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와인을 만나다
Espiritu Santo 에스피리투 산토

악마와 바이올린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유명한 바이올린 소나타 《악마의 트릴》을 남긴 주세페 타르티니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어느 날 밤 악마가 등장하는 꿈을 꾸었는데, 악마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바이올린을 들고 꿈에서 들은 그 음악을 악보에 옮겨 보았으나, 악마가 연주한 감동적인 음악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타르티니가 옮겨 적은 악마의 연주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남아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연주하는 타르티니의 왼손 손가락이 여섯 개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음악평론가 박제성의 글 중 발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음악과 와인의 매칭에 관심이 있다면, 《악마의 트릴》과 딱 어울리는 와인이 있다. 바로 프랑스 남부의 랑그독 루시용 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 에스피리투 산토 Espirito Santo가 그것이다. 여기서 Santo는 Saint를 의미하며, 이 와인의 독특한 레이블의 탄생에는 유럽의 역사적 배경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절반을 앗아간 흑사병의 공포로 유럽 곳곳에서 여러 가지 주술 문화들이 발생했는데, 특히 프랑스 남부에서는 흑사병의 저주와 액운을 막는다는 뜻에서 붉은 와인 병에 악마를 그려 넣고 사람들과 주고 받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예로부터 적포도주는 천사들이 악마를 제압하여 술병 속에 봉인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병마를 퍼뜨리는 악마가 두려워하기를 빌며 와인병에 악마의 그림을 붙이고 이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흑사병의 공포를 물리치고 평안을 기원하였던 이 풍습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에스피리투 산토(왼쪽 첫번째 사진)는 그르나슈 품종 본연의 풍미가 도드라지는 와인으로, 열자마자 바로 마시지 않고 풍미가 발산될 때까지 조금 기다리면 깊고 풍부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블랙 베리와 붉은 과일의 향, 신선한 가죽 향, 소나무 향 등이 피어 오른다. 강렬하며 밀도 있는 미세한 분말로 코팅된 듯한 타닌과, 박하 느낌의 솔 향이 길게 지속된다. 20년 이상 보관할 수 있는 장기 숙성용 와인이다. 소비자가격 20만원 대.
에스피리투 산토를 생산하는 샤토 드 칼비에르는, 프랑스 남부의 랑그독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카마르그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총 7헥타르에 달하는 포도밭에는 평균 수령이 50년 이상인 시라와 그르나슈 포도나무가 재배되고 있다. 편암으로 이루어진 토양은 낮 동안의 열기를 머금어 저녁까지 포도에 온기를 전달함으로써 구조감 있는 타닌과 우아한 풍미를 지닌 와인을 생산하는데 기여한다. 반면 석회암과 점토로 이루어진 토양에서 자란 포도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아로마를 지닌 와인을 생산한다. 샤토 드 칼비에르는 말을 이용해 쟁기로 밭을 갈고 유기농 비료만 사용하는 등 가능한 한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하여 포도를 재배하며, 와인 양조에 있어서도 비개입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와인에 남프랑스의 테루아를 그대로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샤토 드 칼비에르는 에스피리투 산토 외에도 역시'악마 와인’으로 알려진 말리뇨 Maligno를 생산하고 있는데(왼쪽 두번째 사진), 루비처럼 풍성하고 따스한 느낌의 짙은 붉은색을 지녔으며 농축된 느낌의 강렬한 검은 과일 향과 함께, 부드러운 발사믹 소스와 어우러진 남프랑스의 검정 올리브 퓨레를 연상시키는 풍미를 발산한다 또한 숯불에 살짝 구운 듯한 부드럽고 우아한 바닐라와 후추 향, 생동감 넘치지만 우아한 타닌이 주는 견고한 구조감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다. 입안에서 실크처럼 부드러우며 매우 풍부하고 힘이 넘치는 와인으로, 15년 정도 보관 가능하다. 소비자가격은 7만원 대.
문의 _ 국순당(02-513-8686)