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며칠간 베르가모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국제행사들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트레비리오 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에모지오니 달 몬도( Emozioni Dal Mondo Merlot e Cabernet Insieme, 이하 EDM) 와인품평회는 이제 막 그란골드 메달 당첨자를 발표했다. 오스트리아 바인바우 간글(Weinbau Gangl) 와이너리가 출품한 Rose Auslese가 93.60 득점으로 우승을 거두었다. 이로서 전통 메달 강자인 드라이 와인을 제치고 카베르네 소비뇽 로제가, 그것도 달콤한 아우스레제가 최고의 영예를 자치했다.
<그란골드를 우승한 카베르네 소비뇽 로제 아우스레제>
그 시각 FORME 치즈 박람회의 부대행사로 열린 World Cheese Awards결승전에서는 치즈 심사단이 미국 오레곤 산 치즈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미국 치즈가 우승을 거머쥔 전후는 이렇다.
총 3860개의 치즈가 경합을 벌인 대회에서 112점 만점에 100점을 얻은 이탈리아산 파미자노 레자노와 미국산 블루치즈가 결승전에 진출했다. 승자 유일 법칙에 따라 최종 우승자를 가려야 했는데 그 총대를 BBC TV의 나이젤 바덴(Nigel Barden) 기자가 멨다. 결국, 구대륙 치즈 대 신대륙 치즈의 대결구도가 되어버린 대회에서 바덴 기자는 미국산 치즈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 대결은 1976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파리의 심판’을 소환한다.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누르고 우승을 거머쥐어 와인 전문가들의 심장을 서늘하게 했던 그 날. 치즈에 재현된 베르가모의 심판이라 할 수 있겠다.
15회를 맞는 EDM품평회는 올해도 풍성한 기록을 거두었다. 참가 와인 수가 256종류로 이전 수치를 훌쩍 넘었고 참가국 수도 27개 국을 찍었다. 30여 개 국에서 온 81명의 심사원이 78개의 옥석을 가려냈다. 이로서 국제 와인 기구 OIV(The 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Vine and Wine)가 후원하는 국제 와인 품평회 중 심사원 대비 평가 와인 비율이 높은 품평회임을 확인했다. OIV는 특정 품종 품평회를 승인하면 제2의 동 품종 품평회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EDM은 카베르네 계열과 메를로 품종으로 참가를 제한하는 OIV 대회란 점에서 세계 유일하다 할 수 있다.
<에모지오니 달 몬도 품평회에서 우승한 와인은 금메달 스티커를 부착한다>
메달 집계를 살펴보면(집계 결과), 한 개의 그란 골드와 78개의 와인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위는 이탈리아로 26개의 금메달을, 세르비아는 13개로 2위를, 아르헨티나는 네 개로3위를 차지했다. 호주,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이스라엘, 마케도니아가 세 개의 금메달을, 스페인, 슬로바키아, 남아프리카, 몰도바, 페루가 각각 한 개의 금메달을 차지했다. 비록 노메달 권이지만 브라질과 몬테네그로에서도 와인을 보내와 카베르네와 메를로 와인이 5대양을 넘어 6 대륙에서 재배되는 범 지구적 품종임을 확인시켰다.
EDM품평회가 다른 곳이 아닌 하필이면 왜 베르가모에서 열릴까! 1970년대, 이탈리아 토착품종이 홀대받던 시절, 이탈리아 와인 생산자들은 두 품종에 열광했었다. 베르가모 주변의 발칼레피오(Valcalepio) 언덕은 알프스 기후권에 속해 날씨가 선선하고 비도 적당히 내려 프랑스 품종 재배에 적합했다.
그 당시 양조가였던 세르조 칸토니(Sergio Cantoni) EDM 총감독은 낯선 품종이 발칼레피오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와인 생산자들에게 기술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머지않아 베르가모 주변 언덕은 이탈리아 유수의 프랑스 품종 생산지로 떠오른다.
<ED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와인들>
어느 날 칸토니씨는 세계의 동일 품종 생산자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와인의 품질을 겨뤄보고 싶었다. 다년간의 조사와 미팅 끝에 결론은 와인 품평회로 모아졌고 발칼레피오 와인 콘소시움 (Consorzio Tutela Valcalepio)과 베르가마스키 포도생산자 연합(Vignaioli Bergamaschi s.c.a.)의 경제적 후원을 얻는데 성공하여 2005년 EDM 첫 회를 개최한다.
흥미로운 건 칸토니씨는 고향이 이탈리아 피에몬테주며 시간이 날 때마다 바롤로에 소유하는 포도밭에서 돌체토를 돌본다는 것이다. 비록 베르가모에 거주하지만 자신이 가꾼 돌체토 와인을 식사 때마다 마시는, 뼛속부터 피에몬테 맨이다.
보통 와인품평회 이름은 나라(도시명)와 품종명을 조합시켜 지역성을 반영하려 한다. 칸토니씨는 ‘메를로와 카베르네 세계가 주는 감동’으로 정해 상식을 깼으며 이유를 아래와 같이 들었다. “ 와인을 마실 때 우리는 막연한 기대를 갖습니다. 막연한 감정이 구체적인 만족감으로 표현될 때 사람들은 감동했다고 말합니다. 요즘은 감동이 와인 표현 수식어로 자리 잡았지만 제가 품평회를 추진할 무렵에는 이탈리아인 마음에 와인과 감동은 별개였죠. 그래서 품평회가 서로 무관심한 관계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를 바랬죠.”
EDM은 감동의 울림이 널리 골고루 퍼질 수 있게 베르가모와 그 일대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끌어들인다. 올해는 마침 품평회 기간이 베르가모의 문화명소, 카라라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개최하는 ‘아르테 디 모다(Arte di Moda) 전시회’와 겹쳤다. 전시회는 구찌(Gucci) 스카프와 미술관 소유 회화에서 비슷한 모티프를 찾아 궁합을 시도해 신선한 발상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얻었다.
<아르테 디 모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카라라 아카데미아 미술관 파사드는 거대한 스크린으로 변해 플로라 스카프 이미지를 비추었다>
전시회 기간에는 와인 특별 콜랙션도 기획했다. 메를로와 카베르네 쇼비뇽을 블랜딩한 발카레피오 로쏘(Valcalepio Rosso) 와인 1백 병이 선보였다. 풍년이 들었던 2016 빈티지 라벨을 전시회 포스터로 꾸몄다. 포스터의 화려한 꽃무늬는 플로라 스카프에서 빌려왔으며 일명 그레이스 켈리 스카프라 불린다.
1960~70년대 구찌 사는 패션계의 거장인 빗토리오 아코르네로를 영입해 스카프 디자인 부서를 맡긴다. 어느 날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밀라노 구찌 숍을 방문해 꽃무늬 스카프를 찾았다. 이를 알게 된 로돌포 구찌 회장은 다급하게 아코르네로 수석 디자이너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디자이너는 밤새 작업해 하루만에 스카프를 완성했다. 스카프 디자인은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꽃무늬가 화사하며 섬세하다.
아코르네로가 구찌에 있을 때 70개의 실크 스카프를 디자인했으며 일약 셀러브리티 여성의 필수 아이템으로 떠오른다. 아코르네로 스카프 고객으로 그레이스 켈리, 제클린 케네디, 소피아 로렌을 꼽을 수 있다.
<좌: 얀 브뤼헐작 정물화 우: 빗토리오 아코르네로가 디자인한 플로라 스카프>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명성을 얻은 36점의 스카프는 전시회에 자주 초대받는다. 이번 ‘아르테 디 모다’ 전시회는 영구 소장 회화와 스카프의 근접점을 찾아 예술과 패션을 결합하려 했다. 1612년 얀 브뤼헐(Jan Brueghel) 작 정물화 옆에는 플로라 스카프가 자리 잡는다. 두 작품의 화려한 꽃 무늬가 일맥상통한 점이 매칭 이유다. 코랄 무늬 스카프는 1570년대 조반 모로니(Giovan Battista Moroni)작 ‘레뎃티 가문의 소녀’ 유화와 나란히 두었다. 소녀의 화려한 진주 목걸이와 코랄에 감겨있는 진주 목걸이는 서로를 암시하고 있다.
<좌: 조반 모로니 유화 ‘레뎃티 가문의 소녀’ 우: 빗토리오 아코르네로의 코랄 스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