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TV에서는 채널마다 연기대상, 가요대상 같은 시상식 프로그램 광고가 한창이다. 한 해를 대표하는 굵직한 사건이나 인물을 뽑는 것은 그 해를 마무리하는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 해를 빛낸 승자에게는 가장 많은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와인양조가 중에서는 어떨까. 아마도 올해로 95세를 맞은 마이크 그르기치Mike Grgich가 이들 승자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그는 지난 5월 “식음료 산업의 오스카 상”이라 불리는 <James Beard Awards>에서 주류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이룬 업적 또한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샤도네이의 제왕
마이크 그르기치 Mike Grgich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1976년, 와인의 레이블을 가린 채 프랑스 와인과 캘리포니아 와인의 우열을 가리는 시음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훗날 ‘파리의 심판 Judgment of Paris’이라는 이름으로 와인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이 사건의 결말은, 놀랍게도 캘리포니아 와인의 압승이었다. 만약 1976년에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고급 와인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마이크 그르기치가 “샤도네이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도 파리의 심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1973 빈티지의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 Chateau Montelena Chardonnay’는 부르고뉴의 쟁쟁한 화이트 와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고, ‘미국을 만든 101 가지 물건’으로 지정되어 미국 독립 선언문, 링컨 대통령의 모자, 닐 암스트롱의 우주복 등과 함께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안았다.
파리의 심판이 있은 다음 해인 1977년, 마이크 그르기치는 샤토 몬텔레나를 떠났고 사업 파트너와 함께 ‘그르기치 힐스 와이너리 Grgich Hills Estate’를 설립했다. 이후로도 그가 만든 샤도네이 와인의 명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는데,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이 모이는 만찬에 수차례 등장하며 미국의 개척과 혁신의 정신을 대변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1982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1979 빈티지 ‘그르기치 힐스 샤도네이’를 내놓은 것은 세계의 와인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낳았다.
크로아티아 태생의 마이크 그르기치가 미국 와인의 전설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한편의 서사시를 보는 것 같다. 그 자세한 내용은 “아메리칸 드림에서 전설이 된, 그르기치 힐스Grgich Hills”에서 다룬 바 있다.
우아한 카리스마,
그르기치 힐스 Grgich Hills
어떤 인물이나 사물에 ‘제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왠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샤도네이의 제왕, 마이크 그르기치가 만든 와인 역시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와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카리스마는 압도적이기보다는 극도의 우아함에 더 가깝다. 어찌나 단아하고 우아한지, 와인을 음미하는 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 잠시 정신이 몽롱해진다. 최근 시음한 마이크 그르기치의 두 가지 화이트 와인이 그랬다.
<그르기치 힐스 이스테이트의 2014 빈티지 ‘나파 밸리 퓌메 블랑’, 그리고 2015 빈티지 ‘나파 밸리 샤도네이’>
이 두 와인은 각각 소비뇽 블랑과 샤도네이 품종을 사용해서 만들었다. 품종은 다르지만 두 와인 모두 천연 효모로 발효시켰고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쳤다. ‘나파 밸리 퓌메 블랑’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마셔 온 소비뇽 블랑 와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짙고 선명한 과일 풍미, 날카로운 산도, 아삭한 질감 대신 은은하게 퍼지는 열대 과일 풍미와 날카롭지 않은 산도 그리고 부드럽게 입안을 채우는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나파 밸리 샤도네이’는 잔에 따르자 마자 은은한 흰 꽃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와인을 구성하는 요소 중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샤도네이의 제왕’이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탁월한 균형을 갖추었다. 매끄럽게 목을 타고 흐르는 질감도 일품이다.
<그르기치 힐스 이스테이트의 2014 빈티지 ‘카버네 소비뇽’, 그리고 2013 빈티지 ‘나파 밸리 진판델’>
마이크 그르기치의 레드 와인은 파워풀하고 단단하며 풍미가 짙은 여타의 나파 밸리 와인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카버네 소비뇽’은 한겨울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녹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감미롭기 그지없다. 적당한 알코올 기운은 입 안을 서서히 덥혀주고 기분좋은 나른함을 선사한다. ‘나파 밸리 진판델’은 방금 딴 것처럼 경쾌하고 발랄한 과일의 풍미가 압권인데, 향을 맡자 마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두 와인 모두 모든 요소가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가 즐기는 한식과도 잘 어울린다.
수입_나라셀라 (02. 405. 4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