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째날
느즈막히 잠이 깨졌다.
시차가 어느 정도 극복된 모양이다. 오늘은 아침을 생략하고 12시에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르 트랭 블르(Le Train Bleu)는 파리 남쪽의 리용 역안에 있는 독특한 식당이다.
기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플랫폼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운치있는 분위기의 식당이며, 뤽 베송 감독이 '니키타'를 촬영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실내 인테리어는 역내 식당답지 않게 굉장히 격조 있고 고풍스런 분위기를 준다. 창 밖으로 눈을 돌리니 푸른색 TGV기차들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은 가방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꼭 무슨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셋트 메뉴가 있어 주문을 했더니 앙트레와 메인 그리고 치즈에, 375mm 작은 사이즈의 와인 한 병이 나온다. 가격은 46유로.
아내는 따로 에스꺄르고와 생선요리를 시켰는데 맛있다고 한다. 달팽이요리는 한국에서 나오는 것과 달리 알이 크고 맛있다.
와인을 보니, GAILLAC Controle, CAHUZAC-SUR-VERE.
까위작은 프랑스 남서쪽 Toulouse 근처라고 한다. 보르도 밑인 것 같다. 맛을 보니 의외로 탄닌은 부드러웠다. 다만 신 맛이 좀 있었다.
식사 후 커피는 생략하고, 리용역 근처에 육교를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비아뒤크 카페(Viaduc Cafe)를 찾아갔다.
높은 아치형 천정 밑에 현대식 가구를 놓아 콜로니얼 양식으로 배치된 곳이었다. 테이블들은 실내와 노천에 있고 실내에는 재즈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 노천에 자리잡고 간단히 에스프레소 두 잔을 시켰다.
한참동안 햇빛을 즐기다가 와인 박물관(Musee du Vin)을 가기 위해 일어섰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와인샵이나 와인바는 모두 문을 닫으므로 박물관 방문이 제격이었다.
메트로 빠시(Passy)역 근처에 있는 파리 와인 박물관은 큰 기대없이 갔다가 깜짝 놀랐다. 긴 지하 까브를 이용하여 온갖 와인에 관련된 역사물과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까브내 별실에는 탁자와 의자를 갖다 놓고 와인을 시음하게 해놓았다. 6.5유로를 주고 입장권을 사니 와인 시음권을 한 장 주었다. 마침 더운 날에 시원한 지하 까브를 따라 관람을 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또 실제로 볼 것이 많았다. 옛날에 포도 재배할 때 쓰던 장비와 연장들, 옛날 와인병들, 와인관련 소품들, 와인을 재배하고 시음하는 사람 인형들 등 역시 박물관의 왕국답게 잘 만들어 놓았다.
와인 관련 기념품도 판매하는데 가격은 역시 시중보다 조금 비쌌다. 관람을 끝낸 후 동굴 속에 마련해 놓은 탁자에 앉으니 시음할 와인을 갖다 준다.
CHATEAU LABASTIDIE'00 GAILLAC CONTROLE.
가이약은 바로 점심때 리용역 레스토랑에서 마신 와인이다.
보르도보다 더 남쪽 지방의 와인이라 그런지, 향도 블랙 커런트향이 강하고 맛도 진했다. 그러면서도 뒷 맛은 약간 신 맛이 올라왔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탄닌이 그렇게 거칠지는 않아 마실만은 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어느 샤또 까브에 들어와 마시는 것 같은 분위기라 와인 마시는 장소로는 최고였다.
시음와인은 그 외에도 돈을 내고 마실 수 있는 와인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리스트를 보니 CH. D'YQUEM'94가 있었는데 39유로이다. 95빈티지도 아니고 94 한 잔에 5만 5천원이면 아무래도 좀 비싸다.
어쨌든 파리 와인 박물관은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꼭 한 번 와 볼만한 곳이다.
더운 한낮을 시원한 동굴에서 보내고 나와 오페라 예약을 하러 갔다가 9일까지 표가 없다는 얘기만 듣고 물랭 루즈를 예약했다.
파리에 있는 살롱 뒤 떼 중에 가장 예쁜 곳이라면 앙젤리나(Angelina)가 있다. 몽블랑 케익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외국인이 많은 셍또노레 거리에 위치해 관광객의 손때가 좀 묻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워낙 세련되고 아름다운 살롱 뒤 떼라 한 번 쯤은 가볼 만 하다.
저녁은 인도 음식을 먹어보기로 하고 '인도거리'라 불리는 10구의 빠사쥬 브라디(Passage Brady)로 갔다. 이 곳은 인도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빠사쥬 거리에 식탁들을 놓고 노천에서 식사할 수 있게 해놓았다. 빠사쥬는 지붕이 있는 골목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식사하는 것도 상당히 색다르고 운치가 있다.
빠사쥬 중간쯤에 있는 야스민(Yasmin)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는데 메뉴에 와인이 없어 와인 리스트가 따로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네 집은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하는 게 아닌가.
순간 당황이 되었다.
건너편 집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저건 뭐냐고 했더니 자기네 집만 알코올을 취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서 마시는 것도 안되냐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 번 들어온 집을 다시 일어나 나갈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음료수로 망고 라씨(Lassi)를 시키고 탄두리 치킨, 새우카레, 치킨카레를 주문했다.
아내가 망고 라씨가 무척 달콤하고 맛있다고 하자, 와인이 없어 기분이 좀 상한 나는 "이거 설탕 탄 거 아냐?" 말해놓고 나니 나도 좀 민망했다.
어쨌든 와인투어를 와서 와인 없는 저녁 식사를 한 끼 했다.
- 정 재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