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사랑했던 샴페인, 2004년 Royal Warrant(영국의 왕실인증서, 영국 왕실이 선정한 제품 또는 생산자에게 왕실의 문장을 붙일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은 샴페인, 그리고 2011년 윌리엄 왕자의 웨딩 샴페인으로 지정되어 다시 한번 전세계에 명성을 떨친 샴페인이 있으니, 바로 폴 로저(Pol Roger)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에는 수입사 금양인터내셔날을 통해 20여 년 가까이 독점 수입되어 왔다.

폴 로저는 연간 샴페인생산량이 160만 병 정도에 달하는 중간 규모의 샴페인 하우스로, 샹파뉴 지역에서 가장 큰 샴페인 하우스인 모에&샹동(Moet & Chandon,)의 연간 생산량인 2,400만 병에 비하면 그 규모가 1/10도 채 되지 않는다(BERRY BROS&RUDD). 또한 직접 소유하고 있는 포도밭의 면적은 약 90헥타르로, 연간 필요한 포도의 절반을 자가 공급할 수 있는 면적이다. 그렇다면 포도의 절반 가까이는 다른 포도재배자들로부터 구입한다는 의미인데, 위베르 드 빌리(Hubert de BILLY, 폴 로저 가문의 5대째 직계 후손)는 “이들 포도재배자들과의 관계는 대를 이어 지속되어 왔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만큼 서로 신뢰가 쌓여 있고, 이들이 공급하는 포도의 품질이 실망스러웠던 적은 한번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폴 로저 스타일

폴 로저는 가족 경영 체제로 운영되어 온 몇 안 되는 독립된 샴페인 하우스 중 하나다. 2012년 가장 많이 팔린 TOP 10 샴페인 브랜드’의 과반수가 거대 기업에 속해 있는 실정을 감안하면, 가족기업으로서의 폴 로저의 위상을 다시 한번 새겨봄직 하다. 한편, 가족 운영 체제 아래 가족 구성원 모두가 폴 로저 샴페인 사업에 관여하고 있지만, 최고경영자만은 외부에서 영입한다. 이는 아마도 1998년부터 15년간 최고경영자를 지낸 패트리스 노이엘(Patrice Noyelle)이 폴 로저에 불어넣은 에너지와 변화의 힘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노이엘을 영입한 이후 샴페인의 품질은 한층 높아졌는데, 가장 먼저 흘러나온 포도즙(퀴베, cuvee)만으로 샴페인을 양조하기 시작했고, 도사주의 양을 10g/l 이하로 낮추었으며, 1천만 유로를 들여 양조 시설을 증축하는 등의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이와 함께, 폴 로저는 영국 왕실인증서를 획득하고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 때 샴페인을 공급하는 등 그 명성 또한 더욱 높아졌다. 노이엘은 오는 6월 은퇴를 앞두고 있으며, 2008년에 이미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폴 로저의 수출 담당 이사로 일해 온 로랑 다쿠르(Laurent dHarcourt)가 그의 뒤를 잇게 된다.

오늘날 폴 로저 샴페인이 보여주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은, 위에 언급한 노이엘의 품질 혁신 외에도 또 다른 요소가 기여한 바가 크다. 그것은 바로 폴 로저가 고수해 온 오랜 양조 전통인데, 일례로 와인을 반드시 유산 발효시킴으로써 더욱 부드러운 산도를 지니도록 한다던가, 발효 후 생긴 찌꺼기를 병목으로 모아주는 르뮈아주(또는 리들링, riddling)를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르뮈아주 작업을 위해 고용된 4명의 인부들이 하루 8시간 동안 작업하는 와인의 양은 약 5만 병이다!).

폴 로저가 고수해 온 전통 중, 샴페인이 출시되기 전에 거치는 긴 숙성 기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폴 로저 NV 브뤼 리저브 샴페인의 숙성 기간은 4년이며(숙성 기간이 2년인 모에&샹동 NV 샴페인과 비교했을 때 두 배나 길다), 빈티지 샴페인의 숙성 기간은 무려 10년이다(모에&샹동 빈티지 샴페인은 7년). 이렇듯 긴 숙성 기간 덕분에 폴 로저 NV 브뤼 리저브 샴페인은 짙고 강렬한 풍미와 함께 관능적이고 부드러운 질감을 지니며, 올해 초에 출시된 2002년 빈티지 샴페인의 경우 과일, 꽃, 비스킷, 견과류 등 다양한 향들의 향연이 생동감 있게 펼쳐지며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구조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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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들의 샴페인, 폴 로저

최근 폴 로저의 위베르 드 빌리(Hubert de BILLY, 폴 로저 가문의 5대째 직계 후손)가 한국을 찾았다. 드 빌리는 현재 폴 로저의 마케팅과 홍보를 책임지고 있으며, 영국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몇 개 시장을 관리하고 있다. 기자가 만난 그는, 후덕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체격에 입가에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아 온화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폴 로저의 사업을 잇는 것은 숙명이었나"라는 기자의 첫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샴페인 비즈니스 외에 다른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이나 다양한 경험들은 모두 폴 로저를 위한 것이었다. 사실 과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샴페인 양조가가 되어볼까 했지만, 부친은 내게 비즈니스를 공부할 것을 권했다. 양조가는 언제든 대체가 가능하지만, 가문의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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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대를 이어 지속되는 가족 사업이 지닌 장점은 무엇일까. 드 빌리는, 가족 사업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점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일례로, 오랜 세월에 걸쳐 포도를 공급해 온 포도재배자들과 폴 로저의 관계는 전혀 수직적이지 않으며, 필요한 경우 그들에게 조언을 하는 수준에 그친다. 언급했다시피, 그들이 공급해 온 포도의 품질은 실망스러웠던 적이 없으며, 그 누구보다도 품질 관리에 힘쓰는 것이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력 관리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여온 덕분에, 폴 로저의 이직률은 다른 샴페인 하우스에 비해 현저히 낮다. 오죽하면 "폴 로저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발을 빼지 않는다"고들 할까.

폴 로저의 이러한 수평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운영 철학은, 다른 경쟁자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막대한 생산량으로 샴페인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대형 샴페인 하우스들과의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드 빌리는 오히려 대형 샴페인 하우스들이 샴페인 산업 발전에 기여해 온 공로를 추켜세운다.

"대형 샴페인 하우스의 경우 연간 판매량은 3천만 병에 가까운 반면, 폴 로저의 경우 160만 병 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형 샴페인 하우스의 샴페인은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지만 폴 로저의 샴페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는 대형 샴페인 하우스의 샴페인 덕분에, 전세계 소비자들은 원하는 때에 언제든 샴페인을 마실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유명 경기를 후원하거나(F1처럼) 유명 인사를 내세워(스칼렛 요한슨 같은) 샴페인을 전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훌륭히 해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샴페인의 존재 자체를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형 샴페인 하우스를 경쟁자로만 바라보지 않고, 샴페인 산업 전체를 위해 규모의 이점을 잘 활용하고 있는 동반자로 간주한다."
샴페인 산업이라는 큰 틀에서, 모든 샴페인 하우스는 경쟁자라기 보다 동반자라는 식의 그의 설명은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다른 국가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과의 경쟁마저도 이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가격 대비 품질의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스파클링 와인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샴페인 '니콜라 푸이야트'의 판매 담당 이사는 최근 디캔터와의 인터뷰에서, 샴페인 생산자들이 샴페인을 보호하는데 더욱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스파클링 와인은 샴페인의 경쟁자인가? 드 빌리의 대답은 이번에도 "그렇지 않다"이다.

"샴페인은 생산량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수요가 높아질수록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크다. 샴페인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그에 따라 샴페인 가격이 인상될 경우), 스파클링 와인은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스파클링 와인은 샴페인의 경쟁상품이 아니라 시장을 함께 키울 수 있는 동반자다. 한편 새로운 시장에서 스파클링 와인 점유율이 높아지면, 점차 샴페인에 대한 수요도 늘게 되어 있다. 와인을 접하면서 점차 까다롭고 고급스런 입맛을 가지게 되면,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던 사람은 자연스럽게 샴페인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드 빌리는 샴페인의 위상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요소가 외부와의 경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샴페인 산업 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샴페인 생산자들은 지금까지 샴페인을 전세계에 알리고 샴페인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왔다.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중대한 임무이므로,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샴페인의 품질을 최고로 유지하는 것이다. 만약 샴페인이 가격만 비싸고 품질은 스파클링 와인과 비슷하다면, 어느 누가 샴페인을 마시려 하겠는가. 따라서 철저한 품질 관리를 통해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 유지해 나가는 것이 샴페인 생산자들의 큰 숙제가 될 것이다."

이렇듯 관계 중심적인 폴 로저의 경영 방식과, 시장 성장의 관점에서 누구나 동반자라는 경영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페어플레이(fair play)'다. 그리고 이러한 페어플레이의 정신이 담겨 있는 샴페인인 까닭에, 폴 로저가 '신사들의 샴페인(Gentlemen's Champagne)’이라 불리는지도 모르겠다(Jean-Paul Kauffman의 'Voyage en Champagne"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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