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정신 발판 삼아 비상한


신세계 와인 강국, 미국 [3]


-미국 와인의 부흥기 since 1976 -



글, 사진 _ 김지혜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큰 면적을 지닌 나라이자 가장 활발한 신세계 와인 생산국으로 손꼽히는 미국의 와인 재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포도재배 역사는 개별적인 두 개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가지가 서로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해안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시작된 미국 와인의 역사보다, 1976년의 어느 한 시점에 부각된 캘리포니아 와인이 일으킨 사건 하나가 곧 미국 와인의 역사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17세기 미국, 와인 역사가 시작되다

<와인 바이블>의 저자 캐런 맥닐에 의하면 미국 와인 재배의 역사는 대서양 연안의 동해안 지역에서 시작된 17세기 초반의 포도재배에 관한 역사, 그리고 정반대의 서해안쪽에서 일어난 와인 제조의 역사로 나누어볼 수 있다. 미국 동부 지역에서는 17세기 초반 유럽산 포도로 와인을 생산하려는 시도가 최초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럽산 포도나무들은 한결같이 다양한 병충해로 인해 결국 죽고 말았고 이런 이유로 동부의 와인 재배의 꿈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그 사이 서해안에서는 또 다른 와인 생산에 대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1700년대 초반, 멕시코에서 북쪽, 텍사스와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동한 스페인 탐험가들과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일련의 선교단을 설립하고 미사용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이 재배한 포도는 스페인산으로, 19세기 초 선교단과 작은 포도원들은 샌프란시스코를 넘어 북쪽의 소노마까지 퍼져갔다.


골드 러시, 캘리포니아 와인 역사의 시작

1849년,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시에라 산맥의 구릉지대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와인에도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골드러시 덕분에 몰려든 이들의 상당수가 금광이 고갈되면서 포도재배와 농사에 관심을 돌린 것이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핀란드의 선장 구스타프 니바움(Gustav Niebaum)과 헝가리의 귀족 어고스톤 하라치(Agoston Haraszthy)다. 니바움은 모피 무역회사를 경영하며 나파 밸리에 눈을 돌려 잉글누크(Inglenook) 와이너리를 설립했고, 하라치는 소노마에 부에나 비스타 와이너리를 세워 포도재배와 와인양조 촉진에 힘을 쏟았다. 그는 초창기 약 165개의 서로 다른 품종을 수입하며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캘리포니아의 아버지라 불렸다.

이들의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캘리포니아 북부의 포도재배는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880년대에 이르러 서해안 지역에는 와인 산업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미국 전체가 유럽 국가들처럼 와인을 즐기며 문화를 형성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반 세기 동안 동해안과 서해안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와인 산업은 1차 세계대전(1914)과 금주법의 시행(1919), 필록세라 병충해의 공격(1920)으로 인해 황폐화되었으며, 이후 대공황(1929)과 2차 세계대전(1939)을 거치면서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미국 와인의 중심, 캘리포니아

이렇게 무너지고 폐허가 된 미국의 와인 산업에 새로운 시대가 펼쳐진 것은 1960~1970년대였다. 당시 로버트 몬다비가 운영하던 찰스 크룩 와이너리와 잉글누크, 볼리유, 루이 마티니와 베린저가 나파밸리 5대 와이너리로 손꼽히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독립심이 강한 개인들이 캘리포니아 북부로 모여들었다. 이유와 배경은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와이너리를 시작하겠다는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포도재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이들의 대부분은 소득과 교육 수준이 높은 상류층에 속했으나 그들은 좀 더 단순한 삶을 원했다.

기존에 자리잡고 있던 마티니(Martini), 몬다비(Mondavi), 갤로(Gallo) 등의 양조업자들 대열에, 새로 이주한 케익브레드(Cakebread), 셰이퍼(Shafer), 조던(Jordan), 슈램스버그(Schramsberg)의 데이비스와 같은 이들이 합류하면서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은 두 번째 붐을 맞았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가장 잘 팔리던 캘리포니아 와인들은 모두 저렴하고 달콤한 와인이었다. 이것으로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구세계 와인들 속에서 이름을 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 출신의 와인상인 스티븐 스퍼리어가 주최한 <파리의 심판>이 열렸다. 작은 와인 아카데미에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한 작은 발상에서 시작된 이 이벤트는 미국의 와인 산업을 180도 뒤집어 놓는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응답하라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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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애호가라면 영화 <와인 미라클>, 조지 태버의 저서 <파리의 심판>, 그 밖에도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파리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필자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요 와인 산지인 나파 밸리와 소노마 밸리를 방문하면서 놀랐던 사실은, 캘리포니아 와인의 역사와 성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누구하나 예외 없이 1976년 파리의 심판에 그 영광을 돌리더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미국 와인 특히 캘리포니아 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뉘었다. 당시 미국 동부는 프랑스 와인이 평정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미국 와인이나 미국 와인 소비자들은 프랑스 와인이나 프랑스인들에 비해 한 수 아래의 취급을 받았다.

이 무렵(1975년) 프랑스에서 와인 숍과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가 그의 가게를 홍보할 방법을 찾던 중, 다음 해 파리에서 개최되는`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행사’ 기간 동안 최고의 캘리포니아 와인 시음회를 개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바람은 단 하나,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이 미국 와인의 품질에 좋은 인상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캘리포니아 와인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싶은 의도였을 뿐 그조차도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산 샤르도네 6종과 카베르네 소비뇽 6종을 선정했으며, 같은 품종으로 만든 부르고뉴산 정상급 화이트와인 4종과 카베르네 품종의 그랑크뤼 보르도 레드와인 4종을 선정하여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진행했다.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 가운데 최고의 인물들을 포함시켰고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레이블을 가린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진행했으며, 그 결과는 경악 그 자체였다.

최고의 평가를 받은 화이트 와인은 1973년산 샤토 몬텔레나, 레드 와인 중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한 와인은 1973년산 스택스 립 와인 셀러의 카베르네 소비뇽이었다. 훗날 스티븐 스퍼리어는 이 사건으로 프랑스 와인 업계로부터 퇴출 당할 위기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이 사건은 와인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현재 나파 밸리를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는 고급 와인의 대표적인 생산지 중 한 곳이 되었고 파리의 심판에서 최고 와인으로 선정된 샤토 몬텔레나와 스택스 립을 능가하는 고가의 와인들-할란, 콜긴, 아로호, 스크리밍 이글 등의 컬트 와인들이 생산되고 있다. 이처럼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저마다의 열정과 철학으로 다양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2013년의 캘리포니아에서 지금까지도 1976년의 사건이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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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저자 엘린 멕코이는 파리의 테이스팅을 `미국 와인이 성년기에 이른 순간’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파리의 심판은 캘리포니아의 와인 양조자들을 비롯해 미국의 와인소비자들과 미국 와인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 와인 양조자들은 새로운 사명감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미국인들을 비롯한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은 프랑스 이외의 곳에서도 뛰어난 와인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에게 이제 미국 와인도 고려해 볼만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각인시킨 것은 큰 성과였다.

<파리의 심판>의 저자이자 이 역사적인 행사를 취재한 기자인 조지 태버는 이 사건을 두고 “1976년 5월 24일, 와인 세계의 민주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시음회가 와인 세계의 오랜 통념 두 가지를 흔들어 놓았다고 기술한다. 첫째는, 뛰어난 와인은 `프랑스의 위대한 테루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훌륭한 와인을 만들기 위한 기술을 습득하는 데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남긴 유산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큰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76년 파리의 심판에 대한 기억과 의의는 10주년, 20주년, 25주년 행사를 통해 지금까지도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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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산지 기행은 다음 순서로 연재됩니다.

3편 : 미국 와인의 부흥기 since 1976
4편 : 프리미엄 와인의 중심, 나파 밸리
5편 : 다양성의 미덕, 소노마 밸리


글쓴이 _ 김지혜
현) 홈플러스 와인 홍보 담당, WineOK.com 와인 전문 기자
전) 와인전문 매거진 와이니즈’ 기자, 수입사 나라셀라 홍보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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