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와인의 용광로melting pot’라 불리며 새롭고도 흥미로운 와인 생산지로 주목 받는 랑그도크루시용Languedoc-Roussillon(이하 랑그도크)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변방의 와인 산지에 불과했다. 생산량(프랑스 전체 생산량의 40%)과 재배면적(현재 23만 5천헥타르)에서 프랑스 제일의 규모를 자랑했지만 이름 없고 지극히 평범한 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랑그도크의 이미지는 자연스레 ‘저렴이 와인산지’로 굳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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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보다는 많은 생산량으로 알려졌던 랑그도크는 변화를 겪게 된다. 남부 론과 비슷한 기후와 지형을 가진 랑그도크는 이미 고품질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소규모 독립적인 생산자들 중심으로 개성 있는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라, 무르베드르, 그르나슈, 까리냥 등 남부 론의 전통적인 품종을 기본으로 블렌딩한 레드 와인은 부드럽고 풍부한 맛을 보여준다. 게다가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르도네 등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스타일의 와인까지 선보였다. ‘와인의 용광로’란 별명처럼 전통과 현대, 다양한 여러 품종들과 테루아의 결합을 통해 랑그도크다운 와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랑그도크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 

 

보르도의 일등급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를 소유한 바롱 필립 드 로칠드(BPR), 샤토 랭쉬 바주Ch. Lynch Bages, 부르고뉴의 유명한 여성 와인메이커 안 그로Anne Gros 모두 랑그도크의 무한한 잠재력을 알아보고 진출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는 랑그도크의 가치와 명성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찍부터 랑그도크에 변혁의 원동력을 가져온 생산자는 마스 드 도마스 가삭Mas de Daumas Gassac(이하 도마스 가삭)의 설립자인 에메 기베르Aimé Guibet이다. 1970년 랑그도크에 매혹되었던 그는 가삭 밸리Gassac Valley의 포도원을 구입하고 정착했다. 당시 기베르가 친구였던 지질학자 앙리 엉쥘베르Henri Enjalbert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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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고도 200미터 이상의 도마스 가삭의 포도밭, 배수가 탁월한 자갈토양>

 

 

서늘한 기후와 배수가 탁월한 자갈토양을 가진 도마스 가삭의 포도원을 둘러본 엉쥘베르는 ‘부르고뉴의 꼬뜨 도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토양’으로 ‘그랑크뤼 수준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며 평가했다. 이는 기베르를 도전의 길로 인도하기에 충분했다. 먼저 메독에서 카베르네 소비뇽의 묘목을 가져와 재배했고 저명한 보르도 대학교수이자 양조학자 에밀 페노Émile Peynaud의 컨설팅을 받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8년에 첫 번째 와인, 마스 드 도마스 가삭 레드(카베르네 소비뇽 80%)를 출시했다.

 

 

양조의 자유를 주장하다

 

한편 2001년 미국와인의 전설, 로버트 몬다비는 랑그도크에서 가장 유명한 도마스 가삭을 인수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에메 기베르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한 바 있다. 와인의 다양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그는 거대 자본에 의한 와인산업의 세계화가 초래할 수 있는 와인의 획일화, 몰개성화를 경계했던 것이다. 이후 2004년에 이 이야기를 소재로 제작한 다큐멘터리(몬도비노Mondovino, 조나단 노시터 감독)가 공개되어 와인 애호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양조의 자유를 강조하던 기베르는 품종, 수확량, 레이블 표기방법 등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에 관한 모든 것들을 법으로 규제하는 원산지 통제 명칭AOC을 싫어했다. 사실 창의성이나 새로운 실험을 허용하지 않는 AOC규정에 분통을 터트리는 생산자는 비단 기베르 뿐만 아니었다. 1979년 프랑스에선 AOC보다 규정이 유연하고 생산자의 재량을 인정하는 뱅 드 페이 Vin de Pays 등급이 신설되었다. 기베르는 이를 환영했고 프랑스품종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토착품종까지 들여와 자유롭게 와인을 만들었다. 랑그도크에서 생산되는 뱅드페이를 뱅 드 페이 독Vin de Pays d’Oc이라 레이블에 표기한다. 실제로 도마스 가삭에는 AOC와인이 없고 최고급 와인 또한 뱅 드 페이 독이다. 

 

 

“랑그독의 샤토 라피트” – Gault & Millau

 

도마스 가삭의 와인들은 전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가격 또한 최고급 보르도 와인만큼 비싼 와인도 있다. 에메 기베르의 치열했던 도전의 달콤한 결과로 랑그도크의 가능성을 그대로 증명한 것이다. 현재 국내에는 수입사 제이와인 컴퍼니를 통해 도마스 가삭과 1991년에 출시한 물랑 드 가삭Moulin de Gassac의 와인들이 유통되고 있다. 

 

최근 열린 <전통 프렌치 요리와 즐기는 도마스 가삭 디너>에서 9가지 코스의 요리들과 잘 어울리는 도마스 가삭의 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004.JPG<신선한 화이트와인과 어울리는 절인 참 숭어와 감식초 비네그렛으로 무친 두릅 순>

 

 

물랑 드 가삭 샤도네이 2017
Moulin de Gassac Chardonnay 2017

품종: 샤도네이 100%

 

현재 랑그도크에서 샤르도네는 가장 인기 있는 품종 중 하나로 대접받고 있다. 여러 꽃과 감귤류, 시원한 배의 향미가 상쾌하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여운은 길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도 신선함을 잃지 않는 와인으로 첫 번째 에피타이저 절인 참 숭어와 잘 어울렸다. 바지락 파스타 등 해산물을 주재료로 만든 요리, 상큼한 샐러드, 요즘 제철 맞은 두릅 튀김과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와인 초보자들도 부담 없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으로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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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니에와 완두콩과 조개 쇼드헤를 곁들인 불-오-방 파이>

 

 

물랑 드 가삭 비오니에 2017
Moulin de Gassac Viognier 2017

품종: 비오니에 100%

 

1976년에 에메 기베르가 백포도 품종을 심기 시작했을 때, ‘랑그도크는 레드와인의 땅’이라며 주위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시원한 기후가 유지되는 계곡에선 생생한 산도를 잘 간직한 와인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다. 도마스 가삭의 포도밭은 해발고도 250~500미터 사이에 조성되어 있는데, 특히 백포도의 경우, 모두 300미터 이상의 포도밭에서 재배하고 있다. 그 결과 상쾌한 산미가 돋보이는 화이트와인을 만들 수 있다. 

 

비오니에는 론의 최고급 백포도 품종이다. 상당히 까다로운 품종이지만 실크 같은 감촉과 향수 같이 화려한 향 때문에 인기가 높아 북부 론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남부 프랑스 등 여러 곳에서 재배하고 있다. 비오니에가 까다로운 이유는 낮은 산도에 있다. 유질감이 좋고 향이 강하기 때문에 산도마저 낮으면 와인이 지루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생산자들은 산도를 유지하는데 힘쓸 수 밖에 없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물랑 드 가삭 비오니에는 품종 특유의 살구, 망고, 아카시아 꽃의 향이 풍부하고 달콤하다. 산도의 문제 또한 깨끗이 해결한 듯 산미가 잘 살아있고 크림 같은 질감도 적당해 상쾌하다. 참석자들 중에선 ‘평범한 샤르도네보다 훨씬 맛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해산물 요리, 매콤한 타이요리, 해산물로 요리한 파스타 혹은 리조또와도 잘 어울린다. 풍미가 남다른 오향 족발도 매칭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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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 광어 구이와 해조류 리조토>

 

 

물랑 드 가삭 클래식 화이트 2017
Moulin de Gassac Classic White 2017

품종: 테렛 화이트 90%, 까리냥 화이트 10%

 

테렛 화이트는 고대 품종 중 하나로 랑그도크의 토착품종이다. 대개 블렌딩용으로 사용하는데 과일과 꽃 향기가 좋고 무게감이 있는 품종이다. 향긋한 꽃 향이 지배적이고 허니듀 멜론의 향도 난다. 산도는 적당하고 입 안에서 질감은 부드러워 매우 편안하다. 중간 정도의 바디감이 느껴져 훈제연어나 참치 타다끼 같은 기름진 생선과도 잘 맞는다. 새우나 튀긴 생선을 넣은 샐러드, 니스 샐러드, 중국식 냉채요리와도 잘 어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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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우설과 머릿 고기로 속을 채운 배추 슈 팍시>

 

마스 드 도마스 가삭 블랑 2017
Mas de Daumas Gassac Blanc 2017

품종: 쁘띠 망상 36%, 샤르도네 24%, 비오니에 24%, 슈냉 블랑 16%

 

1976년에 백포도 품종을 심었던 에메 기베르는 10년 후에나 비로소 첫 번째 마스 드 도마스 가삭 블랑을 선보였다. 부르고뉴 최고의 화이트와인 도멘 Comte Lafon에서 샤르도네를, 평소 존경했던 Georges Vernay에서 비오니에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 두 품종 덕분에 복합성을 얻었지만 신선함과 산도가 떨어지는 게 문제였다. 기베르는 여행 중에 맛봤던 산도가 높은 쁘띠 망상(Charles Hours에서 가져옴)과 슈냉 블랑(Huët)을 블렌딩해보기로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놀랍게도 두 품종은 신선한 산도를 지키는데 탁월했다. 이후 도마스 가삭에선 쁘띠 망상과 슈냉 블랑의 블렌딩 비율을 꽤 높게 가져간다. 복숭아, 꽃, 망고, 청사과, 구수한 빵, 톡 쏘는 향신료 등 향미가 매우 복잡 미묘하다. 화이트와인임에도 단단한 구조감과 실크 같은 질감, 신선한 산미, 매우 길게 이어지는 여운이 매력적이다. 앞으로 4-5년 이상 숙성하게 되면 좀더 성숙하고 우아한 맛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버터에 구운 관자요리, 돼지 목살구이 등 무게감 있는 요리와도 충분히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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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가슴살 롤라드, 다릿 살 콩피와 단오박 파르멍티에>

 

 

마스 드 도마스 가삭 루즈 2013
Mas de Daumas Gassac Rouge 2013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 72%, 메를로 5%, 따나 5%, 프티 베르도 5%, 카베르네 프랑 4%, 말벡 2.5%, 피노 누아 2%, 기타 적포도 5%

 

전세계 와인 평론가들이 극찬에 마지 않는 도마스 가삭의 메인 와인이다. 에메 기베르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블렌딩 스타일로 불과 40년만에 컬트와인의 지위를 차지했다. 궁금해마지 않는 5%의 기타 적포도는 바르베라, 돌체토 등 총 20가 품종이 섞여있다. 과일 풍미에 집중하기 때문에 4~7년 정도 된 중고 오크를 사용한다. 그래서 10년 이상의 올드 빈티지 와인을 마셔봐도 과실 느낌이 잘 살아 있다고 한다. 

 

한 모금 마신 순간, 평균대 위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체조 선수가 떠오른다. 많은 품종들을 블렌딩했음에도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고 밸런스가 뛰어나다. 왜 ‘랑그도크의 라피트’라고 평했는지 알 것 같다. 검은 자두, 검은 체리의 향과 함께 감초, 향신료, 가죽 같은 숙성된 맛도 느껴진다. 생기로운 산도, 부드러운 타닌과 감촉으로 목 넘김이 편안하다. 진하고 길게 이어지는 여운에서 와인의 힘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다. 올드 빈티지가 기대되는 와인으로 10년 이상 숙성이 가능하다. 매칭할 땐 소고기, 양고기, 바비큐 요리와 단단하고 강한 치즈류가 제격이다. 
 

 

 

수입_ 제이와인컴퍼니 (02-419-7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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