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물랑루즈가 있다면 보졸레에는 물랑아방이 있다.
– 세드릭 뱅상의 '물랑아방 하모니'와 할아버지께 바치는 오마주 와인 '보졸레 블랑'
지난 4월 누런 재활용 종이 쇼핑팩에 두병의 와인과 글쓰는 것이 어색한 듯한 손편지 한통을 건네 받았다. 편지가 흔하지 않은 사회에 살다보니 신기한 마음에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파리에 물랑루즈가 있다면 보죨레에는 물랑아방이 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와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는데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죨레 북쪽에 위치한 물레아방 마을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보죨레의 왕 King of Beaujolais' 이라 불린다. 물레방아를 연상시키는 물랑아방은 실제로 '풍차' 라는 뜻이기도 하며, 우수한 와인으로 평가받는 열개 크루 보죨레 마을 중 하나이다. 이 지역의 땅은 철과 마그네슘이 풍부하여 파워풀면서도 안정된 조화를 이루고 오랜 기간 보관, 숙성이 가능한 와인을 생산하기 때문에 왕이 가진 이미지로 비유되는 것이다. 빈티지가 어린 와인들은 상큼하고 풍부한 꽃향기, 입 속 가득한 딸기 등 붉은 과일 맛과 신선한 산도의 깔끔한 마무리가 특색이라면, 10년 이상된 물랑아방은 섬세함이 더해지는 농후한 매력을 발산한다."
물랑아방에서 생산된 이 ‘하모니’ 와인은 젋은 와인메이커 세드릭 뱅상씨(위 사진)의 대표 와인들 중 하나이다. 1.9미터 정도의 훤칠한 키에 호남형인 그는 왕년에 유도 선수였다. 그러나 만18세에 오토바이 사고로 무릎에 큰 부상을 입어 운동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스포츠 정신은, 그가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을 빠르게 극복하고 와인생산자의 길로 들어서는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다. 4년간 와인메이커가 되기 위한 정식 교육을 받은 그는, 이후 10년간 부르곤뉴 본(Beaune)에서 약 50개 도메인들과 와인 생산 및 마케팅 관련 일을 했다. 한편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는데,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세대는 먹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을 때라서 끼니를 거르지 않는 직업인 제빵사를 하셨었어요. 그러다 땅을 물려 받아 포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셨죠. 요즘에나 와인메이커다 해서 좀 근사해 보이지만, 할아버지 세대는 포도를 재배해서 와인을 만들어 파는 농부인거죠. 그러다 할아버지가 고령으로 현업이 힘들어 지자 외손자인 저에게 그만의 노하우를 가르쳐 주시면서 대를 잇도록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지금 이렇게 자랑스러운 ‘와인 농부’가 됐습니다. 저의 보죨레 화이트 와인 중 할아버지를 위한 오마주 와인인 ‘랑세스트랄’ L’Ancestrale'('조상으로부터' 라는 뜻, 아래 사진)은 할아버지께서 유산으로 주신 밭에서 생산됩니다. 이 밭에는 50년된 샤도네 품종의 포도 나무가 2000그루 있습니다. 보죨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죠. 제가 4살 때 처음 맛본 와인은 바로 이 밭에서 나온 겁니다. 그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해요. 그래서 아마 제가 이 일을 하고 있나봅니다."
2010년과 2014년 호스피스 드 본(Hospice de Beaune)에서 '청년 와인메이커상 Jeunes Talents'을 수상함과 동시에 그의 와인은 급속도로 국제적으로 인지도를 높여갔다. 현재 미국, 영국, 이태리, 덴마크, 네덜란드 등에 수출되고 있으며 로버트 파커 평론의 평가 리스트에도 포함되어 있다. 독특한 점은, 매년 리옹에서 성황리에 열리는 시라(Sirha) 세계 요식업 행사에서도 ‘2015 베스트 와인장인 요리사 Meilleur Vigneron Cuisinier' 3위를 차지할 만큼 그는 섬세함을 지닌 요리하는 와인메이커라는 점이다. 미쉘랑 스타 쉐프 에두아 루베(Edouard Loubet) 대부의 추천으로 전세계 2만5천명 멤버를 둔 쉐프들의 클럽(Disciples Escoffier)에 2014년 가입하게 되는데, 와인 메이커로서는 극히 드문 경우이다. 또한 두카스(Ducasse) 스타 레스토랑의 소믈리에인 제하 마흐종(Gérard Margeon)의 추천을 받아 2017년에는 프랑스내 ‘올해의 와인 장인 20명’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는 포도를 재배할 때 화학 약품 사용을 배제하거나 최소화하며, 손으로 직접 수확함으로써 양질의 과실을 얻고자 노력한다. 또한 와인을 양조할 때 음력을 통한 자연의 흐름과 시간에 따르는 비오다이나믹 방법을 오래 전부터 채택해 왔다. 테루아를 최대한 반영하는 와인을 생산하고자 하는 그는 크루 보죨레인 물레아방(Moulin à Vent)과 브루이(Brouilly)를 생산하고 있으며 최근 매입한 크루 보죨레인 씨루블(Chiroubles)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 글쓴이_ 원정화
특유의 붙임성과 타고난 개그 본능으로 인터폴 190개 회원국가의 남녀 동료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으나 일할 때는 까칠한 국제경찰기구 인터폴 최초의 한국인 여성, 원정화. 인터폴 내 모든 프로젝트 기획서가 반드시 승인을 거쳐야 하는 예산부 소속이다.
한때 '미모간첩 원정화 검거' 소동이 네이버 검색어 1위에 올라 "너 아니지?" 라는 문자와 전화가 걸려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국제 사회에도 알려지면서 ‘한국 사람들은 대강 대강 한다’ 라는 선입견이 싫어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자신도 3개 국어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그녀는 1999년 2주 동안의 런던 여행을 계획하고 비행기에 오른 뒤 지금까지 18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현재 7년째 프랑스 리옹에서 어린 두 딸과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닮은 남편과 지내고 있으며, 유럽 땅을 밟은 후 자연스럽게 와인과 친구가 되었다.
런던의 금융가 시티에서 근무하던 2009년, 와인 전문 교육 기관인 Wine and Spirit Education Trust 런던 본점에서 WSET Level 3 뱃지를 수여받으며 아마추어에서 전문 와인인으로 가는 초석을 다졌다. 현재는 세계 안전과 육아 의무 와중에 WSET Diploma Level 4 과정을 병행하고 있다.
인터폴은 반공무원이라 할 정도로 안정된 직장이지만 새로운 도전을 갈망하던 그녀는 휴직서를 제출했고, 2017년 6월 1일 드디어 6년간 근무하던 인터폴을 떠나 <리옹 와인>의 "리옹댁 원정화"로 10년 동안 미뤄왔던 모험을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크루 보죨레(Beaujolais crus)에 열정을 담았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4월에 열린 B.B.B 연중행사(Bien Boire en Beaujolais - 잘 마시자 보죨레) 에서 알란 꾸데(Alain Coudert 플러리 크루 마을)씨의 와인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보죨레 와인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소중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어둠속에서 시야를 되찾은 것 같았던 당시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며 WineOK의 유경종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알란 꾸데씨의 대표적인 와인, ‘그리프 두 마키 Griffe du Marquis' (위 사진, '후작의 서명'이란 이름의 이 와인은 Robert Parker로부터 92점을 받았으며 Wine Advocate 제196호에도 등장했다)를 소개했다. 친인척과 가까운 지인을 위해 소량만 만든 와인이라 수출도 제한적이라는데, 한국에 간다는 그녀를 응원한다며 알란씨가 그리프 두 마키 와인 세 병을 챙겨주었던 것이다.
리옹댁 원정화는 앞으로 열 개의 크루 보졸레 마을을 대표하는 생산자들의 와인을 한국 시장에 소개할 예정이다. 대중적인 와인 맛에 다소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를 와인 애호가들에게 기대할 만한 소식이다.
"일년에 적어도 두 번은 한국의 와인 전문가들과 소비자들을 만나 함께 와인을 시음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는그녀는, 오는 10월 10일 '10 크루 데이'를 기획하고 있으며 프랑스 주한 상무관 주최의 '프렌치 와인 테이스팅' 참여를 추진 중이다. 또한 현지 생산자들에게 한국 시장의 특성과 매력을 알리는 등 한국과 프랑스의 비지니스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데에도 미력하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상도를 지키면서 열개 크루 보졸레 와인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그녀, 리옹댁 원정화에게 애정 어린 관심과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