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센다 탑(왼쪽)과 아시넬리 탑(오른쪽)은 볼로냐의 아날로그 가이드다.>
볼로냐의 하늘은 서로 이웃한 두 개의 탑이 가른다. 이 탑들은 보는 방향에 따라 우리가 보던 익숙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두오모와 엔조궁(Palzzo Re Enzo)이 모여 있는 중심가에서 바라보면 두 탑은 난쟁이와 키다리 같다. 탑이 서있는 포르타 라베냐나 광장(Piazza di Porta Ravegnana)에 접근하면 키가 낮은 탑이 키 큰 탑 쪽으로 기울어진 걸 알 수 있다. 기울어진 게 마치 피사의 사탑과 흡사해서 “볼로냐에 웬 피사 사탑?” 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난쟁이를 닮기도 하고 피사의 사탑과도 같은 건 가리센다 탑(Torre Garisenda, 48m)이며, 기운 가리센다 탑에 어깨를 내주는 키다리는 아시넬리 탑(Torre Asinelli, 97m)이다. 만일 당신이 얽힌 거미줄처럼 복잡한 볼로냐 시내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저 목을 뒤로 젖혀 하늘을 응시하면 된다. 두 탑이 십중팔구 눈에 들어올 것이며, 당신의 눈높이에서 탑과의 거리를 눈짐작으로 재보면 현재 위치가 얼추 파악된다. 스마트 폰의 앱보다 당신의 현재의 위치를 더 신속하게 알려주는 두 탑은 볼로냐의 아날로그 가이드다.
키다리 아시넬리 탑은 동화 같은 전설이 쌓여서 이루어졌다. 탑 이름을 당나귀(Asinelli)란 뜻의 아시넬리로 부르게 된 것과도 관련이 깊은 전설이다. 아주 먼 옛날 가진 것이라고는 두 마리의 당나귀 밖에 없는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땅을 사는 게 꿈이었다. 어느 날 당나귀가 밭을 갈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발 밑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의아해진 농부가 그곳으로 가 보니 금화가 가득 든 궤짝이 묻혀 있었다. 농부는 이 사실을 식구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농부의 아들은 장성해서 한 귀족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귀족은 딸의 연인을 거부했고 딸은 그만 병에 걸린다. 농부의 아들은 용기를 내어 연인의 부모를 만나 딸과의 사랑을 허락한다면 어떤 일이든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귀족은 볼로냐에서 가장 높은 탑을 지으면 딸과의 교제를 승낙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한낱 농부의 아들인 그가 무슨 수로 탑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고민에 빠진 아들은 아버지에게 고백했고 농부는 숨겨 논 궤짝을 내놓았고 아들은 탑을 지을 수 있었다. 농부의 아들은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을 했고 당나귀가 발견한 보물 덕분에 가능했던 혼사였기에 탑의 이름을 당나귀(아시넬리)로 정했다.
볼로냐는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주의 주도다. 에밀리아 로마냐 주는 이탈리아 중부에 동서방향으로 걸쳐 있어 북이탈리아와 중남부 이탈리아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인간의 신체에 빗대면 위장과 비슷한 높이에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위장’이라는 별명도 갖는다. 또한 이곳의 음식이 너무나 맛있어서 위장에 음식이 들어와도 위장은 여전히 허기를 느끼기 때문에 이곳이 “식도락의 천국”임을 은연 중에 내포한다.
<토르텔리니의 독특한 생김새는 많은 일화를 낳았다.>
이탈리아 미각을 주도하는 에밀리아 로마냐의 온갖 산해진미가 응집된 음식은 바로 토르텔리니(tortellini)다. 성인의 엄지손톱 만한 크기지만 그 생김새에 관한 일화는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많다. 비너스의 배꼽을 문구멍으로 몰래 본 요리사가(루크레지아 보르자 또는 요리사 정부의 배꼽이라는 일화도 있음) 훔쳐본 사실이 들통날 것을 감수하면서 그녀의 배꼽을 닮은 음식을 만들어 세상이 다 알게 된 발칙한 음식이다.
두께가 0.5mm정도로 얇아 아래의 물건이 다 비치는 반죽 안을 파미자노 레자노 치즈가루로 맛을 낸 모르타델라 햄, 프로슈토 크루도 햄이 채우고 있다. 완성된 토르텔리니를 닭 육수에 끓인 ‘토리텔리니 알 브로도’가 가장 인기 있는데, 에밀리아 로마냐 요리 중 꼭 맛봐야 할 음식이다. 에밀리아 로마냐의 레스토랑 대부분이 이 음식을 메뉴에 올리며, 혹시 메뉴에 없더라도 당연히 하기 때문에 써 놓지 않은 것 일 뿐이므로 그냥 주문하면 된다.
<에밀리아 로마냐의 와인은 에밀리아 가도의 역사와도 같다. 가도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와인지역과 각 지역을 대표하는 품종이 특화 됐다 >
에밀리아 로마냐 위장의 동서를 에밀리아 가도(Via Emilia)가 관통한다. 가도는 기원전 187년 마르코 에밀리오 레피토(Marco Emilio Lepido) 집정관의 주도 하에 건설되었으며 그의 이름의 일부가 도로명이 되었다. 토르텔리니의 재료가 되는 전통식품(파미자노 레자노, 프로슈토 크루토햄, 모르타델라햄, 발사믹식초)은 물론 스포츠카 팬을 열광시키는 페라리, 마세라티, 람보르기니 자동차도 에밀리아 가도를 따라 자리한 도시에서 생산된다.
에밀리아 가도의 좌우에 나 있는 구릉지에서 에밀리아 로마냐 주의 주요 와인이 생산된다. 가도를 따라 다섯 군데의 주요 와인 산지가 한 줄에 꿰인 진주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으며, 개별 와인 산지는 단일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에밀리아 가도의 역사와 함께 한 에밀리아 로마냐의 주요 와인은 다음과 같다.
■ 콜리 피아첸티니(Colli Piacentini) 구릉의 구트르니오(Gutturnio) 와인
콜리 피아첸티니 구릉은 에밀리아 가도의 극동에 위치한 와인 산지로 구트르니오(Gutturnio) 와인으로 명성이 나 있다. 이곳은 북위 45도에 위치하며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아마로네 등의 이탈리아 주요 레드 와인 지역이 같은 위도에 몰려 있다. 구트르니오는 로마시대 때 축제에 쓸 와인을 담아 두던 은주전자를 의미하며, 구트르니오 와인은 이탈리아 와인 중에서 와인을 담던 용기가 와인의 공식 이름이 된 제 1호다.
구트르니오 와인은 바르베라(barbera) 적포도의 힘과 산미 그리고 크로아티나(croatina) 적포도의 붉은 과일향과 타닌의 강직함이 어우러진 와인으로, 은잔에 가득 채워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인다. 탄산가스가 일으키는 청량감에 실려오는 구트르니오를 느끼고 싶다면 프라잔테(약발포성 와인) 타입이 좋다. 만일 묵직한 보디감과 타닌이 받쳐주는 체리, 제비꽃, 가죽, 버섯향을 선호한다면 드라이한 맛의 구트르니오가 제격이다.
<구트르니오 와인: 바르베라 품종의 힘과 산미, 크로아티나 품종의 붉은 과일향과 타닌의 강직함이 어우러져 있다>
■ 모데나 근교의 람부르스코 와인 (Lambrusco di Modena)
모데나 출신의 성악가 루차노 파바로티는 생전에 람부르스코 와인을 즐겨마셨으며 이 와인에 대한 미각과 지식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파바로티의 람부르스코 와인에 대한 사랑은 매우 각별해, 그가 탄 해외 콘서트행 비행기 안에는 람부르스코 와인이 실려있을 정도였다.
파바로티는 람부르스코 와인을 “야성적이며 무례한 스파클링 와인 Uno spumante selvaggio ed ineducato”이라는 몇 마디로 압축했다. 현지인들은 람부르스코에 대한 최고의 칭송이라고 치켜세우지만, 하필이면 왜 무례하고 야성적이란 말인가.
람부르스코 와인은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시게 된다는 그의 경고가 아닐까 싶다. 람부르스코의 중독성과 무절제에서 오는 피해는 바쿠스 신도 이미 경고한 적이 있다. 바쿠스 신은 람부르스코 포도를 자라게 한 다음 뿌리 사이에 새의 날개, 사자의 위턱, 당나귀의 아래턱을 숨겨놨다. 그의 의도는 11세기 카노사의 영주였던 마틸데 백작부인의 영토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침입했을 때 드러난다.
백작의 영토에서 나는 람부르스코 와인의 첫 잔을 마신 황제의 군사들은 새의 날개처럼 붕 뜨는 기분을 느꼈고 두 번째 잔을 마셨을 땐 사자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용기백배했고 세 번째 잔을 마셨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마치 걷지 않으려고 고집부리는 당나귀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적군의 상태를 감지한 마틸데 백작 부인은 이때를 이용해 힘들이지 않고 황제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다.
모데나 근교에서는 다양한 람부르스코 와인의 세계가 펼쳐진다. 품종 이름이기도 하며 이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포괄하기도 하는 람부르스코 품종은, 모데나 언덕의 토양과 기후에 적응하는 동안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도록 진화했다. 가장 많이 재배되는 람부르스코 품종 세 종류와 특징은 아래와 같다.
<보라빛의 탄산가스는 에밀리아 로마냐 주에서 돼지고기로 만든 기름진 음식을 먹었을때 입에 남는 느끼함을 말끔하게 제거해준다. ©CCFoodTravel.com>
람부르스코 디 소르바라(Lambrusco di Sorbara): 딸기, 제라늄, 장미, 제비꽃, 잔디의 화사한 향기는 봄의 절정에 달한 정원에서 꽃 축제가 벌어지는 것 같다. 혀를 가르는 듯한 산미와 차분한 타닌의 대비가 흥미롭다. 세 종류의 람부르스코 중 품종 특유의 보라빛 톤이 가장 엷다.
람부르스코 디 그라스파로싸(Lambrusco di Grasparossa):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보라색이 돌며 체리, 자두, 민트, 딸기, 카카오 향기가 또렷하고 강하다. 산도는 앞의 소르바라 보다는 덜하며 타닌은 강직하다. 미디엄 보디감에서 오는 충만함이 입을 채운다.
람부르스코 디 살라미노(Lambrusco di Salamino): 포도알이 작은 이탈리안 소시지(salamino)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의 두 와인과 비슷한 계열의 꽃향기와 과일향이 나지만 좀더 섬세하고 부드럽다. 산미와 타닌이 적당해서 람부르스코 와인 초보자에게 추천할 만하다.
※ "에밀리아 로마냐는 항상 배고프다 - 이탈리아의 위장(2)"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