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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영 Baek Nan Young (baeknanyoung@hanmail.net)
AIS(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 과정 1,2,3 레벨 이수 후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이탈리아 와인투어 전문기관 바르바롤스쿠올라(BARBAROL SCUOLA)를 운영하고 있다. 베를린 와인 트로피 심사위원이기도 한 백난영은, 이탈리아 와인 및 와인 관련 문화, 행사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와인 관련 전문 통/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Certified Professional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l President of Barbarolscuola, specialized in Italian Wine & Gastronomic Tour l Columnist of Korean Online Wine Magazine l Member of Judging Panel at: Berlin Wine Trophy, Asian Wine Trophy, Selezione Del Sincaco, Emozioni Dal Mondo, Portugieser Du Monde l Blogger l 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신화와 전설을 마시다
 
 
캄파니아Campania와인
 
 
- 캄피 프레그레이Campi Flegrei
 
 
 
지난 글 [캄파니아Campania 와인]에 이어, 이 글에서는 캄파니아의 해안 지역 와인 산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이곳은 나폴리 부근을 말하며, 캄피 프레그레이(Campi Flegrei)와 베수비오(Vesuvio)를 합친 지역이다. 필자가 거주하는 곳에서는 시내의 대형 와인숍을 가야만 살 수 있을 정도로 이 지역 와인은 흔치 않다. 따라서 정보 수집을 위해 인터넷으로 캄피 프레그레이의 와이너리를 검색한 후, 전문 매체를 통한 평판과 와인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는 몇 군데 와이너리를 골라보았다.
 
필자가 선택한 곳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가족이 운영하는 와이너리들이다. 방문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는데 빠른 곳은 당일날 저녁에, 느린 곳은 이틀 뒤에 답변이 왔다. 방문 날짜와 시간은 내가 원하는대로, 시음비도 받지 않겠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사실 이렇게 신속하고 전문성이 엿보이는 응답은 규모가 제법 큰 와이너리에서나 기대할 법하며, 일이 끝나는 늦은 저녁에나 겨우 컴퓨터를 마주할 짬이 나는 중소 규모의 와이너리 오너에게서는 기대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들의 신속함과 친절함은 필자가 와이너리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캄피 프레그레이는 나폴리 만을 사이에 두고 베수비오 화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나폴리 북부의 교통지옥을 빠져 나오자마자 맞닥뜨리는 나폴리의 베드타운이다. 한편 이곳은 약 3만9천 년 전의 대규모 화산폭발이 만들어놓은 자연의 조화이며 폭발 위력이 엄청나 초화산(supervolcano)으로 분류된 위험지역이다. 또한 정상이 움푹 들어간 성산봉과 비슷한 형상으로, 함몰이 시작된 곳에서 반대쪽까지의 거리는 약 15km 이다. 이 반경에는 네 군데의 화구호와 크고 작은 분화구 24개가 흩어져있고, 그 중 몇 군데는 황산가스를 간간이 내뿜는다. 이처럼 언제 화산활동이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휴화산을 6개의 소도시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한편으론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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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킬로미터 내려간 지하에 마그마가 끓고 있지만 지상에는 주택가와 사무실이 버젓이 들어서 있고, 멀지않은 곳에 대학캠퍼스도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끓고있는 대지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캄피 프레그레이(Campi Flegrei)라고 부르며 DOC(원산지 명칭등급)로도 지정되어 있다.
 
언제 용암을 분출할지 모르는 이곳에서 태연히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불안감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리고 만다. 단, 건물 사이로 드러나는 농지와 포도밭의 검은 흙을 볼 때만 발 밑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을 용암을 문득 떠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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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피 프레그레이’란 지명은'대지’란 뜻의'캄피’ 와'불’을 뜻하는 그리스어 flego가 결합된 단어다. 지명 자체가 토양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으니,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이곳의 와이너리를 찾아가는데 포도나무가 끝없이 심어진 언덕을 굽이굽이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목가적인 광경을 기대한다면 꽤 실망할 것이다. 필자가 방문한 와이너리는 네비게이션에 의지해 차 한 대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골목을 빙글빙글 돈 다음 막다른 골목길에 버티고 서있던 철대문 너머에 있었다.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고 마른 체구의 젊은 청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빈첸조라는 이름의 그는 이곳에서 양조를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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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시빌라(La Sibilla) 와이너리는 빈첸조와 그의 부모, 조부모가 함께 운영하는 “대단히 이탈리아적인” 가족 기업이다. 캄피 프레그레이에서 가장 넓은 폿주올리(Pozzuoli) 마을에 약 10 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는데, 모두 콜리네 디 바이아(colline di baia)라 불리는 언덕에 몰려있다. 포도밭은 아파트나 공공건물 때문에 간간이 끊기다가 다시 이어지는데, 마치 자연과 인간이 서로 타협하고 양보한 결과물처럼 보였다.
 
포도밭 사이로 개인주택이 있기 때문에 건물 너머의 포도밭으로 가려면 남의 집 안뜰을 지나야만 하는데,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와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인지 양조시설은 포도수확량과 비례할 정도로 검소했다. 그리고 양조장 건물과 옆집 사이의 남는 공간에 지붕을 얹고 실온조절장치를 설치해 숙성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편, 협소하다는 느낌을 주는 이곳의 첫인상은, 제한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와 이웃을 고려하는 이들의 책임감 덕분에 쉽게 지워졌다. 지금도 매년 6만5천 병의 와인을 거뜬히 생산하고 있는 양조장을 무리해서 확장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숙성실 한 모퉁이에 만들어 놓은 테이스팅 룸은 비교적 규모가 크고 현대적이며 큰 주방도 갖추고 있었는데, 와이너리를 찾는 방문객이 늘어남을 감안하여 증축한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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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의 가장자리에는 주홍색 클레멘티네(귤과 오렌지를 교배한 감귤류) 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언덕 능선을 따라 만든 돌계단의 양측에 위치한 포도밭에는, 마침 빈첸조의 조부가 가지치기를 막 끝낸 가지와 이것을 지탱하는 철사줄을 버드나무 가지로 능숙하게 묶고 있었다. 이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필자에게 빈첸조는 “그냥 플라스틱 끈으로 묶으면 되는데도, 할아버지는 뻑뻑해서 구부리기조차 힘든 버드나무 가지를 고집해요. 나이드신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친구분들이 아직도 밭일을 도맡아 하시는데, 옛날 방식으로 포도밭 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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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정성스럽게 묶고 있는 포도나무들은 100년 전 필록세라(포도나무뿌리진디)가 이곳을 휩쓸기 전부터 심어져 있던 것으로, 대목 뿌리가 아닌 품종 본래의 뿌리를 보존하고 있었다. 검은 화산토양이 해충제 구실을 단단히 해준 덕분이라고 설명하는 젊은 양조가의 눈에 살며시 경외감이 이는 것 같았다. 백년의 연륜을 과시하듯 밑동이 심하게 꼬인 포도나무 사이로 컬리플라워, 파, 상치류, 토마토가 심어져 있었는데, 가족들이 먹을 겨울 야채와 와이너리를 방문한 손님들에게 제공할 안주거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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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시빌라(La Sibilla) 와이너리의 주력 와인은 피에디 로쏘(piedi rosso)와 파랑기나(falanghina)다. 잠시 젊은 양조가가 자세히 알려준 캄피 프레그레이 품종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위 두 품종은 평균 해발 460m에 위치한 6개의 마을(Bacoli, Monte di Procida, Pozzuoli, Procida, Quarto, Marano di Napoli)에서 재배되며 드라이 화이트, 드라이 레드, 로제, 스푸만테, 스위트 파시토, 드라이 파시토 타입의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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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디 로쏘(piedi rosso)는 “붉은 발(足)”이란 뜻인데, 포도송이가 달린 자루의 모양이 적색빛이 도는 새의 발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스인이 캄파니아 주에 이 품종을 들여왔고, 로마의 대학자 플리니우스(Gaiuns Plinius Secundus, AD 23~79)가 쓴 책에도 기록됐을 만큼 역사가 긴 품종이다. 캄파니아 주 전역에서 재배되는데, 캄파니(캄파니아 주민)들의 식탁에 결코 빠지지 않는 감초와 같은 와인이다. 특히 화산 토양에서 재배된 피에디 로쏘 와인을 으뜸으로 친다.
 
화산 지형이 몰려 있는 해안 쪽에서는 한 가지 품종으로만 와인을 만들지만, 내륙으로 가면 알리아니코(aglianico) 품종을 섞어서 와인을 만든다. 잔에 담긴 피에디 로쏘는 잉크처럼 짙은 붉은 색을 띠며, 잔에 따르는 순간 달콤한 체리, 제비꽃, 향신료, 돌내음이 화산처럼 분출한다. 또한 과하지 않은 타닌과 짠맛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다. 피에디 로쏘는 이탈리아 남부의 뜨거운 와인으로, 보통 병입 후 1~2년 내에 마시며 부담 없고 경쾌한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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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기나는 캄파니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청포도로, 피에디 로쏘처럼 그리스인에 의해 전파되었고 화산 지형에 잘 맞는 품종이다. 어근인 falaga는 라틴어이며 후에 파랑기나(falangina)로 변하는데, 포도가지가 뻗어자라는'말뚝’을 뜻한다. 탄생지에서 파랑기나를 재배하던 방식이 품종의 이름이 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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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파니아 주에는 파랑기나 품종으로 만든 DOC 와인이 무려12가지나 있어 이 품종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화산, 석회암, 암석 지형 등 자라는 곳에 따라 풍미가 다르며, 산도가 높기로는 산니오(Sannio, 캄파니아 북동쪽)에서 나는 파랑기나가 유명하다. 또한 이탈리아 북부의 화이트 와인에서는 보기 힘든 황금색에 가까운 노란색을 띤다. 캄피 프레그레이에서는 파랑기나를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잠시 숙성시킨 후 병입하기 때문에 파인애플, 복숭아, 골든 애플, 아몬드, 돌 냄새 등 품종 자체의 향을 한껏 맡을 수 있다. 와인의 높은 산미와 짠맛 덕분에, 이곳의 인기 음식인 모짜렐라 인 카로짜(모짜렐라 치즈에 튀김옷을 입혀 튀긴 요리)와 같이 마시면 잘 어울린다.
 
어쩌다 와이너리 이름이'여사제(La Sibilla)’가 되었는지 빈첸조에게 물었더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포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인들이 세운 쿠마(Cuma)라 불리는 도시가 있는데, 이곳은 아폴로 신전과 쿠마라 불리던 여사제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동굴로 유명하다. 이야기에 따르면, 쿠마는 아폴로 신의 구애를 받고도 모른 척했는데, 끝없는 구애에 감동 받은 나머지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사랑을 받아준다고 했단다. 그녀의 소원은 “내 손에 쥔 모래알 수만큼 오래 사는 것”이었고 아폴로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젊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까닭에, 여사제의 육체는 갈수록 노화되고 줄어들었으며 결국 벌레만큼 작아져 보이지도 않게 된다. 애인인 아폴로는 그녀를 밟지 않도록 조그만 항아리에 넣어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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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몸은 벌레만큼 작아졌지만 목소리만은 여전해서, 여사제는 동굴에 살면서 일생 동안 예언을 했다. 그녀가 예언한 내용은 야자수 잎에 기록되었고, 동굴 벽에 난 수많은 구멍을 통해 바람에 실려 인간세상으로 보내졌다. 그녀의 예언을 모아 신탁집(Sibylline Books)이 엮어졌고 고대 로마인들은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여기서 구원책을 찾았다고 한다.
 
결론은, 쿠마의 여사제가 좋은 신탁을 내려주길 염원하는 마음에서 와이너리 이름을'여사제’로 지었고, 와이너리의 상징 역시 여사제가 살던 동굴에 착안하여 디자인한 것이다. 반갑지 않은 일상사로 심신이 고단할 때, 여사제의 전설이 담긴 피에디 로쏘나 파랑기나 와인을 마시면서 기분 좋은 예언을 지어내 보면 어떨까. 잠시나마 시름을 잊는데 큰 도움이 되어 줄 것 같다.
 
 
※ 다음 글은 <캄파니아 와인 - 아베르사 와인>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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