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주식 시장을 보면 미래의 성장성을 담은 스토리를 가진 기업들이 각광 받는다. 실적을 비롯한 펀더멘탈 보다는 기업이 제시하는 미래의 성장 스토리에 더 군침이 도는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와인도 비슷하다. 누군가 와인에 흠뻑 빠져 와인애호가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와인이 기가 막히게 맛있어서라기 보다는 와인이 가진 스토리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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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고급 보르도 와인이나 부르고뉴 와인이 와인애호가들의 수집품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것도 상당 부분 와인이 가진 스토리에서 기인한다.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파리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와인을 선정하기 위해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을 제정했다. 이후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이 등급 체계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에 매겨지는 높은 몸값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달랑 두 가지 품종으로 와인을 만드는 부르고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와인이 나온다. 10세기 이상 부르고뉴 와인산업을 관장하다시피 한 수도원들은 포도밭을 무수히 잘게 쪼개어 관리했는데, 이 때문에 부르고뉴에서는 테루아(terroir)라는 개념이 그 어떤 와인 산지보다 정교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와인애호가들은 높은 프리미엄을 부여하는 와인의 등급이나 복잡하기 그지없는 떼루아라는 개념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이들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와인 이야기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거리가 풍성한 곳은 보르도나 부르고뉴 뿐만이 아니다.  유럽에 비해 짧은 와인 생산 역사를 가졌지만, 미국 역시 금주령이라는 굵직한 스토리로 와인애호가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1920년부터 13년 가까이 지속된 미국의 금주령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미국의 와인문화를 짓밟았고, 미국은 느닷없이 독한 술에서 기쁨과 위안을 찾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금주령이 시행될 무렵, 캘리포니아에는 대략 700개가 넘는 와이너리가 있었지만, 금주령이 끝날 무렵에는 불과 140개 정도만 남았다(나중에 다시 700개로 늘어나기까지 대략 70년이나 걸렸다).

 

애석하게도 금주령은 미국 와인양조의 정수를 말살했다. 한 세대의 와인생산자로부터 다시 다음 세대의 와인생산자에게 전수되는 축적된 지식과 기술, 전통 그리고 열정 말이다. 1960년대 중반에 마침내 와인산업이 재개되었을 때, 대부분의 와인생산자들에게는 역사적인 지식도, 믿고 의지할 만한 전통도 없었다. 심지어 로버트 몬다비와 갤로 형제(20세기 후반기의 가장 성공한 와인양조가 3인)조차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와인양조법을 배워야 했다.”

(출처_ <더 와인바이블>, 캐런 맥닐 저)

 

 

1920년에 내려진 미국의 금주령은 이제 막 성장기에 들어선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의 싹을 짓밟아버렸다. 미사주를 만드는 몇몇 와이너리를 제외하고는 줄줄이 도산했고 밀수업자들만이 탐욕스럽게 배를 불려 나갔다. 오늘날 명성 높은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 중에는 이때 몰락했다가 수십 년 후 새로운 주인을 만나 기사회생한 곳이 몇몇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볼 홀(Hall) 와이너리도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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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설립되었으나 금주령 때문에 유령 와이너리가 된 Bergfeld 와이너리를 인수한 사람은 크레이그와 캐서린 홀 부부다. 캐서린 홀은 변호사, 기업가이자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낸 인물이며 남편 크레이그 홀은 홀 파이낸셜 그룹의 회장을 맡고 있다. 2003년에 Bergfeld 와이너리를 인수하자마자, 이들은 설립 당시의 양조장 건물을 완벽하게 복원한 후 그들의 성을 따 Hall 와이너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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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이너리 입구에 들어서면 와이너리를 상징하는 붉은색 조형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마치 조그마한 박물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와이너리 곳곳에 예술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각 작품의 의미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처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와인 또한 예술 작품 만들 듯 정성을 쏟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조형물들과 어우러진 와이너리 뒤편으로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붉은 천막을 두른 테이스팅 룸의 높은 천장에는 물방울 모양의 장식품이 매달려 눈길을 사로잡고, 아기자기한 조형물과 와인 관련 소품들, 풍경 사진 등이 진열되어 있다. 이처럼 와이너리 소유주인 크레이그와 캐서린 홀 부부는 와인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조예 역시 깊은데, 와이너리와 테이스팅 룸 곳곳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홀 와이너리는, 와인을 만들고 시음하는 곳 이상의 아름다운 공간적 가치를 지닌다."
(출처_ 
<나파밸리 와이너리 기행[11] - 홀 와이너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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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부부는 나파와 소노마 지역에 6개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으며 포도 재배 면적이 500에이커가 넘는다. 주로 재배하는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소비뇽 블랑 같은 보르도 품종이며 유기농법을 사용한다. 홀 와이너리는 캘리포니아 최초로 LEED® Gold 인증을 획득했는데 LEED는 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의 약자다. LEED® Gold 인증을 획득했다는 것은 환경과 자원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법으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홀은, 세심한 포도 재배와 자연에 대한 존중 그리고 최첨단 양조 기술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와인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첨단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포도를 손으로 골라 수확을 하거나, 중력의 힘을 이용하여 와인을 옮기고 작은 발효 탱크를 사용하는 등 와인 양조 과정의 여러 부분에서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홀 와이너리는 유기농 소규모 포도 재배와 야생 효모를 사용한 발효, 그리고 약간의 블렌딩을 통해 정상급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선보여 왔다. 와이너리 입구에는 "Crazy Good Cabernets"라고 크게 쓴 붉은색 간판이 걸려 있는데, 보르도 스타일로 양조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맛은 정말 인상적이다. 실제로, 필자가 시음한 2008년 빈티지 홀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짙은 보랏빛을 띠며 블랙베리, 향신료, 초콜릿 등의 복잡한 향을 발산하는데, 와인의 향과 입안에서의 느낌이 매우 강렬하여 앞으로 더 오랜 기간 숙성해도 좋을 것 같다."
(출처_ <나파밸리 와이너리 기행[11] - 홀 와이너리> 중)

 

 

홀 와이너리는 70여 개의 서로 다른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만든다. 이 중 절반은 직접 소유한 포도밭에서, 나머지는 계약을 맺은 포도재배자들로부터 나온다. 홀의 와인양조팀은 고도, 미세기후, 토양 등에 따라 포도밭을 작은 구획으로 나누어 관리하는데, 궁극적인 목표는 수확량을 줄여 고도로 농축된 풍미를 지닌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유기농법까지 더해져, 포도는 매년 건강한 상태와 뛰어난 품질을 유지한다. 국내에는 홀 와이너리가 생산하는 세 가지 와인이 수입사 제이와인을 통해 수입, 유통되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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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나파밸리 까베르네 소비뇽

Hall Napa Valley Cabernet Sauvignon


풍부한 블랙베리와 블랙 체리, 블랙커런트 등의 검은 과실향이 토스티한 오크향과 어우러지며, 다크 초콜릿과 감초, 옅은 가죽향이 복합미를 완성시킨다.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실크처럼 부드러운 타닌과 긴 여운이 매력적이다. 
 

93 pts: Washington Wine Blog, Owen Bargreen (2017 빈티지)
90 pts: Virginie Boone, Wine Enthusiast (2017 빈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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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나파밸리 메를로

Hall Napa Valley Merlot


붉은 루비색을 띄며 신선한 붉은 체리, 검은 체리, 블랙베리의 과실향과 바이올렛 향, 코코아와 후추, 감초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실크같은 타닌과 부드러운 목넘김, 그리고 긴 여운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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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나파밸리 소비뇽 블랑

Hall Napa Valley Sauvignon Blanc


옅은 레몬색을 띄며 구스베리와 망고, 파인애플 등의 달콤한 과실향과 함께 레몬껍질, 자몽 등의 새콤한 과실향이 올라오고 미네랄 풍미가 바삭한 산도를 받쳐준다. 효모 앙금과의 접촉을 통해 크리미한 질감이 추가된, 독보적인 스타일의 나파 밸리 화이트 와인이다.

 

92 pts: Virginie Boone, Wine Enthusiast (2018 빈티지)
91 pts: IWR, Joe D’Angelo (2018 빈티지)

 

 

수입) 제이와인 (02-419-7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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