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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영 Baek Nan Young (baeknanyoung@hanmail.net)
AIS(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 과정 1,2,3 레벨 이수 후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이탈리아 와인투어 전문기관 바르바롤스쿠올라(BARBAROL SCUOLA)를 운영하고 있다. 베를린 와인 트로피 심사위원이기도 한 백난영은, 이탈리아 와인 및 와인 관련 문화, 행사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와인 관련 전문 통/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Certified Professional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l President of Barbarolscuola, specialized in Italian Wine & Gastronomic Tour l Columnist of Korean Online Wine Magazine l Member of Judging Panel at: Berlin Wine Trophy, Asian Wine Trophy, Selezione Del Sincaco, Emozioni Dal Mondo, Portugieser Du Monde l Blogger l 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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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의 카스텔로 광장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120여 년 전에 모습을 드러낸 사보이 궁은 그 후에 계속된 증축으로 안뜰이 중앙을 차지하는&aposㅁ’자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궁의 동쪽에는 토리노를 지배하던 군주의 배우자들이 거주하는 ‘팔라쪼 마다마’ 궁이 광장 한쪽에 서 있다. 팔라쪼 마다마 뒤쪽으로는 포(Po) 강둑까지 뻗어 있는 포(Via Po) 거리가 나 있으며 비가 와도 젖을 염려 없이 산책할 수 있는 포르티치가 양쪽에 날개처럼 나 있다.
 
당시 ‘비아 포’ 거리에는 Caffè 라는 간판을 단 커피숍들이 유행처럼 생겨나고 있었다. 커피는 물론 이제 막 등장한 버무쓰를 마실 수 있던 ‘바bar’의 원조다. Caffè는 마시는 장소일뿐만 아니라 토리노의 지식인들이 모여 정치, 문화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살롱 문화의 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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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약초상을 하던 방년 22세의 Antonio Benedetto Carpano(이하 Carpano)가 연구와 실험 끝에 버무쓰(vermut) 제조에 성공을 거둔다. 이전에는 허약한 소화기능 회복과 고뿔 치료에 쓰던 민간요법이 Carpano에 의해 장인 손에서 특별한 비법으로 제조되는 가향 와인의 서막이 열렸다.
 
버무쓰는 모스카토 주스를 발효시킨 와인에 에틸알코올을 섞어 알코올 도수를 높인 후 여기에 10~30가지 내외의 허브, 나무뿌리와 껍질, 향신료, 씨앗을 우려내 맛을 냈다. 즉 알코올을 첨가한 것에서 강화 와인(Fortified wine)을, 맛을 우려냈다는 점에서는 가향 와인(Falvored wine)의 속성을 동시에 가진다.
 
모스카토 와인에 정향, 계피, 노간주, 생강, 감귤 껍질, 바닐라 등 무려 30개에 달하는 재료로 향을 우려낸 것은 Formula Carpano(Carpano 비법)로 따로 구분하는데, 이 비법은 단 3명의 장인에게만 전수되며 각자 알고 있는 비법대로 만든 버무쓰를 혼합해야만 Formula Carpano를 얻을 정도로 비밀에 부쳐진다.
 
버무쓰의 알코올 농도는 16~21도 사이이며 색깔과 잔당의 양에 따라 종류가 다르다. 색깔을 내기 위해 무색의 당을 넣으면 Bianco, 캐러멜을 첨가하면 Rosso 또는 Rosato 버무쓰가 된다. 잔당은 100ml 당 14g이 기준이며 그 이상이면 Bianco Dolce 와 Rosso Dolce, 그 이하이면 Rosato Secco, 그보다 훨씬 적으면(4g이하) Bianco Extra Dry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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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도심에서 탄생한 가향 와인의 인기는 북이탈리아 주요 도시로 퍼졌다. 그 와중에 기본이 되는 와인은 구하기 쉬운 무미, 무향의 것으로 대체되었다. 담금재료도 Carpano가 사용한 것 외에 색다른 식물의 잎이나 뿌리가 시도되었다. 밀라노에서는 오렌지 껍질을 우려내어 영롱한 주홍빛깔을 띠며 당을 넣지 않아 쓴맛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Bitter Campari가, 베르가모에서는 알코올을 빼고 갖가지 담금재료 본연의 맛이 스며든 무알콜 San Bitter가 제조되었다.
 
파비아(Pavia)에서는 Aperol 가향 와인에 프로세코와 소다수를 2:3:1 비율로 섞어 쌉쌀한 맛에 탄산가스가 톡톡 터지는 스프릿츠(spritz) 칵테일이 시도되었다. 자체 가향 와인이 없었던 남중부 이탈리아에서는 기존의 화이트 와인이나 스푸만테를 내세웠다. 시칠리아에서는 버무쓰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마르살라 강화 와인의 드라이한(secco) 맛이 가향 와인 붐에 편승했다. 딱히 내세울 만한 와인이 없는 곳은 맛이 쓰다는 이유로 맥주가 가향 와인을 대신하게 된다.
 
처음 혀에 닿는 단맛과 뒤에 남는 쌉쌀함이 침샘을 자극해 식욕을 돋우기 때문에 가향 와인은 아페리티보(식전주)로 자리잡았다. 오후 5시쯤 이탈리아 도심의 바 쇼윈도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푸짐한 음식들로 채워진다. 원래 전채요리, 파스타, 고기, 디저트 순으로 나와야 할 이탈리아 코스 요리가 한꺼번에 등장한 진기한 풍경이다.
 
오후 5시는 저녁 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음식을 보고 꿈틀거리기 시작한 위장이 보내는 신호가 신발코를 바 정문으로 이끄는 아페리체나(apericena) 타임이다. 식전주(aperitivo)와 저녁 식사(cena)가 결합한 신생어인 아페리체나는, 식전주 마시는 시간대(오후 5~6시 무렵)에 저녁 식사를 한다는 발상 전환의 바(bar) 문화다. 코스로 먹는 요리를 순서에 상관없이 입맛 당기는 대로 가져다 먹는데, 이 때 20~30여 개의 재료 맛이 녹아 든 아페리티보는 이들 음식과 좋은 조합을 이룬다. 산조베제 와인과 엇박자인 라비올리와 디저트도 버무쓰라면 거뜬히 소화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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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향 와인의 고향 토리노의 오후 5시 아페리체나 타임, 그 현장으로 가보자. Carpano가 버무쓰를 제조하기 전부터 있었던 Caffè Fiorio의 내부는 녹색, 적색 융단으로 도배된 벽과 19세기 샹들리에가 드리우는 조명이 고풍스럽다. 2세기가 넘는 이곳의 역사는 안티파스토, 파스타, 랑게 DOP 치즈, 살라메, 로스트비프의 뷔페 상차림에 온전히 드러난다. 전기 쇼크 강도에 비견될 만큼 맵다는 고춧가루가 뿌려진 토미노 치즈, 바네또 베르데(파슬리, 올리브오일, 식초를 섞어 만든 소스)에 절인 엔초비, 참치살로 채운 올리브를 버무쓰 온더락(vermut on the rock)의 쌉쌀 달콤한 맛과 시도해 본 이는 이곳의 아페리체나를 다시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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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최초의 샌드위치 ‘트라메찌니’가 탄생한 Caffè Mulassano에서는 바 자체의 노하우로 만든 버무쓰를 맛볼 수 있다. 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토리노 왕립극장은 밀라노 스칼라 극장보다 36년 앞서 지어졌고 자코모 푸치니의 마농레스코(1893년), 라 보엠(1896년),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Salome(1906년)가 초연된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도 예전처럼 공연을 끝낸 음악가들이 이곳에서 Mulassano 버무쓰 한 잔으로 긴장을 푸는 걸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테이블이라곤 5~6개밖에 없는 30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1세기도 넘은 대리석 인테리어는 유리 표면처럼 반질거린다. Mulassano 아페리체나의 멋은 바에서 직접 만든 수제 버무쓰와 스투찌끼니를 함께하는 것이다. 스투찌끼니는 이쑤시개로 찍어 먹는 음식을 뜻하는데, 폭신폭신한 빵 안의 속이 금방이라도 삐져나올 것처럼 토실토실한 트라메찌니를 한입 크기로 잘라놓은 것, 계절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올려진 카나페, 앙증맞은 미니 그릇에 담겨 있는 핑거푸드가 그것이며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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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여신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 쇼를 보면서 아페리체나를 즐길 수도 있는데, Norman은 토리노 중심가 서쪽 경계에 있으며 귀족처럼 아페리체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접시에 담겨 나오는 음식의 수에 따라 가격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둥그런 은쟁반에 담겨 나오는 푸짐한 양의 음식을 보는 순간 수라상 받은 임금님 마냥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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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에 세워진 고딕 종탑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아페리체나의 여유를 느긋하게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Caffè Al Bicerin는 초콜릿, 에스프레소, 거품 낸 크림이 층을 이룬 채 유리잔에 담겨 나오는 비체린을 맛보기 위해 푸치니, 니체, 움베르토 1세 왕 부부, 카브루 수상이 다녀갔던 명소이다(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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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 Bicerin에서는 딱히 배를 채울 요량보다는 바롤로 끼나토 가향 와인과 수제 잔두요또 초콜릿으로 미각의 포만감을 느끼는 게 제격이다. 키나, 대황, 카르다몸, 바닐라 맛을 우려낸 알코올을 바롤로 와인에 섞어 만든 바롤로 끼나토는 네비올로 포도가 주는 최상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가향 와인의 왕이다. 잔두요또 초콜릿이 지닌 헤이즐넛 여운의 달콤함은 바롤로 끼나토의 진한 맛과 멋진 결합을 이룬다.
 
Al Bicerin은 유명한 인사가 다녀갔지만 사진이나 서명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 주인의 겸손한 성품이 묻어나는 곳이다. 모서리가 닳은 목재 가구와 대리석 테이블이 1736년 설립 당시의 것이기에 마치 미니 박물관 같다. Al Bicerin라는 이름의 박물관에서 바롤로 끼나토 한 잔과 함께 시간여행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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