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데일리 와인으로서의 가능성 보여준
터키 와인 22종 시음회
이불 밖으로 발가락만 살짝 내놓은 채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어느 일요일 오전, 낯익은 이름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직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터키 와인 22종을 시음하는데 참석하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짐작하겠지만, 터키 와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국내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고, 터키에서 와인을 생산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는가 싶어 당연히 참석하겠노라 했고, 무지를 조금이나마 보충하기 위해 남은 시간 동안 와인 서적들을 뒤적거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소아시아’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자 흑해, 마르마라해, 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인 반도를 말한다.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Anatolia, 그리스어'아나톨레(anatole)’에서 유래했으며'태양이 떠오르는 곳’ 또는'동방의 땅’을 의미)라고도 불리는데, 터키 영토의 97%를 차지한다. 아나톨리아는 8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이 확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주요 와인생산지였다.
아나톨리아에서 발견된 포도재배와 와인양조의 흔적은 무려 7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례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문명에서 와인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귀족과 지배 세력이 참석했던 의례에서 신에게 바쳐지는 헌주로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포도재배를 보호하는 법규와 매년 빈티지를 축하하던 관습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어, 와인이 고대 경제와 문화적 관습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말해준다.
히타이트 문명 이후 들어선 또 다른 고대국가 프리지아에서도 와인은 일상생활에서 빠질 수 없었으며, 올리브 오일, 생선, 빵과 더불어 식단에서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프리지아인들은 아나톨리아의 서쪽에 있던 그리스 식민지 주민들에게 와인을 소개하였으며, 기원전 6세기 즈음에 이미, 멀리는 현재의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위치한 지역으로까지 와인을 수출하였다. 당시 주로 재배되었던 품종은 오늘날 유럽에서 머스캣(Muscat)으로 알려진 미스켓(Misket)이며, 오늘날 이즈미르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는 또다른 주요 포도 품종은 호머의 서사시에도 등장했던 프람니오스(Pramnios) 와인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이즈미르에서 생산되는 프람니오스 와인은 드라이한 풀보디 와인으로, 타닌과 알코올 함량이 높다."
–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중
아나톨리아에서 와인소비는 중앙 아시아로부터 투르크족이 진출해 온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지배하던 시절 와인생산과 교역은 주로 이슬람교도가 아닌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맡았다. 한때 금주법이 발효되어 알코올의 사용과 판매가 금지되기도 하였으나, 와인 판매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철폐되었다. 필록세라로 인해 유럽 와인생산이 급감하던 당시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유럽으로 수출되는 와인의 양이 3억4천만 리터에 달했다.
오늘날 터키의 포도밭 면적은 꽤 넓은 편이지만 양조용 포도재배지는 극히 일부를 차지한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와인산업은 내수시장 부족으로 침체됐다가 관광산업이 부흥하고 수입금지법이 폐지되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또한 1920년대부터 터키 정부는 국민들에게 와인의 장점을 홍보하기 시작하였고, 유서 깊은 아나톨리아 토착 품종들을 보존하려는 취지로 국영 와이너리를 설립하였다(마르마라에 위치한 돌루자Doluca와 앙카라에 위치한 카박클리데레Kavaklidere가 그것이다. ).
터키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르다. 이스탄불의 연안내륙에 위치한 주요 와인산지 마르마라Marmara는 포도재배에 적합한 토양과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띠며, 터키 전체 와인생산량의 40% 이상이 여기서 생산된다. 에게 해의 이즈미르Izmir는 고대 유물과 유적이 풍부한 곳으로, 터키 전체 와인생산량의 20% 정도를 생산하며 화이트 품종으로 더 유명하다.
이날 대치동의 와인바 베레종에서 열린 터키 와인 시음회는, 22종의 와인을 시음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바탕으로,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고 가격대가 합리적인 와인을 선택하고자 하는 취지로 수입사 RED PANTS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몇 가지 와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와인은 레드 와인이었는데, 이 와인들 중 국제 품종을 사용하여 만든 것과 아나톨리아 토착 품종으로 만든 것이 각각 절반을 차지하였다. 참고로, 기자가 선호한 레드 와인 11종 중에는 국제 품종을 사용한 와인이 6종, 토착 품종을 사용한 와인이 5종 포함되었다. 특히 가격 대비 밸류가 뛰어나다고 보고 높은 점수를 준 일곱 개 와인 중 토착 품종으로 만든 것은 아래의 네 가지다(놀랍게도 시음 와인 대부분의 소비자가격이 1-2만원 대다!).
2008 Diren Bogazkere
품종: 보가즈케레, 칼레지크 카라시 외 카베르네 소비뇽 약간
지역: 토카트
2009 Tomurcukbag Trajan Reserv-Kalecik Karasi
품종: 칼레지크 카라시
지역: 앙카라
2010 Vinkara Doruk Okuzgozu
품종: 오퀴즈괴쥬
지역: 앙카라
2003 Kalecik Okuzgozu
품종: 오퀴즈괴쥬
지역: 앙카라
위 와인들은 공통적으로 발효와 숙성 시 오크 사용을 배제하였으며, 붉은 베리류의 과실 풍미가 지배적이지만 약간의 민트 또는 장미 향을 맡을 수 있다. 또한 무겁지 않은 미디엄 바디로, 타닌이 부드러워 목 넘김이 수월하다. 이 와인들은 대체로 단순하지만, 균형이 잡혀 있으며 지금 마시기에 적절하다. 단, 풍미의 농축도가 낮고 복잡성이 부재하다는 점은 이 와인들이 데일리 와인으로 적합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