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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종 (yoo@wineok.com)
온라인 와인 미디어 WineOK.com 대표, 와인 전문 출판사 WineBooks 발행인, WineBookCafe 대표를 역임하고 있으며 국내 유명 매거진의 와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기다리던 와인의 계절, 가을이 돌아왔다. 수확의 기쁨과 실존의 허무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는 계절, 가을이 되면 차이코프스키의 The Seasons, Op. 37a> 사계 중 첼로의 거장 다니엘 샤프란이 연주하는 계절곡 ‘10월의 노래 Autumn Song’ LP를 찾아 턴테이블에 올린다. 어제 마시다 남겨 둔 남프랑스 랑그독의 도마스 가삭 와인 한 잔은 더 없이 좋은 감상 안주다.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10월의 노래’를 주제로 작곡했다고 알려진 이 곡은 톨스토이의 외롭고 쓸쓸한 가을날의 서정이 그대로 전해져 애잔한 슬픔이 더욱 깊어진다.
 


Autumn, our poor garden is all falling down, the yellowed leaves are flying in the wind
가을, 우리의 가련한 뜰은 초라해져 가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가네

 


톨스토이와 차이코프스키, 두 천재의 만남은 시와 음악이 하나가 되어 별과 같이 영롱한 작품을 만들어냈고, 첼로의 비루투오조 다니엘 샤프란을 만나 비로소,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영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전설적인 명반이 되었다. 복잡하고 소란한 일상의 소음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마음속으로 침잠하는 이 가을 밤 ‘나의 육신이 갈망하는 와인 한 병’이 있다면, 당장 셀러에서 그 와인을 꺼내도 좋겠다. 나를 위로해 줄 어떤 와인이 있다는 것이 때로는 인생에서 친구 이상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는 걸 곱씹게 되는 저녁이다.

 

 

가을 달 밤에 마시는 와인이 일년 중 제일 맛있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속설이지만 어지간한 술꾼이라면 이 말의 뜻을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몸도 술도 시원할 때 마시면 더 맛있는 법. 세상의 그 어떤 와인을 마시더라도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마스터키는 단언하건데 ‘온도’다. 장안에 와인 핸들링 좀 한다는 유명한 와인레스토랑의 소믈리에로부터 와인 서비스를 받아 본 호사가라면, 분명 집에서도 마시던 같은 와인인데도 유독 소믈리에가 따라주는 그 와인이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결코 소믈리에의 잘 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다. 소믈리에는 온도와 습도, 브리딩, 시간의 기다림을 통해서 와인의 물성이 긍정적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물 흐르듯 연주하는 플레이어다. 와인 테이스팅에 있어서 ‘온도 컨트롤’은 와인의 맛을 풀어가는 마법의 열쇠요 미감각적 테크놀러지의 총체인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이 골치 아플 것 같은 와인 온도의 스트레스 같은 건 따질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나라 가을의 평균 기온는 15도, 아침 10도, 한낮 19도. 놀랍게도 와인의 최적 음용 온도와 똑같이 맞아 떨어진다. 황사나 미세먼지도 사라진 고기압 하늘과 청정한 공기, 그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한 두 시간쯤 달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생체리듬 최고조의 계절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구르는 낙엽만 봐도 문득 그립고 쓸쓸해지는 계절적 우울증까지… 와인을 즐기기에 이보다 완벽한 조건은 없을 것이다.

 

 

Mas de Daumas Gassac Rouge 2013
마스 드 도마스 가삭 루즈 2013

 

이 와인을 꺼내어 레이블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참 와인의 매력에 빠져 동호회나 시음회를 찾아다니던 2004년의 어느 가을 날이 떠오른다. 와인 초보였던 그 시절, 어느 시음회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와인산업에 큰 화제를 몰고 왔던 ‘몬도비노’라는 와인영화를 동호회원 누군가가 구해 와 영화를 보며 등장하는 ‘로버트 몬다비’, ‘미셸 롤랑의 와인’들을 시음했던 날이었다. 영화 속에서, 미국 와인산업의 총아 로버트 몬다비가 랑그독 아니스 마을에 진출하려던 것을 몸을 던져 저지하던 귀베르 영감의 외침 “Wine is Dead!”는 와인의 세계화와 획일성에 저항하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와인의 다양성과 테루아의 개성을 담은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에메 귀베르(Aime Guibert)의 자연주의 철학은 유명한 와인들을 사냥하듯 마시고 다니던 와인 스놉(Wine snob)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는 사건이 되었다.

 

 

랑그독의 전설 Daumas Gassac

 

도마스 가삭 와이너리는 1970년, 장갑 제조업자였던 에메 & 베로니끄 귀베르 부부(Aime & Veronique Guibert)가 귀농을 결심하고 남프랑스 랑그독의 가삭(Gassac) 강 근처에 도마스(Daumas) 가문이 소유했던 땅을 매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작물을 심을까 고심하던 그는 1971년 보르도 대학의 포도밭 전문 지질학자였던 앙리 앙잘베르(Henri Enjalbert)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앙잘베르 교수는 “이 땅은 부르고뉴 꼬뜨 도르(Cote d'Or)와 유사한 빙하기 시대의 지질을 가지고 있으며, 차가운 지하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은 보르도 메독과 유사한 미세기후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그랑크뤼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땅”이라고 조언했다. 이후 귀베르는 와인농부이자 와인양조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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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부터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해서 1978년 17,866병의 첫번째 빈티지를 출시할 때까지, 그가 현대 와인 양조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밀 페노(Emile Peynaud) 교수로부터 컨설팅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샤토 마고, 샤토 오브리옹의 와인 컨설팅을 하던 에밀 페노는 도마스 가삭을 방문한 후에 그 잠재력에 매료되어, 시도 때도 없이 전화통화를 하며 귀베르에게 조언을 주었다. 기자들이 "당신같이 유명한 사람이 랑그독의 알려지지 않은 와이너리를 위해 왜 그렇게 애를 씁니까?"라고 묻자, "그동안 내가 위대한 생산자들과 작업을 해왔지만, 그랑크뤼 탄생의 순간을 같이 하는 행운을 가져본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오늘날 도마스 가삭은 "랑그독의 라피트(the Lafite of the Languedoc)"라 불리며, 랑그독의 고품질 카베르네 소비뇽을 위주로 와인을 만드는 가장 유명한 생산자가 되었다. 1982년, 프랑스의 미식 평론지 고미유(Gault et Millau)는 "랑그독의 샤또 라피트"라 찬사를 보냈고, 1985년 영국의 와인 평론가 제인 맥퀴티(Jane MacQuitty)는 "라뚜르에 더 가깝다(Actually, more like Latour)"라며 "랑그독의 그랑크뤼"로 명명하였다. 1986년 프랑스 일간지 주르날 뒤 디망쉬는 “페트뤼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와인”이라 추켜세웠고, 영국의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휴 존슨은 “지중해 지역 유일한 특급 와인”이라 극찬하기도 했다. 도마스 가삭의 명성은 2016년 에메 귀베르가 타계한 이후에도 자손들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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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도마스 가삭의 ‘에밀 페노’ 와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에밀 페노 교수에게 헌정하는 와인으로, 연간 2,000병 한정 생산된다.>

 

 

랑그독 지방의 해안가 아니스 마을은 지중해성 기후라서 더운 여름에는 과숙하거나 산도가 떨어지는 와인을 생산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도마스 가삭 와이너리는 다른 곳에 비해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갈로-로마 시대의 방앗간과 농업용 연못 부지에 자리한 덕분에 시원한 지하수가 흐르면서 땅을 서늘하게 만들어 준다. 이처럼 천연의 에어 컨디셔닝이 가능한 환경은 와인의 발효 시간을 늦춰주고 와인의 복합적인 풍미를 발달시켜주는 천혜의 입지다.


도마스 가삭은 포도나무 식재에도 엄청난 공을 들이는데 이는 대단한 철학적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50년부터 대부분의 포도농가들이 질병 저항력이 강한 규격화된 포도나무를 사서 심었지만 도마스 가삭의 포도나무는 다르다. 귀베르는 1930~40년대에 심은 보르도 메독의 오래된 포도나무 가지를 공수해 와서 포도밭에 심었고, 유럽 각지의 오래된 토착 품종을 함께 재배하면서 토착 품종의 보호자 역할을 몸소 실천해 왔다. 꼿꼿한 장인의 선구자적 삶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또한 베이, 백리향, 로즈마리, 라벤더, 야생 박하, 딸기 나무 등 지중해의 다양한 야생 허브와 나무들이 도마스 가삭의 포도밭을 둘러싸 생태적 환경을 보호하고 있다. 조류와 곤충은 해충을 막아주고, 화학 비료와 합성 물질을 사용하지 않으며 천연 퇴비만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놀라운 와인으로 나타난다. 남프랑스의 뜨거운 태양과 거친 황무지에서 자라는 가시덤블, 샤프란, 월계수, 아니스 등의 특유의 아로마를 지닌 이 와인은 잠자는 감각을 흔들어 깨운다.

 

 

3.jpgMas de Daumas Gassac Rouge 2013
마스 드 도마스 가삭 루즈 2013 

 


마스 드 도마스 가삭 루즈는 까베르네 소비뇽을 위주로 메를로, 말벡, 피노 누아, 타낫 등 17개 토착 품종을 소량 섞어 만든, 아로마가 대단히 풍부하고 바디감이 묵직한 와인이다. 35~40년 넘게 자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만으로 만든다. 포도는 스테인리스스틸 탱크에서 발효시키며 와인은 12~15개월간 오크 배럴에서 숙성된 후 여과를 거치지 않고 병입된다. 수 십년 간의 숙성 잠재력이 있지만, 숙성 초기에 마시기에도 좋다. 폭발하는 듯한 붉은 과일의 향과 은은한 사향, 가죽향 등 복합적이고 뛰어난 풍미가 느껴진다. 숙성시킬수록 까베르네 소비뇽의 맛이 더욱 좋아진다. 파워풀한 타닌과 생동감 있는 산도를 느낄 수 있으며 전체적인 균형감이 일품이다. 꽁테치즈 같은 풍미 진한 숙성 치즈나 각종 육류요리, 야생 사냥고기와 함께 즐기면 좋다.

 

 

수입_ 인터와인 (070 7897 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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