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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표

다섯째날

오늘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자 점심에 피에르 가네(Pierre Ganaire)에 가는 날이다.
피에르 가네는 파리에 있는 미슐랭 쓰리스타 중에서도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 레스토랑이다. 꼭 한 달 전부터 예약을 받는데 한 달 후의 점심과 저녁 예약이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나도 한 달 전에 용케 팩스로 예약을 했다.

레스토랑은 샹젤리제 거리에 인접해 있는 발자크 호텔 1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니 현대적인 장식에 아름다운 추상화들이 벽에 걸려있다. 모든 종업원들은 검정색 수트에 나비 넥타이, 흰색 슈미즈를 입고 있으며, 특이한 점은 레스토랑 규모에 비해 종업원 수가 무척 많아 보였다. 아마도 한 테이블에 한 명 꼴인 것 같다.

아페리티프로는 안 먹어 본 것을 먹어보기로 했다.
키르 플랑브와즈와 키르 뮈르(Mur).
플랑브와즈는 영어로 Raspberry, 뮈르는 Blackberry라고 설명을 해주며, 뮈르가 조금 더 달콤하다고 아내에게 권한다.


어쨌든 둘 다 와인 향과 관계가 많은 열매들이다. 둘 다 아주 향기로웠고 아내도 너무 맛있다고 한다. 끼르는 주로 까시스로 만들어 먹는데 복숭아나 플랑브와즈, 뮈르 등으로 만든 끼르도 기회가 닿으면 꼭 한 번 맛보시길 권한다.

아페리티프와 함께 아뮈즈결(Amuse-Guele 가벼운 안주거리)이 나왔는데 여기서부터 뭔가 범상치 않음을 예고한다. 예쁜 크리스탈 접시가 두 개 나왔는데 그 위에는 앙증맞게 작게 만든 요리(이것도 요리라고 해야 할 듯)들이 올려져 있다. 맛들을 보니 모두 짭짤하거나 고소하다.

아페리티프를 마시면서 본격적으로 메뉴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앙트레, 생선, 해산물, 오리고기, 닭고기, 양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채소요리등으로 나뉘어져 있고, 요리 이름 하나가 보통 2줄에서 3줄이다.


아내가 영어로 된 메뉴판이 없느냐고 묻자, 그건 없고 영어로 설명해드리겠다고 한다. 원하면 일본어로도 설명해 주겠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린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메뉴판을 한참 보던 아내가 가격이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알고 보니 나에게 갖다준 메뉴판에만 연필로 조그맣게 가격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앙트레 90~100유로, 메인은 100~200유로 정도이다.
가격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우리에게 구세주가 있었다. 바로 점심에만 있는 셋트메뉴. 앙트레와 메인 합해서 90유로. 다행이 아내도 이걸 시키자고 한다.

주문을 하고 나니 와인 리스트를 가져 온다.
음식 메뉴판과 와인메뉴판을 함께 가져오는 지난 번 '레부키니스트'와는 또 다르다.
리스트를 보니 역시 로마네 꽁띠와 페튀리스를 비롯하여 주옥같은 와인과 빈티지들이 즐비했다. 정말 한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 것인가? 큰 맘 먹고 MUSIGNY'97을 주문했다. 가격은 227유로. DOMAINE이 LEROY나 COMTE DE VOGUE면 더 비쌀텐데 그나마 JACQUES-FREDERIC MUGNIER이어서 이 가격일 것이다.

드디어 소믈리에가 와인을 가지고 왔다.
소믈리에의 복장은 다른 종업원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검정색 수트는 같으나 그 위에 검정색 앞치마를 두르고, 가슴에는 보라색 포도송이 뱃지를 달고 있다.
먼저 라벨을 보여주고 내가 OK하자, 옆에 놓여 있는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익숙한 솜씨로 와인을 딴다. 그러고 보니 모든 테이블에는 옆에 와인용 사이드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특이한 것은 나에게 테이스팅 시키기 전에 먼저 시음용 잔에 조금 따르더니 어디론가 가져간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자기네가 먼저 시음해 보는 것일까? 조금 있다가 다시 오더니 내 잔에 테이스팅용으로 조금 따라 준다. 내가 C'est bon(쎄 봉)하자 아내부터 잔의 1/3정도 따른다. 와인잔을 보았더니 리델은 아니고 S자가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와인을 본격적으로 시음했다. 잔을 돌려서 코를 갖다대니 체리향과 아까 맛 본 Raspberry향이 나고 꽃향도 났다. 조금 더 깊게 들이 마시니 익은 과일향과 구리구리한 시골밭 냄새가 난다. 아 부르고뉴에도 이런 두엄 냄새가 나는구나.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부르고뉴 특유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느낌이 온다.
실제로 달지는 않으면서도 달콤한 느낌을 주고, 보르도 그랑크뤼처럼 걸죽하지는 않으면서도 밍밍하지 않고 속이 꽉 찬 느낌을 준다. 밸런스가 잘 맞아 신 맛이나 쓴 맛이 거의 없어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또 인공적인 맛은 하나도 없고 자연의 맛을 준다.


사실 이런 와인들은 진짜 맛이 있어 벌컥 벌컥 마시고 싶은 충동이 든다. 딱 한가지 오늘 MUSIGNY의 단점은 아직 좀 어려 아주 깊은 맛을 내지는 못하는 점일 것이다

부르고뉴 와인은 그 향과 맛이 너무도 감각적이고 섹시해서 꼭 마약같다는 생각이 든다.
몸에 나쁘지 않은 마약. 맛좋은 마약. 자꾸만 생각나는 마약.
이 와인에 맛들이면 보르도 와인을 안 사게 된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주옥 같은 부르고뉴 레드와인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로마네 꽁띠를 제외한 5가지만 꼽으라면 난 다음을 꼽겠다.
CHAMBERTIN, LA TACHE, RICHEBOURG, CLOS DE LA ROCHE 그리고 MUSIGNY.
DRC의 LA TACHE를 제외하면 모두 LEROY가 최고의 생산자이다. 이 것들의 문제는 보르도 1등급을 능가하는 엄청난 고가라는 것이다.

소믈리에와 몇 가지 얘기를 나누다, 불현듯 그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부르고뉴와인중 하나가 아닐까 짐작하면서…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대답은, COTE-ROTI 3가지 라고 한다. LA LANDONNE, LA MOULINE, LA TURQUE, 로버트 파커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고 농담하려다 참았다.
대신 이 와인들의 최고 빈티지는 85년산이 아니냐고 내가 말하자, 맞다고 하면서 나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앙트레가 나왔다.


한 사람 앞에 3접시씩 나오면서 종업원이 하는 말이 "첫번째 앙트레"라고 한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또 3접시가 나왔다. 달팽이 요리, 아스파라가스 요리, 생선회 요리등이 하나같이 맛깔스럽게 각각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내가 먹는 순서가 있느냐고 묻자, 순서는 없다고 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아름다운 요리들을 사진에 못 남겼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허락 없이 사진 찍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아 물어 보았더니, 역시 자기네 식당에서는 사진 찍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아주 공손하게 얘기한다.

다만 내가 주문한 와인 사진만은 내가 원한다면 예외로 하겠다고 한다.
이 후 메인으로 두 접시가 나오고 디저트로는 무려 7접시가 나왔다. 그 많은 맛있는 음식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내가 음식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무슨 재료에 어떻게 요리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또 요리들이 워낙 난해하기도 했다.


우린 그냥 무슨 요리인지도 모르고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맛있다는 말만 연발하면서…
그리고 아내와 나는 입을 모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음식에 그 가격이면 너무 싸다고…
일전에 서울에서 신라 호텔 프랑스 식당(라 콘티넨탈)에 1인당 25만원 짜리 와인 디너를 간 적이 있었는데 사실 여기와 비교하니 너무나 형편없었던 것 같다.

한창 먹고 있는데 종업원이 어떤 부인을 데리고 와서 소개한다.
마담 '가네(Ganaire)'라고. 내가 웃으면서 피에르 가네는 어디 계시냐고 묻자, 역시 웃으면서 주방에 있다고 대답한다.

세계 정상급 레스토랑에 와서 몇 가지 느낀 점은, 서양요리도 잘 하는 곳은 느끼하지도 않고 우리 입 맛에 잘 맞는다는 점과 좋은 음식은 위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앙트레에 생선회 요리가 나오는 걸로 봐서 요리도 점점 세계화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서양요리는 차례대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꼭 우리나라 잔치상 같았다. 푸짐하게 차려져 있고 먹고 싶은 것부터 골라 먹는 것이…


와인은 잔이 다 비기 전에 끊임없이 채워주고, 맨 마지막에는 와인 병에 와인을 남기지 않고 다 따라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끔 찌꺼기가 있다는 이유로 와인을 조금 남기는 경우가 있다.)
디저트가 끝나고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으니 MUSIGNY 라벨을 떼어서 갖다 준다.
아마도 내가 와인병 사진을 찍으니 서비스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식당을 나와서는 와인샵에 가서 부르고뉴 와인을 몇 병 사고 호텔에 가서 짐을 챙겨 다음 여정인 독일 뒷셀도르프로 떠나기 위해 파리 북역으로 향했다.


독일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친구가 아마도 무척 반길 것이다.

이번 파리 와인 투어는 보르도나 부르고뉴 샤또 방문과는 또 다르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 정 재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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