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몬테의 맛과 향을 찾아서 [1]
글, 사진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필자는 운이 좋게도 이탈리아 와인 애호가라면 꼭 가보고 싶어하는 피에몬테에 거주하고 있다. 마음에 끌리는 와인이나 음식 축제가 있다면 1시간 정도 차로 달려, 남쪽으로는 랑게와 몽페라토에, 북쪽으로는 가티나라와 겜메 와인 산지 문턱에 도착할 수 있으니 거의 행운에 가까운 복을 누린다 할 수 있겠다.
피에몬테의 여러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자를 대고 그은 듯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일렬로 늘어선 포도나무들을 보며 필자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 한편, 와인 자체보다 더 유명한 포도밭들과 그 정상에 우뚝 솟아있는 고성들의 자태를 올려다 보노라면, 옛날에 이곳의 주인들이 누렸을 물질적 풍요로움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금이야 포도밭 일색이지만 예전에는 “1농가 다작물 농사” 관행에 따라 곡식과 포도 모두 풍족했다. 이는 군사력이 천차만별이었던 군주들의 정복 욕구를 자극했고, 이 때문에 손바닥만한 땅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 예로 10세기경 (지금은 바르베라 다스티와 모스카토 다스티 와인으로 알려진) 2,500 km² 남짓한 몽페라토 지역을 여섯 명의 다른 군주가 나누어서 지배했다고 하니, 이탈리아판 춘추전국시대가 따로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 주민들이 자기 마을에서 수시로 바뀌는 외세에는 처연했던 반면 이웃 마을의 군주와 세력 변화에는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웃 마을이 자기 마을보다 형편이 나아질 경우 발생하게 될 힘의 불균형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보다 우월해짐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마을 사이에는 경쟁이 불붙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을 사이의 이러한 경쟁심을 '캄파니리스모campanilismo’라고 하는데, “내 마을 것이 최고”라는 우월감은 여러 마을을 단결시키는 데에는 효과가 없었지만, 대신 특색 있고 다양한 지방문화를 낳는 장점으로는 작용했다. 요리를 예로 들면, 비슷한 재료로 만든 음식인데도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마을에서는 또 다른 맛과 이름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한때 침략자들의 말발굽 소리가 끊이지 않던 이곳의 들녘은, 지금은 호기심 가득한 미식가들을 가득 실은 관광버스 행렬로 먼지가 뽀얗게 인다. 이 지역 와인이 유명해지면서 지역 음식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강력한 자기장처럼 미식가들을 끌어들이는 피에몬테의 전통 음식, 그리고 그 음식들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피에몬테의 와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피에몬테는1559년에 (지금의 프랑스령 사부아(사보이)에서 이탈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사보이 공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여러모로 프랑스 문물의 영향을 받게 된다. 또한 사보이 귀족들의 식사를 맡았던 프랑스 요리사들이 군주들과 함께 새 영토로 이전하면서 자연스럽게 프랑스 요리 기법과 용어도 함께 전달되었는데, 이는 토착 귀족들과 1800년 대 등장한 신흥 부자들의 식탁과 음식문화를 풍부하고 세련되게 만든 계기가 된다.
반면, 평민과 농민들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산물로 만든, 조리 시간이 짧고 만들기 쉬우며 기름진 요리를 주식으로 삼았다. 주요 식재료는 쌀(리조), 우유, 마늘, 화이트 트러플(흰 송로버섯), 아스파라거스, 옥수수였다. 이탈리아 요리의 대명사로 알려진 올리브오일이나 파스타가 식단에 오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과거에는 버터와 쌀을 더 많이 사용했다.
전채요리는 차갑게 먹는 것과 따뜻하게 먹는 것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알베제(익히지 않은 송아지고기를 다져서 그 위에 얇게 썬 그라노 치즈조각을 올린 것), 인살라타 루싸 샐러드(큐브 모양으로 썰어 익힌 야채와 소의 혀를 마요네즈에 버무린 샐러드), 인살라타 리조 샐러드(익힌 쌀, 제철 채소를 올리브오일, 레몬 드레싱에 무친 샐러드), 비텔로 토나토(오븐에 익힌 송아지고기를 얇게 썰어 그 위에 참치, 엔초비, 마요네즈를 섞은 소스를 얹은 요리), 페페로니 알 아치우가(숯불에 구운 피망에 엔초비, 올리브 오일, 마늘 소스를 올린 요리)가 있다.
따뜻하게 먹는 전채요리는 치폴라 리피에나(양파 속을 긁어낸 후, 다진 고기와 긁어낸 양파로 양파 속을 채워 오븐에 구운 것), 플랑(제철 야채와 베샤멜 소스를 섞어 익힌 야채케익에 퐁두 치즈를 얹은 것)이 있다.
한편, 야채가 주재료인 전채요리에는 끝없이 솟는 기포가 식욕을 북돋는 '알타랑가 브뤼 스푸만테’ 혹은 '가비 스푸만테’가 잘 어울린다. 고기, 엔초비, 치즈가 들어간 전채요리라면 산미가 높은 '랑게 파보리타’ 화이트 와인이나 '네비올로 로제’ 또는 '바르베라 키아렛토 로제’ 와인이 좋겠다. 느끼하게 남은 음식의 뒷맛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 때문이다.
피에몬테에서 롬바르디아 주(주도는 밀라노)를 지나다 보면, 알프스의 산록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에 이른다. 파다노라 불리는 유럽최대의 쌀 곡창지대인데, 사방에 물을 댄 논만 보이니 마치 바다 한 가운데 서있는 착각이 들 정도다. 덕분에 피에몬테를 포함한 북이탈리아는 최대의 쌀 소비지역이며, 각 지역마다 개성 있는 리조토 요리를 탄생시켰다.
피에몬테의 리조토 요리로는 아스파라거스를 듬뿍 넣어 만든 '아스파라지 리조토’, 이곳에서 나는 각종 치즈로 맛을 낸 '포르마지 리조토’, 바롤로 와인을 넣은 '바롤로 리조토’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토착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만들고 상큼한 과실 향과 하얀 꽃 향기가 어우러진 '코르테제 몽페라토’나 '에르바루체 디 칼루소’ 또는 '랑게 소비뇽’ 와인을 리조토에 곁들여 마신다.
피에몬테의 대표적인 파스타는 타야린이다. 타야린은 밀가루 1kg당 30개의 계란노른자를 섞어 만드는데, 계란노른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더 고급이다. 녹인 버터와 사루비아 잎으로 향기를 낸 소스에 버무린 '랑게 타야린’, 와인과 고기 육수를 졸인 아로스토 소스에 버무린 '아뇰로티 델 플린’(일정 비율의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오븐에 구운 후 갈아준다. 여기에 시금치, 파마산 치즈, 계란노른자를 섞어 얇은 밀가루 반죽에 채운 후 모양 칼로 자른 피에몬테식 라비올리), 그리고 다진 고기, 빵가루, 계란, 파미자노 치즈가루 섞은 것을 크레이프(Crepe)로 말아서 베샤멜 소스를 끼얹고 그라탕한 '바루바루 카넬로니’가 있다.
위의 파스타 요리들은 기름진 음식이라, 약발포성 '프레이자’, '그리뇰리노’처럼 산도가 높고 과실 향이 풍부한 어린 레드와인, '로에로 아르네이스’(랑게 근방 로에로 지역에서 재배하는 아르네이스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 또는 '랑게 샤르도네’ 와인 등이 잘 어울린다.
글쓴이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이탈리아 와인 유학 및 여행 전문 기관바르바롤스쿠올라근무.
( baeknanyou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