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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은 바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1년에 365일,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지니, 시간만큼 뒤끝 없고 쿨한 단어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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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도멘 드 슈발리에(Domaine de Chevalier)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에는 마침 휴일이라 문이 닫혀 있는 바람에, 건물 뒤편 화장실에서 볼 일만 보고 나와야 했다. 이번에는 다른 샤또를 방문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던 중 우연히 이곳을 들르게 된 것인데, 커다란 버스 한대가 도멘으로 진입하는 것을 보고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그들을 뒤좇아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저 정도로 크기라면 분명 와이너리 투어 버스일텐데, 차려놓은 밥상에 나도 숟가락 하나 얹어야겠다.’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면서 버스를 뒤쫓기 위해 도멘 드 슈발리에의 포도밭 쪽으로 차를 몰았고(지난 번 경험으로 인해 익숙해 있던 터라 지름길을 택한 것이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기 위해 차를 세우는 여유까지 부리며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약간 일찍 도착한 필자는 버스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고 있다가, 저 멀리에서 이곳의 직원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는 지금 목이 말라서 무조건 와인을 마셔야 됩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따라만 다닐 테니, 버스로 오신 분들과 같이 와이너리를 둘러보게 해주세요.”

별 어려움 없이 그의 허락을 얻어낸 필자는, 이렇듯 절묘한 타이밍과 손쉽게 얻어낸 기회 덕분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단 1분만 빨리 도멘 드 슈발리에 앞을 지나갔어도 이런 기회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이 번뜩 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직원은 버스에서 내린 이들에게 내 소개까지 해주었고, 그들 역시 와이너리를 함께 둘러봐도 좋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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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영국의 농업협동조합 조합원들이며 견학 차 프랑스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보통 논밭이라고 하면 그 크기가 상암월드컵 경기장의 12배가 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 재배 면적은 아주 작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편, 머리 위에서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과 직원 사이에는 포도밭의 병충해와 관련한 대화가 길게 이어졌는데, 뜨거워 죽겠다는 생각을 한 건 필자 혼자뿐인 듯했다. 그들은 햇볕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긴, 햇볕에 벌겋게 달아오른 이들의 살갗은 하루 이틀 지나면 삶은 계란 껍질 벗겨놓은 마냥 다시 하얘질 것이다. 어찌됐든, 이들의 대화가 끝날 무렵 필자의 피부는 well-done 이상으로 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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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을 둘러본 후 우리는 와이너리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직원은 최근에 갖춘 숙성발효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필자는 이 틈을 타 좀더 조용한 곳을 찾아 다니며 신나게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다가 직원과 영국인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 장소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문도 잠겨있었다. 그 상태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듯이 감금되었던 건 아니지만, 필자가 갇혀있던 곳은 평소에는 문을 잠글 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기껏해야 1-2분 정도였지만 당시에는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여기서 나가게만 해주시면, 평생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맛있는 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항상 자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다짐을 하려는 순간, 필자에게 자기들은 영국의 농업협동조합에서 왔다며 귀띔해줬던 마가렛 대처를 닮은 중년 여성이 직원과 함께 눈앞에 나타났다. 부끄러운 마음에 반가움도 잠시. 밖으로 나가자 영국인들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웠는데, 절대 무례하거나 비아냥거리는 표정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뜻밖의 상황에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무색함을 감추기 위해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
“나를 가두려면 앞으로는 와인이 있는 곳에 가둬 주세요! 저 안에는 와인이 하나도 없었단 말입니다!”

이 말에 영국인들은 박장대소 했고, 몇몇은 농담까지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저런! 우리가 한 잔 가져다 주려고 했는데 거기서 좀더 기다리지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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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선사하며 뜻밖의 유명세를 타게 된 필자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북한은 도대체 왜 그 모양인지 등등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윽고 이들과 함께 와인과 와인 잔이 즐비하게 늘어선 테이스팅 룸으로 들어서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필자는 다시 한마디를 외쳤다.
“바로 여깁니다, 여러분. 여기에 저를 가두세요!”

이 말에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가 하면, 심지어 자기도 같이 가둬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필자는 도멘 드 슈발리에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뜻밖의 즐거운 한때를 보냈고, 그들이 떠난 테이스팅 룸에서 남아 와인을 좀더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세워둔 차를 향해 다가가는 동안 이런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와인은 이야기가 더해지면 더 맛있어진다! 설사 맛없는 와인이라도, 그 와인 덕분에 기억할 만한 추억이 생긴다면 그 자체로 이미 즐거운 것이다!’


글쓴이 _ 보르도대감 (본명 _ 정민영)

보르도 대감(필명) 정민영은,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건너가 와인 양조학을 공부했다.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캐나다 한국일보에 와인 칼럼을 연재했고 이니스킬린 와이너리에서 근무했으며 <온타리오주 와인협회> 멤버 자격도 획득했다. 이후 캐나다에서 중국으로 거처를 옮겨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그는 와인의 땅 프랑스 보르도로 떠나기로 결심했고, 현재 현지에서 보르도 투어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면서 보르도 산업의 생생한 현장을 한국의 와인애호가들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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