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날이 선선해 지면서 와인 마시는 횟수도 잦아졌다. 오늘은 파스타에는 반드시 와인을 곁들여야 한다는 핑계로 이탈리아산 람브루스코 와인의 마개를 열었다. 몇 주 전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을 여행하는 중에 들른 와이너리에서 구입한 것이다.
※ 에밀리아 로마냐Emilia-Romagna는 이탈리아의 20개 주(州) 중 하나이며, 에밀리아와 로마냐 두 지역이 합쳐진 이름이다. 수도는 볼로냐이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꼽힌다. 또한 파르미자노 치즈와 발사믹 식초를 비롯해 최고급 프로슈토, 살루미, 밀가루, 과일, 채소 등을 생산하는 “이탈리아의 음식 창고”로 알려져 있다. Lonely Planet이 선정한 <Best in Europe 2018>에서 1위를 차지할 만큼 관광 명소로도 이름을 날리는 지역이다.
<람브루스코Lambrusco는 에밀리아 로마냐에서 가장 잘 알려진 포도품종이다. 잘 만든 람브루스코 와인은 단순하지만 생기 넘치고 과일 맛이 풍부하며 붉은 베리와 향신료의 향이 감돈다. 람부르스코 와인은 숙성 초기에 마시는 것이 좋다. >
와인은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술이라고 했던가. 마개를 열고 와인의 향긋한 향을 깊이 들이마시자 내 영혼은 이미 에밀리아 로마냐의 어딘가에 남겨놓은 나의 흔적을 찾아 더듬고 있다. 카푸치노를 마시기 위해 아침마다 들렸던 아담한 카페, 주렁주렁 달려 있는 햄이 마냥 신기했던 식료품 가게, 아침 안개가 그윽한 정취를 더하던 포도밭, 시큼하면서도 달근한 향이 코를 찌르던 발사믹 식초 저장고 등등…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먹고 마셨던 음식과 와인이 어찌나 맛있던지 한국에 돌아온 뒤로 한동안 입맛을 되찾는 것이 힘들었다.
와인과 음식을 가장 맛있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지리적 특색이 있는 음식에는 그 특정 지역에서 생산하는 와인을 곁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에밀리아 로마냐의 파르마Parma 지방은 돼지의 다리 부위를 소금처리한 후 숙성시켜 만드는 프로슈토Prosciutto의 생산지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파르마의 붉은 돼지는 최상의 육질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사진). 그리고 얇게 썬 프로슈토는 거품이 살짝 있고 상쾌한 산도가 느껴지는 람브루스코 세코secco와 완벽한 짝을 이룬다(아래 사진).
파르마는 이웃한 레지오 에밀리아Reggio Emilia 지방과 함께, 우리가 흔히 파르마산 치즈라고 부르는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Parmigiano-Reggiano cheese)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1200년대에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만들기 시작한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 EU에 의해 엄격하게 원산지 보호, 통제가 이루어지는 제품(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줄여서 PDO) 중 하나가 되었다.
규정에 따라 최소 12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하는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는 숙성 기간에 따라 즐기는 방법도 약간씩 다르다. 예를 들면, 24-28개월 정도 장기 숙성한 것은 소고기나 생선 카르파초, 또는 구운 소고기 요리에 얇게 썰어 곁들이면 좋다. 18개월 정도 숙성한 것이라면 사과나 배 같은 신선한 과일과, 그보다 오래 숙성한 것이라면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와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짜고 견과류 향이 나는 치즈가 달콤하면서도 거의 초콜릿처럼 진득거리는 발사믹 식초와 처음 만나면 서로 상반되는 맛이 충돌을 일으키며 불꽃을 번쩍인다. 하지만 이 둘은 곧 강렬하고 크림 같은 무언가로 융화된다.”
_ <이탈리아 와인 가이드> 중
장기 숙성한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에 에밀리아 로마냐의 전통 발사믹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리면 레드 와인을 마실 때 더없이 좋은 안주가 된다. 발사믹 식초 원산지 중에서는 에밀리아 로마냐의 동쪽에 위치한 모데나Modena가 가장 유명하다. 이 지방에서는 람브루스코 포도로 발사믹 식초를 만들며, 적어도 12년 이상 숙성을 거쳐야 ‘전통 발사믹(Aceto Balsamico Tradizionale)’이라고 레이블에 표기할 수 있다(위 사진). 전통 발사믹 식초 2리터를 생산하려면 100리터의 포도즙이 필요하다. 참고로 우리가 시중에서 저렴하게 구입하는 일반 발사믹 식초는 캐러멜로 색을 내고 숙성을 거치지 않은 식초이다.
이탈리아 요리를 말할 때 파스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에밀리아 로마냐는 이탈리에 내에서도 ‘파스타 천국’이라 불린다. 이곳의 파스타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부드럽고 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에밀리아 로마냐의 주도인 볼로냐에서는 밀가루에 계란을 넣고 반죽해서 파스타를 만들고 고기, 치즈, 햄으로 속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익숙한 라자냐, 라구 소스 파스타(위 사진), 토르텔리니 등이 바로 볼로냐식 파스타 요리다.
방금 만든 파스타에는 살짝 단맛을 지닌 람브루스코 아마빌레amabile 와인이 아주 잘 어울린다.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 다면 산조베제Sangiovese 품종으로 만든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곁들이는 것도 좋다(위 사진). 이웃한 토스카나 지방의 산조베제에 비해서는 덜 알려져 있지만, 산조베제가 로마냐의 어딘가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만큼 이 지역의 오래된 토착 품종이다. 로마냐의 산조베제는 다른 산조베제들에 비해 속이 더 꽉 차고 깊으며 즙이 풍부하고 단단한 블랙체리 과일 맛이 나면서 더 부드러운 타닌과 산도를 지니고 있다.
<에밀리아 로마냐 각 도시별 특산품을 보여주는 지도>
<에밀리아 로마냐의 대표적인 특산품을 보여주는 영상>
이탈리아 북동부를 동서로 길게 가로지르는 에밀리아 로마냐를 하루 코스로 여행하는 것은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이 지역은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문화 유산과 근대적인 산업 발전에서 비롯된 화려함으로 풍성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수도인 볼로냐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볼로냐 대학이 자리잡고 있으며,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의 도시로 알려진 모데나, 파르마, 페라라는 오랜 역사와 문화 유산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모데나, 라벤나, 페라라 등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만도 세 군데나 된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쥬세페 베르디, 조르지오 아르마니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와 장인들도 여기서 태어났다. Ferrari, Maserati, Lamborghini, Ducati의 고향도 이곳, 에밀리아-로마냐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푸드 테마 파크 <FICO EATALY WORLD>가 볼로냐에 개장하면서 “이탈리아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개장 1년 만에 벌써 2백만 명이 방문했다고 하니,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방문지에 넣을 것을 추천한다.
※ 참고자료
<와인테이스팅노트 따라하기> (뱅상 가스니에 저)
<이탈리아 와인 가이드> (조 바스티아니치 외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