르(Chateau La Gaffeliere) 땅에 샤또 오존 포도 농원이 자리하였으며 이 농원의 기슭에 물랭 더 파라(Moulin du Palat)라고 부르는 중요한 프랑스 로만 시대의 빌라 잔유물이 제시된다. 남쪽으로부터 도르도뉴강의 북쪽 뚝에 자리한 길고 곧은 길로 쎙테밀리옹에 접근하게 되면 샤또 라 가퍼리에르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부터 좌현의 포도주 저장 창고와 우현의 샤또 사이를 통과하게 된다. 그러고는 좁은 계곡을 향한 시 자체의 좁은 돌길이 있다. 좌현의 가파른 경사면에는 남쪽과 동쪽으로 향한 조그마한 포도농원이 있으며 이 포도농원이 바로 7헥타아르의 샤또 오존이다.
샤또 오존의 후면에는 이웃 벨레르에 귀속하는 고원에 여러 포도원이 자리한다. 이중 어떤 포도원은 현재 가시나무 덤불과 금작화 뒤에 가려 약간 황페화되어있다. 이는 오조니우스 시대부터 18세기 초까지 포도나무는 어떻게 재배하여야 하는 지를 분명히예가 된다. 고대의 방법은 땅 표면에서 단지 수센치 아래에 암반을 파서 만든 똑바른 도랑에 포도나무를 경작하는 것이었다. 도랑의 양쪽 골은 석회암 종류굴에서 나온 돌로 보호하였다. 그리고 이때 굴착한 굴은 포도주 저장고로 사용하였다. 로마 제국은 많은 기술을 터득하였으며 이 기술들을 해외에 수출하였고 각 국가들은 이를 기반으로 서서히 토작화시켰다.
샤또 오존의 현대 역사는 18세기 초부터 시작한다. 이 재배지는 지방 유지인 장 깡뜨나(Jean Cantenat)가 1808년 그의 아들 피에레(Pierre)에게 상속을 하였으며 1718년 이래로 줄곧 깡뜨나 가문 수중에 있었다. 이 이후 곧 샤또 오존은 깡떼나의 족하 엠라파게(A.M. Lafargue) 에게 양도 되었고 라파게와 후에 그의 미망인이 소유 기간 동안 재배지는 실로 그 자체가 잘 개선되었다.
1868년 발간된 Cocks and Feret의 와인 목록에는 이웃 벨레르(Belair), 트로프롱 몽도(Troplong - Mondot), 까농(Canon) 다음으로 샤또 오존의 와인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때 샤또 오존의 연 생산량은 10-12 톤노(Tonneaux) 정도 였다. 세 우수한 포도밭은 그 당시 모두 높은 귀족의 수중에 있었으나 이들 와인의 명성과 품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캐논(Canon)은 매각 되었고 벨레르는 공유로 많은 상속인간의 분열을 초래해 라파게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샤또 오존은 19세기 최대의 재앙인 오이디움균(Oidium), 포도 나무 뿌리 진디병(Phylloxera), 포도나무 노균병(Mildew)의 삼대 악재에도 건재하여 1874년 샤또 오존은 콕스와 페레의 와인 목록에 2등급으로 기재되었으며 1898년에는 1등급이 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특일 등급의 수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 즈음에서 다시 샤또 오존의 소유권이 바뀐다. 두 번째 소유권은 1891년 에듀어드 드부와(Edouard Dubois)와 마담 라파르게의 상속녀이자 조카딸인 샤론양(Mlle. Challon)에게 이전된다. 이둘은 1891년 결혼을 하여고 그의 아주머니가 사망하기 전 수년동안을 드부와는 포도 농원을 관리하였다.2 1921년 그의 너무 이른 사망 이후 재배지는 그의 미망인과 그들의 자손 장(jean(1896 - 1974))과 세실(Cecile3)에 의해 운영되었다. 현재 샤또 오존의 소유주는 마담 두브와 샤롱과 장의 미망인이 주식의 절반을 소유하고 나머지 절반을 마셀 보디에르(Marcel Vauthier) 세실의 아들 그리고 그의 네 아이들이 소유하고 있다.
샤또 오존의 모든 포도밭은 보르도의 모든 최고 재배지 중에서 가장 작은 포도농원(7헥타르)이다. 샤또 앞의 광장에서 계곡 쪽으로 포도원 전체가 경사져 있으며 포도원의 석회석과 찰흙이 썩인 토양은 포도주에 진한 감칠맛과 응집력(농도)을 주는 꼬뜨 쎙테밀리옹의 가장 귀중한 특징이다. 농장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토양에는 모래가 더 많이 섞여 있으며 와인은 반면 더 엷어진다. 샤또의 정상 부분에는 거의 전부가 순수 석회석이고, 깊지 않은 하층은 석회석이다.
이 농원은 50%의 메를로와 50 %의 까베르네 프랑을 재배하고 있으며 아주 소량의 까베르네 소비뇽을 재배하고 있다. 남동쪽으로 향한 경사는 북쪽의 찬바람과 서쪽의 비를 막아준다. 계곡과 차폐물 때문에 샤또 오존은 1956년 2월 뽀메롤과 기타 많은 그라브 쎙테밀리옹 지역의 포도 농원을 황폐화시킨 가장 무서운 서리의 손상을 모면 하였다. 생산은 현대적 방법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와인의 맛은 진하지 않다. 1세기 전의 와인의 년 생산량은 약 10톤노(1000 Cases)이나 1970년대에는 20톤노를, 그리고 1982년에는 28톤노까지 생산한 바 있다.
샤또 오존은 보르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자연 지하 포도주 저장 창고를 가지고 있다. 쎙테밀리옹의 주택 건축을 위한 석공들의 돌 굴착 행위가 수세기에 걸쳐 확대되었다. 샤또 오존의 지하 저장 창고는 조그마한 농원이 일년 내내 필요한 저장장소보다 더 크다. 그래서 흉작 때에는 애처러울 정도다. 1984년 저장실에는 바렐이 20개 뿐이었으며 이 규모는 16세기 당시의 규모와 거의 동일하다. 샤또 오존의 와인은오크로만든 큰 발효통(Vat)에서 양조하는데 발효통 중 4개는 1979년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 바 있다. 샤또 오존은 생산연도에 따라 10~40%의 포도 줄기와 함께 28~30℃ 온도에서 발효된다. 발효(Cuvaison/Fermentation)는 3주에서 4주까지 지속되며, 와인의 감산 발효(제 2차 발효)와 와인의 배합(Assemblage /Blending) 과정을 거쳐 새 오크 통에서 16~22개월 동안 숙성시킨다. 여과(Filtering)는 하지 않는다.
샤또 오존에는 Second Wine이 없으며 심사과정에서 Grand Vin 판정을 받지 못한 와인은 벌크로 매각된다. 1991년도의 와인의 경우 전체가 매각되어 그랑 방(Grand Vin)이 생산되지 않은 적도 있다.
샤또 오존의 건물은 16세기 샤또를 기반으로 증축되었으며 19세기에 건물의 외관을 개축하여 현재는 다소 부조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건축상으로도 많은 문제를 가졌다고 지적되고 있고, 안마당의 밤나무가 대부분의 건물이 가리고 있지만,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진 샤또임에는 틀림이 없다. 광장에서 계곡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은 근사한 장관을 비롯하여 평온하고 진지한 건물의 분위기는 깊은 멋이 있다. 샤또의 두 건물 중 한 건물은 사무실로 사용되며 다른 건물은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알렌 보디에르(Alain Vauthier)가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쪽은 마담 두부와 샤롱이 이용하고 있다.
1975년까지 샤또 오존은 매력적이고 우아한 와인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강건한 와인이기보다는 순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와인이다. 본질적으로 힘이 모자라고 일등급에 어울리기보다 차라리 빨리 숙성되는 특징을 지닌 와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샤또 오존은 어떤 와인이라고 명확하게 한정되기 보다는 편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와인이었고 1953년까지 이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1947년 샤또 오존은 슈발 블랑 또는 페트뤼스 와인과비교되어 다소 힘이 적은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와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샤또 오존은 작황이 훌륭한 해에나 기존 명성에 어울리는 와인을 생산해 냈고 대부분의 경우 다소 빨리 숙성되는 묽다는 느낌의 와인을 생산했다. 1975년 이후 와인의 품질에 보다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78년부터 와인의 품질은 좋아 졌지만 아직도 슈발 블랑의 인식과 훌륭함에는 다소 못 미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도, 감칠맛, 씹히는 듯한 식감, 훌레쉬4 와 힘이 있는 와인일 뿐 만 아니라 일등급 포도원에서 생산되는 대단히 훌륭한 와인에서만 발견되는 자신을 차별화 시키는 독특함과 우아함은 석회석 토양과 경사면에 자리한 샤또 오존만의 장점이다.
[_이석기_]
1.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을 포함한 옛 로마의 속령.
2. 에듀더드 드부와 와 샤롱 부부는 1961년 이웃 샤또 벨레르(Chateau Belair)를 매입하였다. 두 재배지는 비록 와인은 물론 전적으로 분리하여 보관하기만 그 후 내내 함께 일을 한다.
3. 훗날 마담 엠보디에르 (A.M Vauthier)가 된다.
4. flesh : 추출물 특히 Body, alcohol flavour이 모두 좋으나 Tannin이 약간 부족한 경우를 지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