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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영 Baek Nan Young (baeknanyoung@hanmail.net)
AIS(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 과정 1,2,3 레벨 이수 후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이탈리아 와인투어 전문기관 바르바롤스쿠올라(BARBAROL SCUOLA)를 운영하고 있다. 베를린 와인 트로피 심사위원이기도 한 백난영은, 이탈리아 와인 및 와인 관련 문화, 행사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와인 관련 전문 통/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Certified Professional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l President of Barbarolscuola, specialized in Italian Wine & Gastronomic Tour l Columnist of Korean Online Wine Magazine l Member of Judging Panel at: Berlin Wine Trophy, Asian Wine Trophy, Selezione Del Sincaco, Emozioni Dal Mondo, Portugieser Du Monde l Blogger l 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와인과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도 뭔가 허전하다. 나의 위가 디저트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은, 달달한 것으로 식사를 마쳐야만 한 끼를 제대로 챙겨 먹은 것 같은 이탈리아인들의 식습관에 물들었다는 증거다.


마침 한달 전 모데나에서 구입한 모데나 전통 발사믹 식초(Aceto Balsamico Tradizionale di Modena DOP, 이하 ABTM)가 눈에 들어왔고, 조금전까지만 해도 음식물로 지저분해진 접시가 놓여있던 자리는 어느새 바닐라맛 젤라토가 꿰찼다. 병 안에서 나오기 싫은지, 병 입구를 기울인 후 수 초가 흐른 뒤에야 ABTM이 한방울씩 감질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ABTM 장인들이 “흑색골드”라 부르는 발사믹식초의 금방울이 검은색 꼬리를 남기며 미끈한 젤라토 곡선을 따라 흐른다.

 

 

<병을 기울이고 5초가 지나서야 한방울씩 나오기 시작하는 12년된 발사믹식초 >

 


젤라토의 바닐라 맛은 산도에 사그라들다가 농축된 식초의 단맛과 섞이는 순간 되살아난다. ABTM의 신맛과 단맛은 당근과 채찍이다. 신맛은 혀가 아릴 만큼 톡 쏘지만 단맛은 굳어진 혀를 꿈결처럼 감싸준다. 작은 병(100ml) 안에 갇혀 있던 오만가지 향들이 젤라토를 매개삼아 튀어나온다.


와인과ABTM은 포도를 원재료로 한다. 같은 포도나무에서 왔지만, 쓰임새와 이것을 다루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 달라진다. 하지만 식초와 알코올로서 본색을 갖게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식초와 와인의 구분이 명확치 않다.


일단 이들의 뚜렷한 차이를 보려면 포도수확철에 와이너리와 ‘아체타이아(acetaia, ABTM을 발효하고 숙성하는 농장)’를 가보시라.  와인 만드는 곳은 와인 발효 냄새가 가득하지만 아체타이아는 식초 냄새와 모스토(포도주스) 끓이는 냄새로 진동한다. 


와인생산자들이 수확한 포도의 향기와 신선함을 유지하려고 신속하게 양조장으로 운반해서 제경, 압착을 하는 등 초를 다툴 때, ABTM 생산자들은 압착한 주스를 커다란 용기에 넣고 80~90도의 온도로 맞추어진 불에서 뭉근히 끓인다. 한가로운 장면이지만 포도주스가 식초로 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모스토가 끓으면 색소성분에 변화가 생겨 발사믹식초 특유의 짙은 갈색 테두리를 갖는 검은빛으로 변하고, 수분은 증발해서 당이 농축된 모스토 꼬토(mosto cotto)가 된다. 보통 하루 정도 끓이면 원래 모스토 양의 30% 정도로 줄어들며 당도가 32~38브릭스(brix)로 농축된다.


와인 병이 어두운 색깔인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햇빛을 차단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직사광선을 피하려는 대책은 애초에 와인 셀러에서부터 마련되는데, 셀러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 온도와 습도가 자동으로 맞춰지는 장소에서 와인은 익어간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 전등 스위치를 누를 때에는 마치 외출 준비하려고 쌕쌕 자고 있는 갓난아기를 깨울 때처럼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런데 와인 숙성에는 최악의 장소가 ABTM 숙성에는 최상의 장소로 반전이 된다. 어둠이 내리는 것 말고는 항상 햇빛이 잘 드는 지붕 바로 밑의 다락방이 그곳으로, 여름에는 한증막 같고 겨울에는 입김이 얼 정도로 추워서 기온의 변덕이 마치 양은냄비 같다. 전통 농가를 아체타이아로 사용하는 곳의 숙성실은 지붕 아래 방이지만 중세시대에 지어진 시계탑, 죄인을 가두던 종탑, 마굿간 등 기온차가 심한 곳이면 된다. 
 

 

발사믹.png

 <와인은 지하셀러에서 숙성하지만 ABTM은 햇볕이 잘 들고 기온차가 심한 다락방에서 숙성한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면서 여러 향기를 기억해내려 하며 향기의 변화나 타닌의 감촉을 통해 숙성용기의 소재와  숙성기간을 추측하려고 애쓴다. 오크통의 역할에 열광하는 동시에 지나친 오크숙성에서 오는 인위적인 향과 맛에는 싫증을 낸다. 그래서 오크통 크기에 변화를 주거나 널빤지 내부의 그을림의 정도가 다른 오크통을 번갈아 사용하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희석하거나 줄이려 한다. 


ABTM의 숙성에서 나무용기의 기능과 쓰임새는 와인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ABTM 장인들은 나무통 숙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나무에서 우러나오는 향에 관대하다. 다양한 종류의 목재와 크기를 수용하고 나무에서 우러난 맛을 전통의 맛으로 귀하게 여긴다.


아체타이아 숙성실에 들어가면  ‘마트로시카 러시아 전통인형’처럼 어미인형을 쏙 닮은 아기 인형들이 늘어서 있는 줄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큰 통은 가장자리에 놓이며 그 좌우로 크기가 작은 나무통들이 키재기 하듯 서있다. 이 나무통의 열을 ‘밧테리아(batteria)’라 부르는데 열마다 5~ 7개의 나무통이 한 세트다.  밧테리아의 수나 원목은 모데나 식초 농가의 경험이 녹아 든 것으로 식초 숙성에 최적화 되어있다. 가장 큰 나무통은 100리터, 가장 작은 통은 10리터 크기이며 어린 식초는 큰 나무통에, 오래된 식초는 작은 통에 담긴다.


큰 나무통은 밤나무와 뽕나무로 만들며 기공이 크고 조직이 물러서 초산균의 활동과 산화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 통에 담긴 식초는 윤기나는 짙은 빛과 타닌을 얻는다. 열의 중간에 놓인 나무통(30~50리터)은 체리와 노간주 나무로 만들고 이 통에서 숙성된 식초는 체리, 커피, 견과류, 향신료 향이 우러나며 6%나 되는 강한 산이 유쾌한 맛을 주는 산으로 변한다.


열의 끝에는 제일 작은 통(10~20리터)이 놓이며 조직이 치밀하고 바닐라 향이 풍부한 오크나무로 제작된다. 오크나무 통은 식초 숙성의 마지막을 담당하며 이곳에 옮겨진 식초는 최소 12년 또는 25년 숙성된 것들이다.


오크통의 식초는 ABTM 콘소시엄에 보내져 전문 심사 패널의 관능검사를 거친다. 여기에서 통과하면 주자로(Giugiaro)가 디자인 한 100ml병에 담겨 합격마크를 부착한 뒤 시장에 출시된다. 합격마크를 두른 병 뚜껑 색깔은 ABTM의 숙성기간을 알려주는데 황금색(Extravecchi) 뚜껑은 최소 25년, 적색(Vecchio)은 최소 12년 된 것이다.
 

 

Monte Remellino.png

<Monte Remellino의 식초 장인은, 모데나 와인 DOC 규정에 따라 재배한 람부르스코, 피뇨레토, 트레비아노의 세 가지 포도를 압착해서 얻은 즙을 끓여 모스토 꼬토를 얻은 후 밧테리아에서 12년 또는 25년 이상 숙성시켜 모데나 전통 발사믹 식초를 만든다>

 

 

발사믹 식초가 한창 숙성 중일 때 현란한 쇼가 벌어진다. 쇼의 주인공은 발사믹 식초 장인이고 공연기간은 모균의 활동이 주춤할 때인 10월 말에서 3월 말 사이다.  쇼의 제목은 ‘린깔지(rincalzi, 나무통 갈이)’로 발사믹 식초를 큰 나무통에서 더 작은 나무통으로 옮긴다는 내용이다. 식초를 옮기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식초 장인이 중간 부분이 볼록한 유리관을 숙성 중인 식초 위에 떠있는 피막을 뚫고 삽입한다. 유리관 입구에 입을 대고 숨을 들이쉬면 볼록한 부분에 식초가 채워지고, 이 유리관을 다른 나무통으로 가져가서 유리관 입구를 열면 식초가 새 통으로 흘러 들어간다.

 

 

<차가운 계절에 린깔지(나무통 갈이)를 한다. 유리관을 나무통에 삽입할 때에는 모균의 활동으로 형성된 피막이 파괴되지 않게 주의한다.>

 


이 때 옮겨 담는 양은 나무통에 담겨있는 양의 30%를 넘지 않는다. 원래 나무통은 80% 정도 차 있으니 50%는 남겨두는 셈이다. 왜 그럴까? 그 50%가 모스토 꼬또(끓인 포도주스)가 초산발효한 후 얻어진 식초를 숙성시키는 주역, 즉 모균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모균은 아체타이아 환경에 적응한 균이며, 각 농가마다 다르고 농가만의 독특한 맛이 배어있는 비밀농축액이다. 나무통은 2세대가 사용할 정도로 견고하며, 1세대가 나무통을 구입했을 때 그 안에 채운 것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므로 모균의 수명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ABTM에 모균이 있다면 와인에는 마드리(madri)균이 있다. 빈산토 스위트 와인에서 나는 견과류와 농익은 과일향, 꿀같은 끈끈함, 조청 빛깔 등은 마드리균과 모스토의 합작이다.


압착한 모스토를 50리터 크기의 카라텔리(caratelli, 밤나무통) 안에 넣고 시멘트로 입구를 봉한 뒤 다락방으로 옮기는데, 여기까지는 ABTM의 초기과정과 비슷하다. 이 카라텔리 안에는 마드리균이 살고있는데, 모스토는 이 균과 10~50년 이상 공생하다가 시멘트의 봉합을 제거하는 날 그 달콤함을 세상에 드러낸다.


식초는 일 년에 한 번 나무통갈이(린깔지)를 할 때 그 숙성상태를 알 수 있지만, 빈산토는 입구를 개봉하는 날까지 내용물을 확인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예전 빈산토가 숙성된 카라텔리 안에 새 빈산토를 넣으면 무사히 숙성이 완결될 거란 사람들의 믿음과 염원이 담겨 있다.


아마로네 와인의 탄생 일화는, 한 농부가 달콤한 와인을 만들려다 깜빡 잊고 늦게야 기억해 낸 것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건망증을 책망하면서 발효통을 열어본 농부는, 식초로 변했을 거라 생각했던 와인 대신 멋진 아마로네 와인이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슷한 경우가 모데나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한다면, 식초 대신 드라이한 레드 와인으로 변했다고 농부는 자신을 질책했을 지도 모른다.


와인 종사자들 사이에 와인의 신맛이 두드러질 때 식초의 신맛에 비교하고 와인을 상온에 놔두어 식초가 되어버렸다는 식초비하 발언은 모데나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모데나 식초 장인들은 와인을 부주의하게 다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결점을, 모균이 사는 밧테리아에 푹 삭여 흑색골드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을 알기 때문이다. 모데나에서는 흑색골드로,  여기서 불과 한 시간여 떨어진 발폴리첼라 계곡에서는 아마로네 와인으로 변신하는 모스토는 마술지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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