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끝으로 달리면서 여기저기에서 2004년을 정리하느라 바쁩니다. 매년 똑 같은 것 같지만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면 컴퓨터 하드 디스크를 정리하는 것처럼 차곡차곡 기억이 쌓이면서 감사와 반성의 마음이 저절로 생긴답니다.
웰빙과 와인
한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서 뽑은 올해의 키워드 1위는 ‘탄핵’, 2위는 ‘웰빙’이었다고 합니다. 두 단어가 대한민국 뉴스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특히 웰빙 무드는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관심과 반성을 일으켰습니다. 회식문화의 변화, 유기농산물의 급부상, 패스트 푸드의 퇴조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와인은 이 웰빙 무드의 큰 수혜자였습니다. 건강을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찾기 시작한 거죠. 잘 나가는 강남의 레스토랑이라면 모두 와인 리스트를 가지고 있고, 동네 편의점에까지 와인코너가 작게라도 마련될 정도로 와인은 우리 생활 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유통업계의 ‘데이’마케팅은 ‘와인데이’를 등장시켜 와인 소비를 촉진시켰고 와인 신용카드까지 또한 선보일 정도로 와인은 우리 생활에 친숙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와인이 친숙해질수록 와인은 그냥 마시기 보다는 향유하는 문화로 변모해 나갔습니다. 크고 작은 시음회나 이벤트가 어느 해보다 활발히 열렸고, 몬테스(Montes), 가야(GAJA), 보르도 그랑크뤼 시음회 등 해외 유명 와이너리의 방한이 줄줄이 이어져, 와인홍보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는 최악의 불황으로 인한 소비심리 감축에도 불구하고 와인 판매량은 꾸준하게 증가했음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2004년 와인 시장은 양적, 물적 성장세를 타고 있어 해외 와이너리들이 매력을 가지게 했답니다.
올해는 국산 와인이라 할 수 있는 과실주가 어느 때보다 많이 선보였습니다. ‘오디와인’, ‘감그린’ 와인, ‘복분자’ 등과 ‘샤또 마니’라는 순수 국산 와인을 생산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올해를 보내며,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칠레 와인의 인기였습니다. 지난 4월 1일부터 발효된 한국과 칠레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그 배경이 되긴 했으나, 정작 실제 소비자 가격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칠레 와인은 자극적인 식사를 즐기는 한국인의 입 맛에 적당히 잘 맞았고 숯불구이 같은 우리 요리와도 매칭이 잘 되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는 전체 수입량에서 프랑스에 이어 2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칠레 와인의 인기에는 가격대비 훌륭한 와인이라는 것도 한몫 했습니다. 와인인구가 증가하면서 내노라 하는 비싼 와인만을 쫓아다니는 성향보다 실속 있고 자신에게 맞은 와인을 찾으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을 계기로 그리스 와인이, 국내에서 소외 받았던 지역의 와인들도 소개되어 질적인 면 또한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대규모 와인 전시회 개최, 보졸레 누보의 인기 퇴보, 국산 와인셀러 출시 등 주목할 만한 일들도 많았습니다.
책장 위의 코르크
필자의 책장에는 올해 동안 마신 와인의 코르크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그 중엔 그랑크뤼도 있고 동네 마트에서 산 와인도 있고… 코르크를 하나씩 보니, 1년 동안의 기억들이 영화처럼 지나갑니다. 누군가 태어났고 누군가 새로 출발하고 누군가 떠났습니다.
이제 그 코르크들을 책장에서 비워야 할 때가 왔습니다. 2004년의 끝을 위한 와인을 준비하셨어요? 올 한해 잘 정리하시고, 2005년엔 와인과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